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 '무뢰한' 오승욱 감독이 남겨둔 빈칸의 의미

김지혜 기자 작성 2015.06.11 09:17 조회 3,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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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감독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무뢰한'(감독 오승욱, 제작 사나이 픽처스)은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어른의 영화다. 이 작품에는 여백과 생략이 많다. 이것은 젠체하기 위한 줄임표가 아니다. 수많은 시련과 상처로 단련된 사람들의 감정 사림의 결과다.

어른의 사랑은 말보다 몸이 쉽다. 혜경(전도연)은 사랑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재곤(김남길)은 사랑 앞에서 맴돌기만 한다. 존재를 느끼되 말하거나 다가가지 않는 것, 어른의 사랑은 이다지도 어렵다.

이 영화의 불친절함, 이를테면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상황과 명확히 보이지 않는 인물의 감정을 마주 하고 있다 보면 '무뢰한'은 보는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삶이 그렇다. 마음 가는 데로 못하고,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하지 못한다.

무뢰한의 무례한 사랑을 그린 이는 오승욱 감독이다. 2000년 영화 '킬리만자로'로 한국 영화계에 강렬한 데뷔전을 치렀던 오 감독은 15년 만에 두 번째 작품으로 돌아왔다. 하드보일드한 스타일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번엔 느와르가 아닌 멜로 장르로 자신의 영상미학을 펼쳤다. 

이번 영화에도 유의미한 빈칸들이 가득했다. 오승욱 감독에게 그 의미를 물었다. 그리고 이 기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채워나간다. '무뢰한'은 두 번 보면 더 깊이, 넓게 보이는 영화다. 그 여운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다면 다시 한 번 극장으로 향할 것을 권한다.

무뢰한

Q. 이러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게 놀라웠다.

A. 이러한 영화라 10년 전엔 투자가 안 됐나 보다. 모호하고 밋밋한 이야기를 보존케 하고 찍게 해준 제작사와 투자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Q. 처음 편집본을 봤을 때 심정이 궁금하다. 10년간 준비한 작품을 스크린에서 만난 그 기분 말이다.

A. 현실감이 없더라.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최종 편집본 나왔을 때 주변에서는 "오승욱다운 영화를 찍은 거 같다"고 했지만 나는 괴롭기만 했다. 속으로 '너 망친 거야, 망쳤어' 하는 마음이었다. C,D 정도의 편집본이 나왔을 때 국수란 피디가 "거봐요. 재밌는 영화 나왔다고 했잖아요!"라고 화를 내더라. 내가 나를 의심할 때 주변에서 확신을 해주는 게 큰 힘이 됐다.

Q. 데뷔작 '킬리만자로'(2000)이후 15년 만이다. 영화계는 많이 변했는데 오승욱의 스타일은 크게 바뀌지 않았더라.

A. '킬리만자로' 개봉 때 김성수('비트', '태양은 없다' 연출) 감독이 날 인터뷰한 적 있다. 그때 "당신은 사건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직 사건 전.후의 감정에만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더라. 우리가 좋아하는 '영웅본색'이나 '와일드 번치'를 봐도 카타르시스가 매우 중요한데 당신은 그런 걸 다 뺀다고. 나도 알고 있다고 했다. 알고선 왜 안 하느냐고 하더라. 곰곰이 생각해봤다. 좋아하면서 왜 안 할까. 난 카타르시스를 위해 앞뒤를 희생하는게 싫은 거였다.

Q. 이를테면 재곤과 혜경이 재회한 후반부 장면이 예가 될 수 있겠다.

A. 편집하면서 라스트가 에필로그(후일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사랑한다고 고백을 안 하느냐고 하는데 그러면 칼을 찌르고 가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건보다 중요한 게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은 마지막에 터져야 하는데 그 앞에 카타르시스가 나오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무뢰한

Q. 하드보일드와 멜로의 결합도 그렇고 뚜렷해 보이지 않은 감정, 모호한 분위기 등이 유럽 영화 같은 느낌을 주더라. 

A. 칸영화제에서도 장르의 결합에 대해 많은 질문을 받았다. 멜로랑 하드보일드가 잘 합쳐진 것 같다고 평가하더라. 나에게 장르란 파레트고 붓이고 물감일 뿐이다. 그건 그렇게 중요치 않다.

Q. 하드보일드한 스타일과 멜로 장르의 만남이라는 게 관객 입장에서는 생소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갈등이 명확하거나 감정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도 불친절해 보일 수 있다.

A. 우리 영화를 멜로로만 포장하기엔 그 속에 감정이 너무나 많다. 딱 한 가지의 감정으로만 그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무책임하게 들리겠지만 하나의 단어로 이야기하는 순간 영화가 가진 에너지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Q. 왜 재곤은 사랑을 말하지 않나. 관객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지점일 것 같다.

