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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영화? 펀한 영화!] '캐롤', 내 사랑을 알아본 찰나의 순간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2.11 10:50 조회 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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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는 첫눈에 반했다.

뉴욕 맨하탄의 한 백화점, 인형을 팔고 있는 테레즈는 캐롤을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캐롤 역시 저 멀리 있는 테레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일순간 네 개의 눈동자가 마주치고 이들은 비로소 느낀다.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것을.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단 3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알아본 순간은 그보다 더 짧은 찰나였다. 시선과 시선이 교차하고 이내 강렬한 끌림으로 두 사람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렇게 사랑은 시작됐다. 

영화 '캐롤'(감독 토드 헤인즈)은 이들의 사랑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캐롤과 테레즈가 왜 서로를 사랑하게 됐는지가 아닌,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지켜가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랑 그 자체의 본질과 마주하는 놀라운 순간을 만날 수 있는 영화다. 

캐롤

플롯은 단순하다. 만남과 사랑과 이별이라는 멜로 영화의 전형에 가까운 이야기 흐름이다. 특별하다면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돈 많은 유부녀와 보잘것없는 배경을 지닌 여자 그리고 이들의 사랑을 막는 사람들과 그보다 더 큰 장벽인 사회적 편견이 있다.  

이야기의 단순함을 풍요롭게 채우는 것은 토드 헤인즈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다. 감독은 성적 소수자다. '파 프롬 헤븐'(2003)에서 남편의 성정체성을 알게된 후 위기를 맞은 한 여성의 삶과 사랑을 세심하게 그린 바 있다.  

'캐롤'의 원작이 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자전소설('The price of salt')은 토드 헤인즈 감독이 누구보다 잘 그려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감독은 이들이 사랑하는 순간을 현미경으로 포착한듯 정밀하게 담았고, 이후 벌어지는 고난 역시 비정할지언정 과장스럽지 않게 그려냈다.

각본가 필리스 네이지가 쓴 시나리오는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소설이 테레즈 관점의 서사였다면, 영화는 테레즈 만큼이나 캐롤의 상황에 집중한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그녀가 동성을 사랑함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시련을 영화는 보다 상세하게 보여준다.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의 또렷하고도 풍부한 감정 연기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다. 1950년대 미국 부유층의 풍요를 우아한 룩으로 보여주는 케이트 블란쳇은 화려함 너머의 공허와 외로움을 그만의 분위기와 목소리로 보여준다. 강렬한 눈빛과 호소력 짙은 감정연기는 오로지 케이트 블란쳇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루니 마라가 보여준 연기 역시 훌륭하다. '밀레니엄: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2)에서 중성적 매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루니 마라는 신비로운 분위기만은 그대로 둔 채 완전히 다른 여성으로 변신했다. 루니 마라의 테레즈는 수동적이고 연약한 그러나 말 못 할 꿈을 가진 자라지 못한 소녀 같은 이미지다.

'캐롤'이라 명명한 이 영화는 테레즈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캐롤을 만나며 비로소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캐롤

'캐롤'은 시선의 영화다. 감정을 교환하는 가장 강렬한 수단인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꿰뚫는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사랑의 눈빛을 충실하게 실어나른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의 감정의 결을 낱낱이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연인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넌 날 왜 사랑해?"라고 묻는다면 "너니까"라고 뭉뚱그려 답하곤 한다. 캐롤은 테레즈를 '하늘에서 떨어진 내 사랑'(flung out of space)이라고 표현한다. 말이 모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캐롤의 말은 가장 진실되고 따뜻한 사랑의 언어다. 

영화는 수미쌍관처럼 오프닝과 후반부에 같은 장면을 배치했다. 시작부에 등장하는 장면은 제3자의 시선에서 관찰된 두 사람의 뒷모습이다. 후반부에는 같은 장면이 캐롤과 테레즈의 1인칭 시선으로 묘사된다.

무심코 스쳐갈 이 신은 캐롤이 테레즈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가슴속에 꾹꾹 눌러뒀던 것을 토해해듯 꺼내듯 외마디("아이 러브 유") 외침은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캐롤'은 약자의 사랑을 그렸다. 지금도 쉽사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소수자들의 이야기다. 하물며 때는 1950년대이다. 금기시된 사랑을 나눴던 캐롤과 테레즈는 사회의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끝까지 투항하지는 않았다. 보다 더 숭고한 가치를 선택했다.   

영화의 엔딩은 서로를 알아봤던 그 찰나처럼 서로에게 다가가는 주저없는 순간을 보다 강렬하게 그렸다. 

그건 진짜 사랑이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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