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수)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 나홍진 감독의 클래식…끝을 몰라 더 궁금한 세계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5.12 10:07 조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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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감독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나홍진 감독의 '곡성'(감독 나홍진, 제작 사이드 미러,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은 인고의 영화다. 데뷔작 '추격자'(2008)와 두 번째 작품 '황해'(2010)의 간격이 고작 2년이었던 데에 반해 세 번째 영화인 '곡성'은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을 쏟았다.

시나리오는 생각보다는 수정이 적은 7고선에서 마무리됐지만, 그건 영화의 시작부터가 신중했기 때문이었다. 촬영은 6개월에 걸쳐 진행됐고, 편집은 1년 가까운 장고의 시간이 소요됐다. 이 과정에서 주요 장면의 삭제와 엔딩의 미묘한 변화 등 중요한 결단이 수반되기도 했다.

배우들은 하나같이 감독의 집요한 연출 스타일에 혀를 내두르지만, 그 철저함은 배우나 스태프에게만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홍진 감독은 촬영 중 피로누적으로 일주일간 입원했고, 병원에서 촬영장으로 출·퇴근하면서 영화를 완성했다.

'곡성'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믿음과 의심에 관한 집요한 드라마를 만들고자 했던 감독은 악의 태동과 번성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자칫 관념에 머물 수 있는 주제를 생생한 영상으로 이미지화했고, 스릴러와 오컬트의 결합을 통해 장르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았다.

한동안 한국 영화는 뻔하고 나태해서 활력조차 느낄 수 없다고 말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낯설지만 반가운 손님으로 여겨질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홍진의 영화와 나홍진은 닮았다. 지레 겁먹고 섣불리 다가가기 힘든 감도 있지만, 뜻밖의 긴장과 재미를 선사한다. 남다른 재능, 독특한 아우라의 감독과 만나 나눈 이날의 대화도 그랬다.  

곡성

◆ '황해'의 순·반작용으로 탄생한 '곡성'

'곡성'은 전작 '황해'의 순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탄생한 영화다. 나홍진 감독은 "'황해'가 끝나고 '이제 나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컸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런 고민은 창작자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나의 경우 '추격자' 이후와 '황해' 이후의 고민이 달랐다. 주변에서는 "너도 좀 밝고 명확한 이야기를 해봐라"하는 조언이 많았다. '황해'를 11개월 동안 촬영했지만, 후반 작업은 한 달밖에 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컸다. 개봉하고 끝날 때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 이후 약 3년 정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 '곡성'을 구상하고 시나리오에 집중하면서 화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또다시 어둠으로 무장한 스릴러를 선택한 건 '황해'에 대한 아쉬움과 자신감이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나홍진 감독은 "장르 영화가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황해'를 하고 나서 내 스타일을 좀 더 과감하게 드러내도 되겠다 싶었다. 실제 사건에서 어떤 영향을 받지 않는 오로지 순수한 창작으로 말이다"라고 말했다.

나홍진 감독은 '곡성'에 대해 처음으로 피해자 관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한 영화라고 했다. 그의 주장과 달리 앞선 두 작품이 가해자 중심의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폭력적인 묘사가 많기는 하지만, 무기력하게 당하는 인간의 연약함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곡성'은 우연처럼 끔찍하게 다가온 불행에는 어떤 논리적 인과관계도 없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과 토속신앙, 기독교 등 각종 신앙에 의지하려는 연약한 인간의 대비를 통해서 말이다.       

곡성

◆ 나홍진X홍경표, '곡성'에 드러난 폭발적 시너지  

나홍진은 이번 영화에서 처음으로 홍경표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홍경표 감독은 'M', '마더', '설국열차' 등으로 충무로의 촬영 장인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어느 날 김윤석 선배가 전화가 와서 "야, 너 이번 영화 무조건 홍경표 감독이랑 해"라고 하시더라. 나는 김윤석 선배를 스승처럼 생각하고 그 분의 조언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주 확신에 찬 말투로 "같이 해보면 내가 왜 하라고 하는지 알 거야"라고 하시더라"

독한 사람과 더 독한 사람의 만남이었다. 나홍진 감독은 홍경표 감독에 대해 "혼을 담아 촬영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작업 스타일은 나홍진 감독이 촬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는 지금까지 감독이 촬영에 어떤 관여를 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앵글의 각도, 화면의 사이즈 등 촬영의 요소에 대해 관여를 많이 했다. 내가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영화는 샷과 샷의 연속이며, 샷과 샷이 연결될 때 생기는 힘은 어떤 이미지보다 큰 작용을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경표 감독과 작업하면서 그럴 수 없는 촬영 감독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딴 건 다 필요 없다. 한 컷이면 충분하구나'라는 걸 느낄 때가 많았다. 한마디로 그분은 촬영 감독이 왜 위대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해줬다"

곡성

마치 이야기의 챕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곡성의 원경과 부감 샷에 대해서도 홍경표 촬영 감독의 공으로 돌렸다. 남다른 장인적 면모에 대해선 깊은 존경심을 드러냈다. 

