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월)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 '차이나타운', 배우 김혜수가 보여준 증명의 시간

김지혜 기자 작성 2015.05.11 10:42 조회 5,283
기사 인쇄하기
김혜수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김혜수는 언제나 냉정한 자기 시선을 유지한다.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시대의 아이콘으로 정상의 인기를 유지해 왔지만,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오랜 경력에 비해 배우로서의 역량과 성취가 부족하다고 말해오곤 했다. 

물론 이것은 좀 더 젊은 나이에 다양한 도전을 하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남성 위주의 충무로 환경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역할 자체가 많지 않았던 탓도 있다. 그간 수많은 영화가 그녀의 이미지만을 탐했고, 함께 일한 감독 역시 배우 김혜수의 역량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노력이 부족했다.

김혜수는 늘 인터뷰에서 '배우의 욕망'을 이야기해왔다. 배우의 욕망을 자극할 영화고 역할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됐건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그간 스스로 욕망할 수 있는, 그리하여 기꺼이 망가질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다.

'차이나타운'(감독 한준희, 제작 폴룩스 픽쳐스)은 김혜수의 배우적 욕망을 제대로 건드린 영화였다. 단순히 여성이 중심이 된 느와르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맡은 차이나타운의 대모 역할은 여성 보스의 기능적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캐릭터가 하나의 세계가 되고, 가족의 중심이 되며, 여성이기 전에 삶의 주체가 되는 절대적 카리스마의 인물이었다. 

김혜수는 한 차례의 고사 끝에 이 역할을 선택했다. 치열하고 고단했던 시간을 이겨낸 김혜수는 '차이나타운'을 '타짜'와 더불어 배우 경력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김혜수의 연기는 외모 변신 때문에 묻힌 감도 없지 않다. 보형물로 몸짓을 키우고, 염색으로 머리를 희게 하고, 분장으로 주근깨를 박은 외적 변화는 놀라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평가받아야 하는 건 스크린을 집어삼키고 관객을 한순간에 몰입시킨 존재감이다. 

'차이나타운'을 지배하고, 이제 막 빠져나온 '엄마' 김혜수를 만났다.

차이나타운

Q. 한준희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고 난 후, 김혜수-김고은을 캐스팅해야겠다고 시종일관 이야기해왔다. 주변에서는 "에이 그게 되겠어" 라는 반응이었다는데?

A.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근데 뭐 작품이 좋았으니까. 현장에서도 느낀 거지만 우리 감독님은 결국엔 하고 싶은 데로 다 하신다니까.(웃음)

Q. 시나리오 거의 그대로 찍힌 작품이다. 완성된 영화를 본 첫 느낌이 어땠나? 

A. 예상대로 영화 고유의 색깔이 잘 살아있더라. 내 생각보다는 덜 마이너적으로 나온 거 같다. 전반적으로 뭔가 더 들어가고 덜 들어간건 아니고 영화 고유의 색깔은 있으면서 톤앤매너가 예상보다는 대중적인 느낌이었다.

Q. 출연 제안을 한 차례 고사했다고 들었다. 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왜?

A. 시나리오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재미있게 읽었다. 쉽지 않은 캐릭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이야기에 힘이 살아있었다. 잔상이 세게 남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 캐릭터는 단순히 '세다' 이상으로 아주 이상하게 부담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정서적으로 좀 힘들게 느껴졌달까. 이 영화를 할까 말까 같은 단순한 고민이 아니라 내가 수행해야 하는 캐릭터의 상징성, 그것을 잘 알기에 부담스러웠다.

Q. 엄마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속된 말로 '분위기 깡패'라고 하지 않나. 어떻게 접근한건가.

A.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엄마라는 캐릭터를 부지불식간에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를 생각했다. 그 낯설지만 불편한 에너지와 기운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차이나타운

Q. 엄마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외모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분장을 통해 페이스 오프하다시피 했는데?

A. 색다른 변신, 나는 좋았다. 분장을 시작함과 동시에 억지든 자연스럽든 최대한 인물에게 가깝게 접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분장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인물에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그 분장은 엄마라는 캐릭터에 적합한 것이기도 했다.

