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영화 핫 리뷰

[리뷰] '부산행', 한국형 좀비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7.14 17:43 조회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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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연상호 감독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조명한 대한민국 사회는 '동정 없는 세상'이었다. 장편 데뷔작 '돼지의 왕'(2011)은 학교 폭력을 통한 인간의 폭력성을, 두 번째 영화 '사이비'(2013)는 인간관계 속에 그려지는 선과 악의 경계를 도발적으로 그려내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전투구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서 돈 없고 힘없는 인간은 상처받고 희생당하기 일쑤였다. 그가 만든 영화 속 세계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거울이기도 해다.

영화 관계자와 팬들은 연상호 감독의 실사(實寫) 영화를 기다려왔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실사 영화를 만든 경우는 있었지만,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연상호에게 그 기대감이 쏠린 것은 비주얼만큼이나 스토리텔링, 무엇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렬하고도 얼얼한 방식 때문이었다.

첫 실사 영화 '부산행'(감독 연상호, 제작 레드피터)은 연상호 감독이 일찌감치 완성한 애니메이션 '서울역'에서 파생된 이야기다. '서울역'이 불가사의한 바이러스의 태동을 그린 영화라면, '부산행'은 바이러스의 창궐과 생존을 향한 인간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부산행'은 시속 300km로 질주하는 KTX와 속도를 맞춘 듯 빠르고 역동적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스릴은 달리는 기차 안이라는 좁은 공간, 생명을 담보로 한 인간과 좀비의 대결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희로애락은 드라마의 핵심 기능을 하며 보는 이의 감정선을 건드린다.

연상호의 영화를 몰랐던 관객에게는 흥미로운 세계관으로 완성된 블록버스터를 만끽하는 즐거움을, 연상호의 영화를 사랑한 관객에겐 그의 새로운 영화적 비전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부산행

◆ 의문의 바이러스, '폭동'이라고 정의하는 정부

대한민국에 의문의 바이러스가 퍼진다. 일에 빠져 딸에게 무심했던 펀드 매니저 '석우'(공유)는 '수안'(김수안)의 생일을 맞아 별거 중인 아내가 있는 부산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부산행 KTX에 오르고 이상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뒤따라 탑승한다. 일순간 열차안은 좀비들의 습격으로 아비규환의 상황에 빠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운다.

KTX에 탑승한 승객은 아이, 임산부, 노숙자, 노인 등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다. 천리마 고속의 상무인 '용석'(김의성)이 절대악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대부분 중산층으로 대표되는 서민들이다.

'부산행'은 우리 사회의 은유로서 무책임한 국가와 혼돈에 빠진 국민을 대비시킨다. 의문의 바이러스가 국민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마련하지 못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진짜 재난은 좀비들이 인간을 위협하는 것보다는 국가적 위기 사태에 대해 그 어떤 보호막도 쳐주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함이다.되레 아비규환의 상황을 '폭동'이라고 단정 지으며 보는 이의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나를 지켜줄 울타리도, 믿을 만한 정보도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열차 안 사람들은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살고자 하는 이기심을 드러낸다. 이들이 본성이 악하다고 볼 수도 없다. 환경이나 시스템이 울타리를 쳐주지 못할 때 빚어질 수 있는 참극일 뿐이다.

연상호 감독은 "세상의 종말이란 주제를 다루며 성장 중심의 현재 사회에서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개미들의 피를 빨아 이윤을 챙기는 펀드 매니저 석우의 행동과 결과 그리고 변화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전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희망으로 우리가 가장 약자라고 생각했던 수안과 성경을 제시한다.

부산행

◆ 시각과 청각·모션으로 완성된 '공포의 좀비'

'부산행'을 보기 전 드는 생각은 "과연 우리나라에서 좀비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일 것이다. 숙련된 CG의 힘을 빌려야만 창조 가능할 것 같은 살아있는 시체를 우리의 기술로 구현 가능하냐는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부산행'은 한국형 좀비 영화의 이정표를 세웠다.

서울과 천안, 대전, 대구 등 전국 각지에 창궐한 좀비는 영화의 시각적 충격을 책임지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에만 기대지 않고 실제 배우들을 좀비로 분장시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화는 바이러스의 숙주(심은경)와 기차 안 첫 감염자(우도임)을 통해 좀비의 등장을 알린다. 두 사람은 좀비의 특성과 공포를 극대화하는 동작 연기로 향후 맞이하게 될 재앙의 서막을 연다.    

좀비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보는 이의 공포를 배가시킨다. 영화 '곡성'에서 '박춘배'의 동작을 만들어 낸 박재인 안무가의 손길로 완성됐다. 액션 시퀀스에 따라 180도로 팔,다리가 꺾이고, 어깨가 기울어지며, 몸을 뒤집는 다채로운 모션은 날카롭고도 묵직한 음향과 결합해 엄청난 공포감을 선사한다.

주인공들이 좀비를 무찌르며 가족이 있는 앞칸으로 전진하는 과정을 어떤 액션으로 짜느냐는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좀비의 특성, 이를테면 빛에 약하다거나 소리에 예민한 것으로 설정해 공격의 적기와 동선을 짠 것도 흥미롭다.

부산행

◆ 연상호의 변화된 세계관, '희망'을 이야기하다

'부산행'은 새로운 연상호를 만날 수 있는 영화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냉소적인 시각을 견지하며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게끔 했다면 실사에서는 처음으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석우의 깨달음과 변화, 상화의 분노와 헌신, 수안의 순수와 선의를 통해 말이다.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상화' 역의 마동석이다. 육중한 몸과 다부진 주먹으로 좀비들을 내동댕이치며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린다. 존재 자체만으로 든든함을 선사하는 마동석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위트를 발휘하며 보는 이의 박수를 부른다. 

그러나 '부산행'이 선사하는 감동은 한 명의 영웅이 활약하는 데서 오는 쾌감만은 아니다. '나와 너'만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같이 살자"는 공존과 연대의 마음을 드러내는 찰나의 순간이 주는 뭉클함이 있다.

연상호 감독과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신파는 '부산행'의 클라이맥스를 책임진다. 부성애, 부부애, 동지애의 부각은 시종일관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봐왔던 연상호 감독의 변화다. 애니메이션에서 봐왔던 그의 일관된 세계관을 생각하면 이런 감상주의적인 신들은 다소 의외일 수도 있다.

낯선 장르로 관객을 인도하면서 범대중적인 공감 코드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보는 이에 따라 '감정의 강요'로 받아들일 여지도 있지만, 감독이 의도한 감동의 드라마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부산행'은 올여름 영화 시장의 포문을 여는 블록버스터로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특히 시각적 쾌감과 가공할 만한 스피드 그리고 강약을 조절한 완급의 드라마는 대중 영화로서 수준급 이상의 재미를 보장한다.

무엇보다 개봉 후 많은 이들은 연상호라는 이름을 예의주시하게 될 것이다. 흥미로운 세계관과 원대한 비전을 가진 상업영화 감독의 탄생이다. 개봉 7월 20일, 상영시간 118분, 15세 이상 관람가.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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