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스타 끝장 인터뷰

[영화번역의 신세계] '데드풀' 구강액션, 어떻게 탄생했나…번역가 황석희의 감각(인터뷰①)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3.04 09:46 조회 3,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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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풀 번역가 황석희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데드풀'은 히어로계의 변종 캐릭터다. 인류 평화와 지구 수호? 이런 거창한 사명엔 도통 관심이 없다. 정의감과 책임감은 먹는 '감'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주먹을 쓰는 이유도 대의적 이유가 아닌 사적 복수 때문이다.

마블 유니버스의 말썽꾸러기이자 히어로계의 돌연변이 데드풀이 국내 290만 관객을 매료시켰다. 지난해 이맘때 변종 스파이 '킹스맨'이 B급 정서로 국내 관객을 사로잡았다면 올해는 데드풀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기존 히어로 무비와는 다른 색깔임을 알 수 있는 센스 넘치는 크레딧을 만날 수 있다.

제작: 개허접 필름(SOME DOUCHEBAG'S FILM),
출연: 신이 내린 또라이(STARRING GOD'S PERFECT IDIOT),
제작비 지원: 호구들(PRODUCED BY ASSHATS),
감독: 돈만 많이 처받는 초짜(DIRECTED BY AN OVERPAID TOOL)

황당한 오프닝 크레딧은 시작에 불과하다. 가면을 쓴 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은 영화 내내 19금 유머와 비속어, 은어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이 괴짜 히어로의 매력은 사실상 '주먹 액션'이 아닌 '구강 액션'에서 비롯된다.

미국식 유머로 가득한 '데드풀'이 국내 관객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것은 주인공의 입담을 스크린으로 잘 옮긴 번역 덕분이기도 하다.

데드풀의 말빨을 생생하게 전달한 영화번역가 황석희 씨를 만났다. 최근 '데드풀 100배 즐기기'라는 이름 아래 GV(관객과의 대화)를 열기도 한 그는 현재 영화번역계의 대세로 불린다.

데드풀

Q. '데드풀' 흥행의 1등 공신으로 라이언 레이놀즈의 치명적 매력과 더불어 '약 빤 번역'이 꼽히고 있다.

A. 이런 분위기가 놀라운 따름이다. 사실 '데드풀'은 작업을 끝내놓고 겁을 많이 먹었다. 지인들에게 "개봉하면 2주 정도는 잠수타겠다"고 선언했었다.        

Q. 잠수라니?

A. 19금 유머와 욕, 비속어에 은어가 많은 작품이라 개봉하면 관객들에게 욕 많이 먹겠구나 싶었다.

Q. 국내에서 '데드풀'을 가장 빨리 본 관객이다. 아마도 이 일을 하는 가장 큰 장점일 것 같은데?

A. 그렇다. 나만 볼 수 있게끔 암호화된 영상이 온다. 처음 볼 때가 가장 신났다. CG 작업이 덜 된 영상인데도 너무 재밌더라. '와 재밌다'하고 생각없이 보다가 정신을 차리니 '근데 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하지?'싶더라.

Q. 암호화된 영상이라니, 첩보 영화 같다. 영화번역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하다.

A. 영화사마다 조금 다른데 대부분 해외 업체가 만들어 놓은 전용툴이 있다. 해외에서 스크립트 하는 분들이 대사별로 호흡을 잘라놓는다. 그걸 스팟팅(Spoting)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순서대로 맞춰서 번역한 대사를 기재한다. 그러나 해외에서 넘어온 스팟팅 리스트가 정확하진 않다. 그러면 번역을 하면서 자막을 자르거나 병합하는 일도 한다.

데드풀 번역가 황석희

Q. '데드풀'은 번역가가 곤혹스러워할 요소를 다 갖춘 작품이다. ▲주인공이 말이 많고 ▲19금 유머가 차고 넘치며 ▲ 비속어, 은어, 욕의 3단 콤보까지 곁들였다.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아니었을 것 같다.

A. 그렇다. 작업 자체는 굉장히 힘들고 괴로웠다. '데드풀'은 원작 코믹스부터 레퍼런스가 워낙 많다. 연예계, 문화계, 정계 등 전 분야를 유머의 재료로 삼고 있다. 코믹스에도 주석이 3~4줄씩 달려 있을 정도니. 그걸 영화에 표현하려면 공중에 말풍선이 떴다 사라지는 설정이라 해도 관객에게 잘 전달하는 게 관건이었다.

Q. 미국식 유머를 과감하게 번역한 게 인상적이었다.

A. '데드풀'은 미국 개그 범벅인 영화라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관객들이 미국 문화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다. 쌍욕도 나오고 은어도 많이 나오는데 관객으로서는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번역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무엇보다 영화사에서 번역가의 재량을 존중해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Q. 마블 히어로 영화는 덕후와 입문자 모두를 아울러야 한다는 태생적 부담이 있으니, 번역가로서의 고충이 컸을 것 같다.

