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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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간신', 희대의 폭군과 간신의 19금 홀로코스트

김지혜 기자 작성 2015.05.12 13:00 조회 5,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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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연산군(1476~1506)은 조선 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와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세종, 중기 르네상스를 주도한 정조와는 다른 의미로 말이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에 기록된 가장 난폭한 왕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왕이 아닌 군이라는 칭호를 받은 이는 500여 년을 통틀어 연산과 광해뿐이다. 광해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분분하지만 연산이 희대의 폭군이었다는 것에 반기를 드는 역사학자는 없다.

연산은 난폭한 성격과 입이 쩍 벌어지는 기행으로 피의 역사를 만든 인물답게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를 보필했던 장녹수 역시 역사에 관심없는 이들도 알 만큼 유명한 팜므파탈이다.  

'간신(諫臣)'(감독 민규동, 제작 수필름)은 연산군 11년, 조선 팔도의 1만 미녀를 강제 징집했던 사건 '채홍'을 소재로 한 팩션 사극이다.

영화는 연산군 시대 속 다양한 인물을 다룬다. 포커스를 왕이 아닌 주변 인물에 맞춰 동시기를 그린 사극과 차별화를 꾀했다. 중종실록 "작은 소인은 숭재요, 큰 소인은 사홍이라,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라는 기록에서 출발한 '간신'은 폭군에게 아첨해 권력의 상아탑을 쌓아간 이들의 이야기다. 

제목에 '간할 간'(諫)이 아닌, '간음할 간'(姦)을 썼다는 것은 이 작품이 조선 최고의 간신인 임사홍(천호진), 임숭재(주지훈) 부자를 다루는 동시에 희대의 폭군 연산(김강우)의 이야기도 아우르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간신

영화는 근래 한국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렬한 비주얼로 문을 연다. 오프닝 시퀀스는 연산군 10년, 어머니 윤 씨의 복위 문제로 불거진 사건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채웠다. 피의 복수극으로 유명한 이 사건을 슬로우 모션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피와 살이 튀는 능지처참의 잔혹한 풍경을 화려한 비주얼로 보여주며 시선을 끈다. 

압도적인 미장셴도 돋보이지만, 판소리 내레이션도 인상적이다. 극 중 등장하는 한 인물이 3인칭 화자가 돼 이야기를 전달한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에서도 내레이션이 사용된 바 있지만,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간신'은 창을 하는 내레이터를 통해 영화를 판소리극으로 발전시켰다. 참신한 형식의 변주다. 

영화 속 소재인 '채홍'은 장악원 제조로 있던 임숭재와 그의 아버지 임사홍을 채홍사로 임명해, 조선 팔도의 미녀를 색출해 궁으로 들이도록 명한 사건이다. 채홍사로 부임한 임숭재는 미녀들을 강제 징집했고 나라에서 관리하는 기생으로 구분해 '운평'이라 칭했다. 그 중 우수한 성적을 거둬 왕에게 간택된 자들을 '흥청'이라고 불렀다. 채홍된 여성에 대한 왕의 총애는 곧 권력으로 이어지기도 해 간신들의 권력 암투가 채홍 간택 과정에 개입되기도 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지만, 어지러운 세상엔 간흉도 판을 치는 법이다.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는 절대권력을 휘두른 연산군에게 기생하며 배를 채운 인물이다. 특히 임숭재(주지훈)는 왕의 옆자리를 탐하는 아버지와 달리 왕 위의 왕을 꿈꾸는 희대의 간신이다.

임숭재는 자신을 견제하고 왕을 독차지하려는 후궁 장녹수(차지연)를 누르기 위해 운평 중 가장 뛰어난 자질과 미색을 갖춘 단희(임지연)을 발탁한다. 장녹수 역시 자신의 권력을 뺏길까봐 위기감을 느끼고 조선 최고의 기생 설중매(이유영)를 들여 임숭재 부자를 무너뜨릴 계략을 세운다.   

간신

색(色)에 취한 왕을 위해 나라가 나서 미녀를 모은 사건은 그야말로 경악스럽다. 영화는 왕에게 간택 받기 위해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치는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신체검사부터 체력 단련에 이르는 갖가지 방중술도 묘사된다. 사대부가 여식, 부녀자, 천민 등 계급을 막론하고 징집된 미녀들은 왕을 즐겁게 해줄 가무는 물론 잠자리 기술까지 교육받는다. 

'채홍'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번도 조명한 적 없는 사건이기에 흥미롭다. 하지만 마냥 신기하게 구경하기에는 불편하고 끔찍한 풍경이기도 하다. 여성이 기계화되고 도구화되는 풍경은 연산군 시대에 자행된 '19금 홀로코스트'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주도한 인물이 한 나라의 왕과 신하라는 것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역사다.

영화의 노출 수위는 상당하다. 여성의 전라가 빈번하게 노출되고, 가학적인 베드신도 장시간 등장한다. 그러나 야함이 에로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살색의 향연은 관능과는 거리가 있다. 기괴한 사회상 탓에 우스꽝스럽고 때론 잔혹하게 여겨진다. 

왕의 귀를 사로잡은 간신과 마음을 사로잡은 안방마님의 권력 암투를 그리던 영화는 중반 이후 멜로 드라마로 급선회한다. 조선 최고의 명기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겠다던 임숭재는 단희에게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두 인물은 감정을 이입하기 힘든 행동의 변화를 보여준다. 

영화는 단희라는 인물의 전사를 보여주며 임숭재의 감정을 뒷받침하려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멜로로 느껴질 수 있다. 감독은 두 사람이 나누는 감정은 죄의식에 가깝다고 말했지만, 그 의도와 의미가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될지는 의문스럽다. 결국 '간신'도 멜로 강박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일련의 사극 영화와 비슷한 한계를 드러낸다. 

간신 김강우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는 연산을 연기한 김강우다. 광기의 왕을 과잉의 연기로 보여주는데 스크린에 미쳐 날뛰는 한 마리의 말을 풀어놓은 모습이다. 내면의 들끊는 분노를 표출하다가도 미녀들에 둘러싸였을땐 영락없는 호색한이다. 

흥청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단희 역의 임지연과 설중매 역의 이유영 역시 몸을 사리지 않은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채홍 결승전에서 보인 동성애 베드신은 두 여배우의 연기 열정이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되지 못했을 기괴한 장면이다. 

또 한 명 주목해야 할 인물은 가수 출신의 배우 차지연이다. 장녹수를 질투욕에 눈먼 팜므파탈 보다는 권력욕에 불타는 여장수처럼 해석한 것이 인상적이다. 

'흥청망청'(興淸亡淸)의 웃픈 어원을 그린 '간신'은 미술, 세트, 의상, 촬영 등에 있어 근래 만들어진 사극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탐미적이고 감각적으로 만든 영화는 연산군이 예술에 상당한 재능을 가졌고, 멋과 맛을 즐겼다는 기록에도 걸맞는 연출을 구사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사회와 맞닿아 있는 매끈한 정치풍자극으로 온전히 영화를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청소년 관람불가, 상영시간 131분, 개봉 5월 21일.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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