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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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가씨', 박찬욱이 그린 욕망과 사랑과 죄의식의 3중주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5.27 15:21 조회 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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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 이 글은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아가씨'의 영어 제목은 '하녀'(The handmaiden), 불어 제목은 '아가씨'(Madmoiselle)이다.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fingersmith)가 소매치기인 하녀를 지칭하는 데 반해 박찬욱 감독은 한국어와 영어, 불어 제목에서 하녀와 아가씨를 두루 아우른다. 

하녀와 아가씨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하녀에 관한 영화이면서, 아가씨의 영화이고 동시에 하녀와 아가씨에 관한 영화다.

총 3개의 챕터로 구성된 영화는 1부에서는 하녀 숙희(김태리)의 1인칭 시점, 2부에서는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3부에서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마무리했다. 챕터별로 화자를 달리하는 다중 시점은 극의 호기심을 증폭시키고, 빈번하게 쓰이는 시점샷은 이야기와 인물의 가이드 역할을 제대로 한다. 

박찬욱의 영화 세계에서 '금기'는 매우 중요한 화두다. 그간의 작품에서 죄와 구원, 욕망의 삼중주를 통해 인간과 삶의 딜레마를 이야기해 왔다. 

'아가씨'에서는 여성들의 사랑을 그린다. 궁극적으로 멜로 드라마인 이 작품은 스릴러적 긴장감과 범죄물의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근래 선보인 박찬욱의 작품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짜릿하다.

아가씨

◆ 속여야 사는 사람들…사랑과 죄의식 사이

'아가씨'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와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 그리고 백작에게 거래를 제안받은 하녀와 아가씨의 후견인까지,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의 중심은 아가씨와 하녀다. 부에 대한 욕망, 자유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서로에게 빠져들며 죄의식을 동반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간다.

두 사람의 사기극은 처음엔 욕망이 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이 죄가 죄면서 계획이 궤도를 이탈한다.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를 두고 "죄의식과 사랑이 서로를 반영하고 증식하는 영화"라고 표현한 것도 그 이유다. 

영화는 1~3부에 이르는 과정이 가면을 벗듯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1부와 2부에 이르는 전개는 이야기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박찬욱 감독 원작이 가진 반전의 묘미를 취사선택했고, 반전 카드를 뺀 틈은 박찬욱만의 서사로 채워넣어 극의 새로운 공기를 만들어 냈다.

원작자인 사라 워터스가 박찬욱 감독에게 'Base on'(~에 기반을 둔)이라는 표기 대신 'inspired by'(영감을 받은)라고 영화에 표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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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 일제 강점기로의 치환

원작 '핑거스미스'에서 시대적 배경은 중요하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로 꼽히지만 사회와 종교와 가치관에 있어 과도기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은 이야기의 배경을 일제 강점기로 치환했다. 빅토리아 시대와 일제 강점기 모두 과도기적 불안이 사회 전반에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시대적 억압과 상황적 억압으로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없었던 시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아가씨'는 일제 치하의 분위기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오프닝과 후반부 일본군 무리가 주인공을 스치듯 지나갈 뿐이다. 박찬욱 감독은 여타 일제 강점기 영화와 달리 대의적 사명이 아닌 개인의 욕망에 집중한다.

영화가 시대에서 가져온 건 계급이다. 조선은 이 땅에 신분 제도가 존재했던 최후의 시대였다. 귀족과 평민, 아가씨와 하녀라는 신분의 대비는 두 여성의 관계가 성의 금기를 넘어 계급의 금기를 선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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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도적 미쟝센…천국이자 지옥인 서재 

박찬욱 감독의 연출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미쟝센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동양의 인물화와 서양의 풍경화가 접목된 듯한 정성스러운 비주얼로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공간은 단순한 극의 배경이 아닌 어떤 세계의 창조, 시대의 공기를 담는 거대한 그릇 역할을 한다. 