A. 양쪽을 다 아우르는 게 좋긴 하지만, 그 욕심 때문에 무리한 번역을 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옛날 스타일의 번역이라면 미국의 유명 부자를 우리나라 관객이 이해하기 쉽게 '정주영'으로 바꿨다. 요즘은 그렇게 하면 욕먹는다. 관객들의 미국 문화의 이해도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굳이 다 한국어로 무리해서 바꾸는 건 관객들로 하여금 "너, 나 무시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웃겨야 하는 포인트에서는 우리나라 관객이 보다 이해하기 쉽게끔 표현하려고 했다.

데드풀

Q. 오프닝 크레딧부터 '이 영화, 뭐지?' 싶은 막말 자막이 인상적이다.

A. 뉘앙스는 비슷하되 한국 관객들이 좀 더 직관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단어를 썼다. 제작비 지원 '호구들'의 경우 원문은 '멍청이들'(ASSHATS)이다. 그들이 주려는 뉘앙스는 덜떨어진 놈들 정도일 텐데 '호구들'이라는 단어가 괜찮을 것 같았다. 각본팀의 경우 원래 '언페이모스 라이터'(UNFAMOUS WRITERS)였다. 그래서 '듣보잡 작가들'로 번역했는데 표기가 '더 리얼 히어로즈'(THE REAL HEROES HERE)로 바뀌어서 최종적으론 못 썼다.

Q. 번역 단계면 개봉 임박 시점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시기에도 대본이 수정되는 경우가 있나?

A. 그렇다. 편집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으니 대사가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데드풀'은 특히나 그랬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신마다 애드리브를 엄청 많이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제작사도 어떤 대사를 넣을 것인가 끝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데드풀이 마스크를 쓰고 말을 하다 보니 제작진으로서도 대사를 바꾸는 게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름 애정을 가지고 썼던 단어나 표현이 있었는데 편집이 바뀌면서 빼야 했던 것들이 있었다. '듣보잡 작가'도 그중 하나였다.

Q. 수많은 영화를 번역했지만, 히어로 무비는 처음이다.

A. 마블 마니아나 덕후라고 하긴 그렇지만, 히어로 무비를 다 챙겨보고 피규어도 모은다. 당연히 데드풀이라는 캐릭터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영화로 나온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 게다가 트레일러를 봤는데 너무 재밌는 거다. 동시에 '와, 이거 누가 작업할지 개고생하겠네?"싶었다. 그런데 내..가 맡을 줄이야!

Q. 폭스의 영화들은 그동안 다른 번역가가 작업을 해왔다. '데드풀'이란 작품을 맡긴 이유가 뭐라고 보나?

A. 사실 잘 모르겠다. 내 포트폴리오에서 개드립류의 영화는 '웜바디스'(2013)가 시초다. 이후 '레드2'나 '아메리칸 셰프' 같은 영화도 했지만 코믹물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관객들의 번역 후기 중에 "'데드풀'의 반전은 '캐롤' 번역가가 번역한 것"이라는 반응도 있더라.(웃음)

데드풀 번역가 황석희

Q. 자신을 '번역계의 안테나 뮤직'이라고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A. 내가 작업해 온 영화들이 대체로 다양성 영화가 많고, 소소한 감동을 주는 드라마가 많아서다. 물론 나도 SM이나 YG에 비유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은 계속 있었다.

Q. 마음에 드는 영화의 경우, 수입사나 직배사에 직접 연락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A. 트레일러를 보고 반한 작품이나, 해외 평가가 기가 막히게 좋은 작품의 경우 '내가 갖고(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해당 작품을 국내 영화사에서 수입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연락을 취한다. 직접 전화해서 떼쓰는 번역가는 아마 나뿐이지 않을까 싶다.(웃음)

Q. 번역가가 직접 영업(?)을 뛴다는 건 의외다.

A.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영화번역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분들이 10여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번역가가 고정 수입을 유지하려면 한 달에 2~3편 이상의 영화를 작업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지속해서 일을 하는 번역가는 5~6명 내외다. 그만큼 신인들의 진입 장벽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나의 경우 케이블 드라마 작업을 6년 이상 했지만, 영화 번역을 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루키 입장에선 필모그래피를 스스로 쌓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Q. 그 메일엔 어떤 내용을 쓰는지 궁금하다. 

A. "혹시 전속 번역가가 없으면 저를 한 번 써보시겠어요?"라고 이력서와 함께 보낸다. 케이블 경력 5년 차가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다. 아마 국내 영화수입사에서 내 연락을 안 받아본 데는 없을 것이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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