Q. 분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상당 부분 제안했다고 들었다. 감독의 말로는 매일 수십 장씩 참고할만한 사진을 송종희 (분장)감독에게 보내왔다던데?

A. 시나리오에는 엄마의 외모가 '피폐한 얼굴' 정도로만 묘사돼 있었다. 엄마는 일영이가 상상도 못 할 힘든 과거를 거쳐온 사람이다. 오로지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해...여성성은 고사하고 피부나 몸은 방치됐고, 내부는 더 피폐해진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살이 쪘다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몸은 무너져버린 상태인거지. 그래서 엄마의 잔혹하고 비정한 삶을 외모로도 느낄 수 있게 얼굴부터 몸짓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상상해봤다. 머리 색깔, 몸집의 형태, 잡티의 크기와 농도까지 다 고민해서 결정한 것이다. 

Q. 분장에 따른 동작 연기들도 인상적이었다. 걸음걸이나 자세 같은 데서 인물의 위엄이 느껴졌다. 어떤 탐구와 노력을 거쳤나?

A. 내 몸 상태가 그러하다면 그 몸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런 몸집을 가진 여자들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엄마는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도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는 위엄이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빨라야 할 이유가 없다. 어슬렁한 듯 느리게 걸었으면 했고, 앉을 때는 다리를 쩍 벌렸으면 했다. 가장 좋은 건 분장을 하고 많이 움직여보며 인물의 동작을 만들어나가는 것이었다. 다행히 보형물이 무겁지 않아 많이 연습할 수 있었다.

Q. 영화엔 엄마의 전사(前事)가 거의 없다. 인물의 극적인 과거가 없이 강렬한 현재를 연기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A. 처음엔 밑도 끝도 없이 센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전체 이야기를 놓고 보면 엄마는 그래야만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전사나 사족이 있으면 엄마를 이해하고 연기하는 데 편할 수 있지만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 자체가 어떤 곳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엄마 자체가 곧 차이나타운이다. 엄마가 읽히고 드러나야 관객이 차이나타운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엄마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영화의 골조 자체가 뒤틀렸을 것이다.

김혜수

Q. 일영을 끝까지 살리려고 한 엄마의 모습은 관객에 따라 이해 여부가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배우 본인은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했나?

A. 트렁크에 실려 마가흥업으로 온 일영을 본 순간 엄마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이임을 직감했다. 엄마가 일영이를 지키는 건 본인이 생존하는 방식이다. 그녀의 생존은 후임을 키워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를 끊임없이 시험했고, 실패했지만 버리지 않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는 없어지지만, 일영을 통해 남는 것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나를 대신할 나로서 말이다.

Q. 엄마의 생존이 단순한 생과 사의 문제는 아니란 말로 들린다.

A. 영화 시작하기 전에 감독에게 영화 제목으로 '모사'(母蛇)를 추천하기도 했다. 살모사(殺母蛇)는 엄마가 죽어야지 새끼가 나온다. 엄마와 일영의 관계가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일영에게 "죽을 때까지 죽지마"라고 한다. 그 말은 죽음도 네가 선택할 정도로 주체적으로 살라는거다. 엄마는 차이나타운에서 일관성 있게 생존해온 사람이다. 생존만이 목적이다 보니 누구를 죽이는 것도 일상이 됐다. 그것이 그녀만의 삶의 방식이었던 거지.

Q. 배우로서 엄마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인물을 연기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강렬한 캐릭터를 오랜 시간 연기하면서 캐릭터에 잠식 당하거나 본인이 마모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A. 촬영을 준비하는 기간에는 좀 힘들었다. 그러나 시작하고 나서는 오롯이 인물에 취했다. 연기자마다 좀 다르고, 작품마다 다른 것 같긴 한데 나의 경우 영화나 캐릭터의 강도에 크게 영향을 받는 편은 아니다. 우리 영화는 가슴을 억누르는 슬픔 같은 게 있는데 다행히 촬영이 끝나고도 지배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Q. 엄마는 말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인상적인 대사를 남기며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A. "증명해봐. 네가 쓸모 있다는 증명"은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말인것 같기도 하더라. "워더 하이즈"(내 아이입니다)의 경우 무심하게 던지는데 엄마에겐 그게 당연한거니까. 후에 일영이 타인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관객에게 큰 울림을 전달하는 의미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내가 이제 쓸모가 없네"는 엄마가 자신을 정의하고 죽을 순간을 선택할 때 나온 말이다. 