감독이 '제5의 주인공'이라고 꼽은 코우즈키(조진웅)의 대저택은 등장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양 도서관의 모습과 일본 다다미방 양식이 혼재한 거대한 서재, 유럽 귀족의 생활 양식이 살아있는 아가씨의 방과 응접실, 한국 전통 가옥의 모습을 하녀들의 공간까지 하나의 저택에서 한국식과 일본식, 영국식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이 집은 일본과 서양 세계를 동경하는 코우즈키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내재한 성적 욕망까지 투영한 공간이다.

특히 서재의 상징성이 흥미롭다. 코우즈키는 이곳에서 낭독회를 연다. 무대에는 히데코가 오르고 객석에는 수트를 차려입은 신사들이 앉아 있다. 연기하듯 책을 읽는 여성과 그것에 빠져드는 남성들의 모습은 지식과 품격이 넘치는 독서 모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한 공기가 흐른다.

서재는 신사들의 성적 판타지가 펼쳐지는 천국이지만, 히데코에게는 원치 않는 정신적 노동을 해야 하는 지옥이다. 여성 억압의 공간으로서 서재가 가지는 그로테스크함은 아나모픽 렌즈를 활용한 촬영을 통해 극대화된다.

2부에서 상당 시간을 할애하는 낭독회 장면은 완벽하게 설계된 미쟝센과 배우들의 열연이 어우러져 기묘한 공포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정정훈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송종희 분장감독, 조영욱 음악감독 등 충무로 장인들이 완성해낸 시·청각의 절묘한 조합이다. 

여기에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조진웅의 인물을 짚어삼킨 듯한 캐릭터 연기가 영화를 꽉 채우고 있다. 더불어 마치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듯한 김해숙과 문소리의 연기 역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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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일 게이즈?…女-女 섹스신을 바라보는 시선

제69회 칸국제영화제를 통해 첫 공개된 '아가씨'를 향한 비판 중 하나는 남성적 시각(Male gaze)으로 그린 여성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여성과 여성의 성관계 묘사가 남자들이 상상하는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보는 이에 따라 다소 전위적이고 길다고 느껴질 수 있는 정사 장면이다.

그러나 '아가씨'의 섹스신에서 눈여겨볼 것은 수위나 행위가 아니다. 두 여성의 섹스에서는 남녀 성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권력이 읽히지 않는다. 게다가 히데코와 숙희는 명백한 상하관계임에도 첫 섹스에서 주도하는 쪽은 하녀 숙희다. 이후 두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관계를 즐긴다. 

동성 간 섹스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이 낯설 수밖에 없지만, 이 장면이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이들이 행위보다는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성적 밀도나 긴장감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상호 교감형 섹스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래서 '아가씨'의 섹스신은 전시적이라기보다는 전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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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이 그린 여성의 사랑…교감과 연대

소설 '핑거 스미스'의 이야기적 매력은 끝없이 이어지는 반전의 쾌감에 있다.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에서 원작의 결정적 반전 하나를 버렸다. 그 자리에 더욱 풍성하게 채워넣은 것은 두 여성의 정신적 교감 그리고 자유를 향한 연대다.

흔히 여성의 사랑은 여성이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남성이 그린 여성의 사랑은 세밀하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여성성은 그의 남다른 예술성 안에 포함된 아주 큰 비중의 역량처럼 느껴진다. 한층 섬세해진 시선으로 여성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이해하고자 했던 시도와 결과물이 반갑게 느껴지는 건 그 이유에서다. 

박찬욱은 여성 중심의 드라마를 만들면서 남성 캐릭터를 가차 없이 조소한다. 특유의 블랙 코미디는 이때 빛난다.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 찬 코우즈키(조진웅)와 기회주의적이고 야비한 백작(하정우)의 말로에서는 박찬욱식 복수의 찬 맛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히데코와 숙희가 마침내 자아 찾기에 성공했다는 의미도 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 드라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이 내린 들판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질주하는 두 여성의 모습, 둘만의 공간에서 진정한 초야를 즐길 때 보여주는 환희에 찬 표정, 이들의 성장과 행복을 자애롭게 바라보는 듯한 만월의 풍요로움은 영화가 끝나도 뇌리에 남는다. 

이렇게 박찬욱의 멜로 드라마가 완성됐다. 상영시간 144분, 청소년 관람불가, 6월 1일 개봉.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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