A. 사랑은 한 단어로 말하기가 힘들단 생각을 한다. 갈래가 많은 감정이다. 혜경이 재곤을 찌를 때 재곤의 표정이 처음엔 '너 나 왜 찔러'이지만 어느 순간 '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바뀐다. 물론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모호하고 복합적이다. 심지어 광기도 있다.

Q. '무뢰한'은 죄에 관한 영화라고도 했다.

A. 정체성, 이중성, 도플갱어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사실 정재곤의 신분이 밝혀진다고 큰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남을 속이기 위한 기제로 가짜 행세하면서 마음을 훔치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그게 가장 나쁜 죄라고 본다.

오승욱감독

Q. 감독의 이야기라고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자전적이라고 하는 건가?

A. 죄에 대해 이야기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도 그랬고, 영화화되지 못한 내 모든 시나리오가 그렇다. 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뤘던 것 같다. 무뢰한이라는, 자기 방식대로 살면서 남이 상처받는 건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무뢰한'의 정재곤(김남길)도 그렇고 '킬리만자로'의 해철(박신양)도, 번개(정은표)도 그렇다. 또 나도 그렇다.

Q. '무뢰한'은 재곤의 뒷모습으로 시작해 재곤의 앞모습으로 마무리된다.

A. 처음에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주인공으로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해 앞모습으로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오프닝 시퀀스에 제목도 크레딧도 넣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한재덕 대표(제작사 사나이 픽처스 대표)가 "제발...그건 배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말리더라.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앞에 '무뢰한'이라는 제목을 박고 싶었다. 재곤이 곧 무뢰한이니까.

Q. 이번 영화에는 여자가 나온다. 그것도 핵심 인물로 말이다.

A. 여자 캐릭터를 영화에서 양념처럼 사용하는 걸 싫어한다. 살짝 나타났다 어느 순간 사라지는 거 말이다. 그게 싫어 여자 캐릭터에 대한 취재를 많이 했다.

Q. 취재는 어떻게 이뤄졌고 시나리오에 얼마만큼 반영되었나?

A. 직업여성 관찰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2005년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룸살롱에 자주 가신다는 어떤 분을 취재했다. 그쪽 업계 여자들은 어떤가 하고 말이다. 뜻밖에 현모양처 스타일이 많다더라.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지 살림도 잘하고 순종적인 여자들이 대부분이라고 하더라.

그러다 어떤 여자를 보았다. 예쁘지는 않은데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승승장구하고 있다가 주식에 투자해서 날렸다고. 근데 그 여자가 어느 날 밖에서 서럽게 울고 있다가 손님이 간다고 하니까 울음을 뚝 그치고 헤헤헤 웃으며 배웅하더라. 그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그래서 영화에 썼다. 또 "뭐하는 씹새끼입니까"라는 혜경의 대사는 내가 실제로 들은 거다.

무뢰한

Q. 김혜경이라는 술집 여자가 전형적으로 그려지지 않아서 좋았다. 생기 없는 꽃처럼 다루지 않고, 비교적 능동적으로 그려낸 점 말이다.

A. 김혜경이라는 캐릭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함이다. 업소 다니는 여자분들을 만나 얘기해보면 자기 젖가슴이나 만지려고 하고, 어떻게든 공짜로 자보려고 하는 남자를 매일 만난다고 하더라. 얼마나 끔찍한 하루하루 인가. 그러나 혜경은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솔직하려고 한다. 남자들은 그곳에 모든 여자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혜경은 모든 사람에게 솔직함으로써 자신만의 무기를 가진다.

Q. 전도연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김혜경의 입체성은 전도연의 깊이 있는 캐릭터 해석과 절제미 넘치는 연기력을 통해 획득한 것이기도 하다.

A. 배우가 캐릭터에 완전히 밀착돼 연기한다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새삼 느꼈다.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런 연기는 계산해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연기를 안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면 눈꺼풀, 눈썹, 볼 근육에도 감정을 싣더라. 사실 마지막에 혜경이 재곤을 찌르는 신은 웬만한 배우는 "왜 찌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에 이르자 도연 씨가 "감정이 쌓여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Q. 연기 디렉션을 잘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배우들에겐 힘들 수 있다.

A. 지금 내가 영화에 대해서 말한 것들을 배우에겐 얘기한 적 없다. 배우에게 연출 의도나 장면 장면의 의미를 잘 설명하지 않는다. 데뷔작 '킬리만자로'때부터 굳어진 것 같다. 박신양 씨와 호흡을 맞추면서 신의 의미 등을 설명한 적 있는데 "그건 감독님의 경험이지 제 것이 아니잖아요. 감독님이 설명해주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한정되잖아요"라고 하는데 느끼는 바가 컸다. 연출에 대해 잘 모를 때였는데 그때의 경험을 통해 배우가 연기에 있어 큰 틀을 안 벗어나면 놔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때 호흡을 맞춘 안성기 선배님도 내가 별 디렉션을 안 주시니 불안하셨던지 "오 감독이 별말이 없어서 난 자유롭게 하고 있는데 내 연기의 상, 하한선은 가지고 있는 거지? 나 그냥 이렇게 해도 되는 거지?"하고 물으시더라.