"모든 스태프가 자고 있을 새벽 3~4시경 산에 올라가 매직 아워의 풍경을 다 찍어왔더라. 아침에 그걸 보면서 깜짝 놀라 "아니 이걸 언제 다 찍어왔대?"라고 하면 아무렇지 않은 듯 "으...이 영화는 산이야"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나홍진 감독은 홍경표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촬영에 있어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황해'때는 어느 것 하나 의도대로 되는 게 없었다. 그때까지 어떤 강박감이 있었냐면 어떤 경우에도 콘티대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끝내고 복기해 보니 '내가 유연성이 없었구나'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곡성' 때는 콘티를 보지 않았다. 현장에 가면 홍경표 감독이랑 대화를 나누고 그날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작업을 해나갔다. 좋은 시너지가 났다. 결과적으로 기대했던 것 이상의 뭔가가 담겼다. 촬영을 할 때도 놀랐지만 후반 작업을 하면서 "내가 정말 세계적인 대가와 작업을 했구나" 거듭 느꼈다"

나홍진감독

◆ 완벽주의·집요함으로 점철된 나홍진의 스타일

나홍진 감독의 집요함은 제작진과 배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데뷔작부터 현장에서의 갖은 루머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번에 함께 호흡을 맞춘 곽도원, 천우희, 쿠니무라 준 역시 나홍진 감독의 지독함에 대해 한목소리를 냈다. 

배우들의 성토에 대해 "내 시나리오가 배우가 피로도를 느낄 만한 어려운 신이 많은 건 사실이다. 영화가 좀 다크하지 않나"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도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매일 매일 작업을 쌓아가야 하는 영화 현장의 예민함에 관해 설명을 덧붙였다.

"배우도 인간이기에 그날마다 컨디션이 다르다. 배우든 제작진이든 현장에 나올 때 최상의 준비를 하고 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촬영 현장에서 때때로 예측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바로 컨디션이다. 그것이 그날의 현장을 좌우한다. 나의 경우 촬영일에 컨디션이 안 좋으면 촬영 감독님에게 가서 "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요. 제 말 믿지 말고 감독님이 잘 챙기셔야 해요"라고 한다. 배우에게도 마찬가지로 말을 한다. 감독이나 스태프는 본인이 컨디션이 안 좋아도 누군가 채워줄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배우의 경우는 답이 없다. 컨디션이 좋다면 한두 컷에 끝날 촬영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수십 테이크를 가도 오케이 컷이 안 나오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향한 평가에 대해 그는 "내 직업이 영화감독이니 배우와 제작진의 성토도 회피할 순 없다. 프레임을 구성하는 요소는 너무 많고 나는 그것을 잘 조율해야 한다. 내가 특별히 완벽주의자라거나 꼼꼼하다는 생각은 안 한다.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감독이 홀로 촬영장을 장악하고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제왕적 스타일의 연출 방식은 현재의 충무로 시스템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나홍진 감독은 확고한 연출관 아래 자신이 의도한 영화를 제대로 만들고자 한다. 최선의 결과를 위한 최악의 과정에 대한 평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곡성'의 현장 역시 녹록지 않았다. 제작비는 예상치를 초과했고, 후반 작업은 촬영보다 더 긴 세월이 소요됐다. 나홍진 감독에게 전권을 부여하다시피 한 폭스 인터내셔널 역시 진땀을 흘렸다. 결국,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는 후문이다.  

"불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장에 와서 보고 가더니 "(나)홍진이가 하면 오케이야"했다더라"

나홍진감독

◆ 미술→광고→영화…다매체 경험이 남긴 자산

나홍진 감독은 대학에서 공예를 전공했다. 미술학도에서 영화감독으로 진로를 바꾼 그의 선택과 이유가 궁금했다.

