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영화 스크린 현장

[김지혜의 논픽션] '용서받지 못한 자'가 바꾼 하정우의 운명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5.29 10:46 조회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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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먼 훗날, 배우 하정우의 회고전이 열린다고 가정해 보자. 각자의 마음속 영화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 '두 번째 사랑', '추격자', '비스티 보이즈', '멋진 하루', '국가대표', '황해', '러브 픽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암살', '아가씨'에 이르는 다채로운 작품 중에서 말이다. 

이 리스트는 2016년 5월 현재까지의 필모그래피다. 연평균 2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고, 매년 최고작을 경신하는 하정우이기에 이 목록은 10년이 지나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영화 1편은 있다. 바로 배우 하정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용서받지 못한 자'(감독 윤종빈)다.

2005년 세상에 나온 이 영화는 윤종빈 감독의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졸업작품. 군대로 대변된 계급 사회를 통해 우리 사회의 집단적 폭력과 모순을 그린 수작이다. 애초 30분짜리 중편으로 기획된 영화는 장편으로 완성돼 부산국제영화제와 칸국제영화제 초청을 받으며 그해 한국 영화의 수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에서 말년 병장 '태정'으로 분한 하정우는 놀랍도록 사실적이고 세밀한 연기를 보여줬다. 하정우 역시 이 작품을 배우적 욕망을 해소해 준 첫 번째 영화로 꼽는다.

용서

이 영화의 캐스팅은 싸이월드가 매개였다. 윤종빈 감독은 싸이월드를 통해 연극과 선배인 하정우에게 출연을 제안하는 쪽지를 보냈다.

윤종빈 감독과 하정우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 1년을 쏟았다. 학교 강의실에 앉아서 수없이 대화를 나누고 시나리오를 다듬었다. 하정우는 그 시기의 치열함과 열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학교를 졸업했을 때였고, 방송사 공채 시험도 떨어져 백수나 다름없었어요. 윤종빈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작품을 만들어 가는 그 과정이 너무나 행복했죠. 2005년 10월에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을 받아 4개 부문 중 3개 부문을 수상했어요. 그때 부산을 찾았던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이 영화를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해 줬고요"

한 편의 영화는 한 배우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이 영화의 파급효과가 어디까지였느냐면요. 김기덕 감독, 심재명 명필름 대표, 김진아 감독, 나홍진 감독님이 그 작품을 인상적으로 봤어요. 그래서 제가 '시간'과 '구미호 가족'과 '두 번째 사랑'과 '추격자'를 할 수 있었던 거죠"

그 무엇도 불확실했을 시기였다. 윤종빈도 지금의 윤종빈이 아니었고, 하정우도 지금의 하정우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영화를 향한 열정만으로 두 사람은 1년을 의기투합했다. 하정우의 남다른 촉은 그때도 가동됐던 것일까.

"대학교 졸업 작품이 잘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다만 영화를 찍으면서 뭔가 나올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은 들었어요. 장난 삼아 윤종빈 감독과 전 "우린 이 영화로 세상을 놀라게 할 거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때 '용서받지 못한 자'의 조감독을 했던 손상범 대표(現 영화사 월광 본부장)가 "이 형들은 영화를 찍으면서 꿈을 꾸고 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정말 실현이 된 거죠"

대학생의 졸업작품이 정식으로 개봉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눈여겨본 최용배 대표(당시 청어람 대표)의 지원 아래 2005년 11월 18일 전국 20개 관에 개봉하는 기쁨까지 누릴 수 있었다. 

하정우

하정우는 배우의 DNA를 타고났다. 더불어 DNA를 진화시켜 준 조력자들도 만났다. 준비된 배우가 절호의 기회와 시의적절한 때를 만났기에 대중들은 하정우라는 배우와 지금까지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어릴 때부터 당연히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인지 능력이 생겼을 때부터 우리 집에 놀러오던 아저씨, 아줌마가 다 TV에 나오는 분들이었거든요. 그땐 휴대전화나 삐삐도 없을 때라 아버지를 찾는 감독님이나 배우들의 연락이 집전화로 왔었어요. "내일 촬영 스케줄이 어떻게 된다고요?" 이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들려오고...나도 배우가 되겠구나 싶었어요. 물론 그게 구체화된 지점들은 있었던 거 같아요"

배우로서의 꿈과 목표를 분명하게 해준 인생 영화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좋은 친구들' 그리고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였다.

"초등학교 때였나. 동네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모던 타임즈'를 보는데 '아, 저 흑백 영화 속 배우처럼 돼야겠구나' 했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좋은 친구들'을 봤죠. '저 배우 참 느낌 있다' 싶었는데 그게 로버트 드니로였어요. 또, 대학교 1학년 때였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를 보면서 '나도 저런 연기를 해야지. 마침 얼굴도 길고 나랑 비슷하네' 했었어요"

모던 타임즈

영화로 배우의 꿈을 키웠지만, 연기에 눈을 뜨게 한 건 연극이었다.

"대학교 들어가면 바로 데뷔할 줄 알았어요. 영화과에 연기 전공이 있었다면 거길 갔을 텐데 연극과 연기 전공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게 제게 약이 됐어요. 무대 연기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하다 보니 어설픔의 연속이었죠. 그때부터 2003년까지 주구장창 연극을 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부딪히고 깨지면서 연기의 기본기를 다져나갔어요"

윤종빈 감독과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나게 된 것도 연극에서 총기를 발했기에 가능했다.

"대학로에서 '유리 동물원'(테네시 윌리엄스 作)이라는 연극을 한 적 있어요. 그 작품을 윤 감독이 봤다고 하더라고요. 제 연기에 큰 인상을 받아 '오델로'(윌리엄 셰익스피어 作)와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조지 코프먼 作)를 연이어 보러 왔대요. 그리고는 '저 연극과 선배랑 영화를 하리라 생각했다' 하더라고요"

배우 하정우의 첫 도약이었으며, 감독 윤종빈의 시작이었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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