김혜수

Q. '차이나타운'은 당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와 후미를 대표할 여배우를 보는 즐거움이 있는 영화다. 김고은이라는 괴물 신인과 호흡을 맞추면서 든 생각이 있다면?

A. 좋은 배우다. 감동했고, 대견했다. 감성의 순도가 있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영민함이 있고, 작품이나 자기 캐릭터에 접근하는 태도도 진중하다. 더불어 현장에서의 집중력도 좋았다. 이런 말이 교과서 스럽게 들리겠지만 이런 것을 갖춘 배우가 많지 않다. 그래서 고은이가 놀라웠다. '차이나타운이라는 세고 어려운 작품을 만나서 잘해냈고 앞으로 더 많은 성장을 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풍파도 겪겠지만 늘 응원할 것이다. 엄마가 일영을 보는 느낌 같다고? 비슷하다. 물론 난 절대 권력자는 아니지만.

Q. 신예 한준희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A. 신인이다 보니 처음에는 잘 모를 수 밖에 없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쉽지 않은 이야기를 잘 풀어냈고, 이 영화를 하겠다는 뚝심을 보면 무모한 도전만은 아니겠구나 싶더라. 실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서 어떤 치기가 아니란 걸 알았다. 무엇보다 현장에 오기 전 너무나 꼼꼼하게 준비를 해왔다. 현장에서 감독에 대한 믿음이 더 단단해졌다. 

Q. 연륜 있는 배우와 신인감독의 만남이 늘 시너지를 내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의사소통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많다. 

A. 배우도 완숙한 배우의 힘이 있듯 신인감독도 그만의 프레쉬함이 강점이 된다. 결국,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고 어떤 시점이냐가 중요한 것 같다. 의사소통은 하면 된다. 안하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거지. 내 연기 경력이 오래됐다고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기술적인 면, 감정적인 노련미 등이 해온 시간에 비례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 영화는 좋았던 게 같이 있으면 고만고만한 느낌이 들었단거다.

차이나타운

Q. '도둑들'이나 '관상' 등에선 조연도 마다치 않고, '차이나타운'에서는 외모 변신도 마다치 않는 등 또래의 여배우들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나름의 소신이 있는 건가?

A. 특별히 없지만, (소신이)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만날 수 있는 작품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내 나이에 맞는 역할이나 연기란 건 솔직히 모르겠다. 그때그때 내가 매력을 느끼는 작품을 만나면 그게 가장 행운인거지. 나이는 한살 한살 먹어가는 거고 누구랑 다르게 해야겠다 이런 욕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마음가는 데로 결정하려고 한다. 어릴 때 워낙 노숙한 역을 많이 해서 그런지 이제는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나이가 장점이 된다면 마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무기가 되니까. 다만 내 나이가 뭘 하는데 제한적이라서 애써 다른 작품을 한다면 그건 독이 될거란 생각은 늘 갖고 있다. 

Q. 여자 영화의 목마름을 오랫동안 이야기 해왔다. 요즘 충무로 환경에 변화가 좀 있다고 느끼는지 궁금하다.

A. 예전과 비교해 영화적으로 고민할만한 것들이 조금은 더 생긴 것 같다. 여배우를 작품에 전면에 내세웠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여성이 그렇고 그런 캐릭터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캐릭터 자체로 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아무리 영화가 괜찮아도 내 캐릭터가 뚜렷하지 않다면 흥미가 안 생긴다. 연기자로서 뭔가를 해볼 여지가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 배우를 욕망하게 하는 역할이라면 비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늘 기다리고 있다. 

ebada@sbs.co.kr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