"학창시절에 선생님들이 "얜 그림 시켜야 해요"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특별히 그림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다.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다. 디자인과는 갈 성적이 안 돼서 공예과를 갔다. 생각해 보면 텍스터의 질감을 경험하고 느낀 게 영화라는 작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면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나홍진 감독은 만화 작업실에 들어갔다. 만화가를 꿈꾸다 영화감독으로 진로를 틀게 된 계기가 된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어떤 날이었다. 머릿속에 영상이 돌아가는데 정지된 프레임만 그리고 있다는 게 억울하더라. 그래서 같이 작업하는 친구들에게 "나 그만할래"라고 말하고 나가서 마냥 걸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그래서 영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변에 광고하는 선배들을 수소문해 광고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환장하겠더라. 너무 좋아서. 잠을 잘 생각도 집에 갈 생각도 안 하고 신나서 밤을 새워서 일을 하곤 했다" 

그러나 15초의 예술은 나홍진 감독의 창작력과 욕망을 오롯이 펼치기엔 너무 짧았다. 나홍진 감독은 "그 바닥에서 조감독이 될 즈음 회의가 많이 들었다. 광고주들과 회의를 하다 보면 감독의 창작력보다는 광고주의 기호에 맞춰서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게 억울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답답할 것 같더라. 그 당시 영화판은 밥벌이하기도 쉽지 않다며 말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전 영화 할래요'하고 뛰쳐나왔다"고 했다.

또다시 원점에서 시작했다.

"주변에 영화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사를 찾아가면 되는 줄 알고 남의 시나리오를 읽고 내 시나리오를 죽어라 썼다. 그 생활을 몇 년간 했는데 스스로 아무리 공부해도 절대 모르는 것들이 있더라. 그래서 한예종 영상원 시험을 쳤다. 왜 왔냐고 하길래 '저 정말 혼자서는 몰라서 그러는데, 선생님들 공부하게 도와주세요"라고 간절하게 말했는데 합격시켜 주더라"

미술에서 광고, 영화까지 이미지를 다루는 각 분야를 모두 거친 나홍진 감독의 여정은 지난했지만 유의미한 것이었다. 예술의 다양한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자기화를 시켜나간 예비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날 나홍진만의 집요한 스타일이 완성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되게 좋아했다. 시간만 나면 무조건 종로로 나왔다. 멀티플렉스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 한 편이라도 더 보려고 종로 바닥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루에 많이 보면 4편이었다. 그렇게 영화를 좋아해도 영화감독이 되라라는 생각은 못했다. 엄두가 안 나서..."

나홍진감독

◆ 나홍진의 클래식…그가 지향하는 고전미

'추격자'가 개봉했던 2008년을 똑똑히 기억한다. 신인감독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고, 당시로써는 유명하지 않은 두 남자 배우가 나오는 스릴러 영화였다. 그러나 시사회 후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두 번째 영화 '황해' 역시 나홍진의 전진을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상업영화에서 나올 수 있는 스토리 구조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말에 남긴 커다란 물음표는 관객들의 지적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나홍진 감독은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감독이다. 대중문화의 미학이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데 있다면 나홍진 감독의 영화는 곱씹는 맛이 놀랍다.

"광고를 할 때 속상했던 것 중 하나는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존재할 것은 존재하더라. 영화를 만들어 내고, 만든 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존재하는 게 매력적이었다. 내 영화도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 때 트렌드를 쫓지 않고 클래식 하게 찍으려고 한다" 

나홍진 감독은 "어떤 사람들은 '추격자'나 '황해'를 패셔너블 하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나는 고전적인 스타일로 찍으려고 했다. '곡성'도 마찬가지다. 블로킹도 최대한 자제하고 컷과 컷을 쭉 붙여 힘 있게 나아가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추격자' 이후 충무로엔 아류작이 넘쳐났다. 하나의 이정표가 된 셈이다. 나홍진은 이 말에 겸연쩍어 하며 웃어보였다.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나서부터는 누군가에게 해부당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곡성'도 마찬가지로 해부를 당할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는 감독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전작과는 다른 영화를 선보이는 것이다"

매 작품을 구상할 때 새로움에 대한 욕망이 선행하느냐고 묻자 "일단 내가 뭐에 훅이 꽂히냐가 가장 중요하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새롭게 만들까를 생각한다. 이게 창작자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나홍진은 '곡성'을 향한 대중의 관심과 애정에 고마움을 표했다. 더불어 "사실 이런 반응 때문에 영화를 하는 거다. 호평이든 혹평이든 나에겐 큰 배움이 된다"고 말했다.

나홍진 감독은  '곡성'이 남긴 무수한 물음표 역시 관객이 채워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어떻게 해석해도 말이되는,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건 그의 진심이었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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