오승욱감독

Q. 배우의 해석이 감독의 해석과 다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시행착오가 생기면 어떻게 조정하나?

A. 감독이 배우의 눈꺼풀 하나까지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이미 시나리오 안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 집어넣었는데 배우가 그걸 오독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행히 전도연, 김남길은 오독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게 어긋날 수는 있는데 그건 영화나 인물을 풍성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Q. 영화에서 클로즈업을 잘 안 쓴다. 선호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

A. 너무 감정을 강요하는 것 같고 거짓말 같아서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속 클로즈업들은 정말 좋아한다. 그의 영화에 클로즈업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대신 인장이 되는 클로즈업이 꼭 있다. '무뢰한'에서도 꼭 찍어야 하는 클로즈업이 있었다. 재곤이 혜경이를 데려다주고 나와서 도청기 끼우고 있을 때 들어가는 빅 클로즈업 그리고 해장국 집, 혜경의 귀걸이 클로즈업 정도다. 잡채 신은 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김상범 편집감독의 의견을 따랐다. 붙여놓고 보니 놀랍더라. 

Q. 김상범 감독과 만난 건 오승욱의 작품 세계를 보다 견고하고 뚜렷하게 한 게 아닐까 싶더라.

A. 맞다. 처음에는 내 스타일을 고집한 면이 강했다. 어느 날 김상범 감독이 "감독님이 클로즈업 싫어하고, 신 잘라내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만 제가 해온 것들에 대해서 좀 믿고 봐달라"고 하더라. 김상범 감독와 영화에 대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의 아이디어들에 깊이 감동했다.

Q. 재곤이 하는 마지막 대사는 굉장히 영화적이라고 느꼈다.  

A. 한재덕 대표가 만든 대사다. 처음엔 영어대사 '해피 뉴 이어, 비치"로 출발해 "새해 복 많이 받아라, XXX아"가 된 거다.

Q. 소변신도 상당히 인상적이더라.

A. 관객들이 불편하게 생각한다고 빼라는 말이 많았다. 편집 시사 땐가 우리 영화가 좋다는 반응이 많았을 때 남길 씨와 강력하게 어필을 했다. 그게 넣어야 라스트가 힘을 들어가고 주인공의 나쁜 면모나 괴상함이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자긴 깨끗한 놈인 줄 알았는데 결국 자신도 남들과 다른 바 없는 냄새 나는 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승욱감독

Q. 데뷔작 '킬리만자로'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작품은 잘 만든 실패작이었다. 왜 대중과 교감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A. 긴 시간 동안 생각해봤다. 대중이 이 영화를 왜 좋아하지 않았을까가 아니라 내가 어떤 거짓말을 했나를 생각했다. 젠체하는 멍청이 같단 생각을 했다. 차기작에서는 모르는 얘기는 하지 말고, 멋 부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무뢰한'에서는 주인공들의 감정 상태에 대해서 좀 더 이해가 간다고 생각하는 것만 하려고 했다.

Q. 영화를 만들지 않았던 15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

A. 무지하게 재밌게 지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남자에게 있어 절정의 시기는 43살부터 47살이 아닌가 싶다. 영화감독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 교류하고, 강의도 나가고, 글도 쓰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뿐이지 즐겁게 보냈다.

Q. 차기작에 대한 계획은? 이젠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으면 한다. 진심이다.

A. 논의는 하고 있다. 우리 제작자도 "빨리 좀 시나리오를 쓰라"고 난리다. 이번 칸영화제 때 이광모 감독님을 만났다. 그분은 내가 장편 데뷔하기 전에 만들었던 단편 시나리오를 보시고 "엑설런트"라고 호평해주신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리고 그분이 '아름다운 시절'(1998)로 대종상 작품상을 타고, 내가 '8월의 크리스마스'(1998)로 각본상을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를 보며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이번에 한재덕 대표와 함께 만났는데 날 보시고 "15년 만에 영화를 만들다니…. 나도 만들 거야"라고 하시더라. 더불어 우리 둘이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더라. 한 대표가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내 분무기로 물을 칙칙 뿌려서 썼다"고 하더라.(웃음)

Q. 이광모 감독님 이야기를 들으니 반갑다. 그분도 늘 연출 복귀를 꿈꾼다는 사실이 반갑고 기대된다.

A. 모든 감독의 바람이다. 영화를 안 찍고 있다고 해서 연출에 대한 꿈을 버린 건 아니다.

Q. 조소과(서울대학교)를 나왔다. 화가가 아닌 감독의 길을 택한 이유는?

A. 결론만 이야기하면 영화가 더 재밌었다. 지금도 영화를 한다는 게 행복하다. 사람들이 나에게 15년을 어떻게 견뎠느냐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영화가 좋았다. 이 직업을 택했기 때문에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다. 아직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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