2024년 3월 28일(목)

영화 핫 리뷰

[리뷰] '해무'가 보여준 우리 사회 욕망의 그림자

김지혜 기자 작성 2014.08.11 12:19 조회 3,574
기사 인쇄하기
해무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2014년, 우리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충격과 공포 그리고 끝없는 슬픔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을 수습한 무능한 공권력에 대해 실망과 회의에 느꼈으며, 뿌리 깊은 좌절감과 패배감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예술은 현실의 투영이라 했던가.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때론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기도 한다. 오는 13일 개봉하는 '해무'가 그렇다.

극단 연우무대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막을 올렸던 연극 '해무'가 7년 만에 영화로 선을 보인다. 봉준호 감독이 기획·제작을 담당했고 '살인의 추억'의 각본을 썼던 심성보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한때 번영을 누렸으나, 폐선 직전인 낡은 배를 양수 삼아 사는 선원들은 돈과 욕망에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전 국민이 돈에 허덕였던 IMF 무렵. 전라남도 여수 일대 바다를 주름잡았던 전진호는 더이상 만선의 수확을 거두지 못하고 감척 사업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선장 철주(김윤석 분)을 필두로, 배에 숨어 사는 인정 많고 사연 많은 기관장 '완호'(문성근 분), 선장의 명령을 묵묵히 따르는 행동파 갑판장 '호영'(김상호 분), 돈이 세상에서 최고인 거친 성격의 롤러수 '경구'(유승목 분), 언제 어디서든 욕구에 충실한 선원 '창욱'(이희준 분) 그리고 이제 갓 뱃일을 시작한 순박한 막내 선원 '동식'(박유천 분)까지 여섯 명의 선원만이 전진호를 지키고 있다.

철주는 삶의 터전인 배를 지키기 위해 선원들에게 은밀한 제안을 한다. 이들은 한 마음이 돼 전진호에 오른다. 그러나 망망대해 위에서 그들이 실어 나르게 된 것은 고기가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그 가운데 동식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온 조선족 무리에서 홍매(한예리 분)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순탄하게 일을 마무리 할 것 같았던 이들에게 뜻밖에 사건이 벌어지고 전진호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또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참혹한 일들이 자행되기 시작한다.

해무

'해무'에는 여러 명의 괴물과 2명의 인간이 등장한다. 철주, 경구, 창욱 등은 각기 다른 것을 욕망한다. 욕망의 근원엔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작은 희생에는 무신경한,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들이다.

김윤석, 이희준, 유승목, 김상호, 문성근 등 연기 괴물이라 할 수 있는 명배우들이 징글징글한 연기로 인간 내면의 비릿한 욕망을 표현해냈다.

특히 김윤석이 분한 철주라는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독재자와 같은 서늘한 카리스마와 냉철한 판단력을 자랑하는 인물. 그러나 단순히 개인의 욕망에 의해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 앞장서 악행을 저지르기에 단순한 악역이라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선원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건 앞에서 동물적 본능과 욕망을 숨기지 않는 가운데 보는 이의 숨통을 틔우는 것은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동식과 홍매의 교감이다. 두 사람은 욕망의 전시장 같은 전진호 안에서 최후의 순수와 순정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 등장하는 두 사람의 정사신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수많은 상업영화에서 눈요깃거리로 소비된 정사신이 '해무'에서는 유의미한 장면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든다.

동식과 홍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여준 섹스는 괴물만이 남은 공간에서 보여준 유일한 인간의 몸짓이다. 그들이 나눈 몸짓과 눈빛은 단순히 서로를 향한 애정과 욕망의 표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두려움과 연민, 불안과 공포 그리고 생을 향한 집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해무 박유천 한예리

'해무'의 모태가 된 이야기는 2001년 일어난 제7 태창호 사건이다. 이 끔찍한 사건은 2007년 연극으로 만들어져 초연 당시 '산불'의 계보를 잇는 리얼리즘 연극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연극이 배에서 시작해 배에서 막을 내리는 것과 달리 영화는 육지에서 시작해 육지에서 막을 내린다. '해무'는 극 초반 어두운 사회상, 무기력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향후 사건과 캐릭터의 행동에 대한 몰입과 충격을 높인다.

특히 후반 30%가량을 원작 이야기와 다르게 창작한 것도 인상적이다. 에필로그를 통해 파국이 낳은 쓸쓸한 정서까지 담아냈다. 

영화 속 바다와 배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축소판이다. 그래서 외부 세계인 바다와 내부 세계인 배에 대한 공간 묘사가 치밀한 편이다. 제작진은 실제 바다의 생생한 색감과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을 담아내기 위해 거제도, 마산, 여수 등 국내에 수심이 가장 깊은 바다를 찾아 전체 촬영 분량의 약 70% 이상 해상 촬영을 진했다. 또 각 선원을 상징하는 영역인 조타실, 갑판, 부엌칸, 기관실 등 배 내부의 공간도 실제와 흡사하게 살려내 캐릭터와 한 몸처럼 묘사했다.

왜 지금 이 시기에 '해무'는 영화화 되어야만 했을까. 제작에 나선 봉준호 감독은 "영화로 만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이야기"라고 짧고 명료하게 말했다. 흥미로운 소재,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 강렬한 결말이 주는 섬뜩한 충격 등 이유를 대자면 수없이 많다. 무엇보다 제한된 공간에서 인간 내면의 욕망을 끄집어 낸 밀도높은 이야기가 '해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인간에게 불어닥친 파국은 개인의 잘못의 의해서도, 또 예기치 않는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망망대해 속 들이닥친 해무(海霧:바다 안개)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그 불가항력의 현장을 집요하게 카메라에 담아냈다. 근래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밀도 높은 심리극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상영시간 111분, 8월 13일 개봉.

ebada@sbs.co.kr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