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영화 핫 리뷰

[리뷰] '터널'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예의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8.05 10:52 조회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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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터널'(감독 김성훈, 제작 어나더썬데이·하이스토리·비에이 엔터테인먼트)은 올여름 영화 시장에 나온 가장 의미있는 작품이다. 맷집 좋고 속도 빠른 대작 사이에 당도한 이 영화가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할까라고 묻는다면 긴장과 유머 사이에 감동까지 더하는 소중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자동차 영업대리점의 과장 정수(하정우)는 큰 계약건을 앞두고 들뜬 기분으로 집으로 향한다. 자동차가 터널 안에 진입하는 순간, 터널이 무너져 내린다. 그가 가진 것은 78% 남은 배터리의 핸드폰과 생수 두 병 그리고 딸의 생일 케이크가 전부다.

터널 붕괴 소식에 대한민국은 들썩이고 정부는 사고 대책반을 꾸린다. 구조대장 대경(오달수)은 꽉 막혀버린 터널에 진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지만 구조는 진척이 없다.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은 남편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통해 남편에게 희망을 전한다. 지지부진한 구조 작업은 결국 인근 제2터널 완공에 큰 차질을 주게 되고 정수의 생존과 구조를 두고 여론이 분열되기 시작한다.

터널

'터널'의 줄거리를 들었을 때 대입될 현실의 재난이 있다. 2년 전 5천만 국민을 놀라게 하고 화나게 했으며 끝내 울게 만들었던 세월호 사건이다. '터널'은 세월호에 대한 영화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김성훈 감독은 "우리 영화를 보고 그 일을 떠올랐다면 그렇게 느끼게 된 현실이 슬픈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이 작품은 한국 사회에 대한 거대한 은유다.

재난은 터널의 붕괴에 머물지 않는다. 터널 밖 부조리가 이 영화의 진짜 재난이다. 터널에 갇힌 사람에게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라는 119, 배터리가 생명줄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특종을 낚는 방송국, 설계도를 무시한 부실 공사, 생존자의 구출보다 구조 기록에 연연하는 기자, 재난과 구조에 대한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하는 여자 장관 등 보는 이를 헛웃음 짓게 하는 부조리들이 넘쳐난다.

'터널'은 대한민국의 무능하고 안이한 시스템에 관한 풍자이자 독설이다. 재난물이라는 장르를 조련하는 데 있어 영화가 선택한 결정적 한 방은 검은 유머였다. 웃음을 통해 환멸과 냉소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터널 밖 부조리를 보여준다. 교조적 시각과 날선 비판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하지만 통렬하게 우리 사회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을 꼬집었다. 

'이정수의 삼시세끼 in 터널'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을 향한 정수의 의지와 놀라운 적응력을 보고 있노라면 저런 환경에서 이렇게 천연덕스러울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감독의 영화적 호기심이 돋보인다. 어떤 인간은 닥친 불행에 마냥 좌절하고 울기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낙관주의가 이야기를 관통한다. 생존의 불안함을 이겨낸다면 생활의 영역에 돌입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펼쳐낸 에피소드들이 극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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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메시지를 무겁지 않게 전달하는 가교는 바로 하정우다. 이 영화에 대해 가지게 될 일말의 선입견은 하정우라는 배우가 그간 보여준 신뢰로 1차적으로 걷힌다. 하정우를 보고 선택했다가 2차적으로는 영화가 선사하는 재미와 감동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연기적으로도 훌륭하다. 배우가 가진 특유의 유쾌한 이미지, 찰진 연기의 호흡은 캐릭터에 입체감을 더했다. 폐쇄된 공간, 단조로운 상황 속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며 풍성한 1인극을 완성해 냈다. 콘크리트 더미, 두 통의 물병, 잡음 섞인 라디오와 같은 무생물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파트너로 만들어 버린다. 적막한 터널이 답답하지 않은 것은 그만의 공기와 에너지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 배구공 윌슨이 있었다면 '터널'에도 어떤 존재가 있다. 하정우와 이것이 빚어내는 앙상블은 예상 밖 재미다.  

배두나의 호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기다리는 자의 애달픔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특히 민낯을 뚫고 나오는 안타까운 표정과 절제의 감정연기는 꾹꾹 눌러 표현해 오히려 감정의 동화를 일으킨다. 그간 배두나는 독특한 캐릭터 연기만 잘한다고 생각한 관객에게 이 영화는 그녀의 새로운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땅에 발을 디딘 배두나의 연기는 '터널'의 눈물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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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은 만든 이의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영화다. 김성훈 감독은 전작 '끝까지 간다'에서 클리셰를 탈피한 참신한 연출로 인정받았다. '터널'은 사려 깊은 태도로 살려내야 하는 사람, 살려내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응원을 전한다.

전작과 같은 빠르고 강렬한 액션 영화를 생각한 관객이라면 신작은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영화 시작 5분 만에 터널이 붕괴되고 안과 밖을 오가는 구조로 극과 극 온도를 전한다. 여기에 특유의 짧고 밝은 호흡, 아기자기한 상황극으로 재미있는 블랙코미디를 완성해 냈다. 

특히 정수의 터널안 고군분투기는 대부분 10여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촬영해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함을 전한다. 2,500컷이 넘는 컷으로 영화를 완성한 '끝까지 간다'와는 다른 선택이고 전략이었다.

또한 터널 내부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세상 밖 아내에겐 사치로 느껴지는 밥 한 공기, 인간과 동물이 몸을 포개 만들어 낸 온기의 풍경 등을 클로즈업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의 절박함을 투영해 냈다. 감정의 고조를 섣부른 신파 설정으로 강요하지 않은 것도 칭찬할 만하다. 여러 의미에서 '터널'은 인간 김성훈이 보이고 느껴지는 영화다.

영화 초반, 대경은 특종에 혈안이 된 기자에게 일침을 날린다. "방송이 중요합니까? 생명이 소중합니까? 그 간단한 질문도 대답 못 합니까?"라고.

영화는 우리가 응답하지 못했던 그날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선사한다. 결국, '터널'이 보여준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생명에 대한 존엄 바로 그 불변의 가치다. 개봉 8월 10일, 상영시간 126분, 12세 관람가.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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