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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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밀정', 의열단 그 거룩한 계보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8.29 09:35 조회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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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밀정'(감독 김지운, 제작 영화사 그림·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은 딜레마에 관한 영화다. 정확히는 뿌리(나라)와 환경(소속)과 명분(사명)의 딜레마 안에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김지운 감독이 1920년대 조선 그리고 의열단이라는 이야기의 보고를 열었다. 그간 어떤 금기처럼 여겨졌던 소재를 정중앙에 놓고 가장 뜨거웠던 시대와 인물들을 조명한다.

'밀정'은 '콜드 느와르'를 표방한다. 그러나 느와르 장르는 태생적으로 차가울 수가 없다. 게다가 스파이물 형식으로 풀어낸 독립군의 이야기는 의도하지 않아도 뜨겁게 타오르기 마련이다. 레퍼런스 삼은 영화는 스파이물 수작으로 꼽히는 '제3의 사나이'(1949)와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2)다. 

이정출(송강호)은 조선인이지만 뛰어난 언변과 정보수집, 정탐능력을 인정받아 출세를 거듭해 일본 경무국 경부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상사로부터 의열단의 친구가 돼 핵심 정보를 빼내라는 특명을 받고 리더인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김우진 역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한 이력이 있는 이정출을 회유해 의열단의 작전을 수행하려고 한다. 서로를 속고 속이는 가운데 내면의 갈등도 충돌을 거듭한다. 

밀정

이야기의 모티브는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다. 1920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돼 일대 동요가 일어나고 사건의 배후로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이 지목된다. 핵심인물 김상옥이 도주 중 사망하고 의열단은 일제 거점 시설을 파괴할 2차 거사 계획을 세운다. 이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한때 독립운동 진영에 속했으나 변절 후 일제 고등 경찰인 경부로 일하고 있는 황옥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황옥은 의열단의 거사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심은 '밀정'이었다는 설과 일본 경찰을 가장한 의열단원이었다는 설이 분분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미완이다.

김지운 감독은 황옥이라는 문제적 인물을 이정출(송강호)로 재탄생시켰다. 극단의 경계에 선 인물은 그 자체로 영화적이다. 시각에 따라 친일이 될 수도 반대로 항일이 될 수 있다. 영화가 취한 시선은 후자에 가깝다. 

'밀정'은 독립군과 일본 경찰의 대립구도에서 나아가 보다 다층적인 시각으로 시대와 신념과 인물을 다룬다. 친일과 항일, 적과 동지,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긴장감을 바탕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결과를 알고 과거로서 바라보는 역사와 동시대 현재로서 맞닥뜨리는 역사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혼돈의 시대 누군가는 독립은 낙관했고, 누군가는 독립을 비관했다. "너는 조선이 독립이 될 것 같으냐"는 이정출의 한마디가 그 시대 대다수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울어진 국운 속에서도 나라와 신념을 위해 싸운 이들이 광복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우리가 의열단을 기억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당위다. 영화는 명확했던 신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행동했던 의열단의 주저없는 순간을 담아내는 동시에 시대 안에서 고뇌하고 갈등했던 인물들의 발자취도 쫓는다.

밀정

"이 영화는 밀정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밀정이 될 수밖에 없던 시대의 질곡을 담으려 했다"는 김지운 감독의 기획의도가 시사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내부의 분열을 선과 악의 문제로 단정 짓지 않으며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시대와 인물을 다룬다. 

충무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답게 김지운 감독은 가장 치열했고 반대로 낭만도 넘쳤던 두 얼굴의 경성을 재현해 냈다. 더불어 오프닝 액션신부터 시선을 잡아끌기 시작해 경성과 상해를 넘나드는 스파이 드라마를 써내려갔다.    

특히 의열단과 일본 경찰이 맞닥뜨리는 열차 액션은 '좋은 놈, 이상한 놈, 나쁜 놈'의 열차 시퀀스의 확장판이다. 초호화 1등 칸부터 초라한 3등 칸을 오가며 벌이는 추격전은 박진감이 넘친다. 화려한 미쟝센이 선사하는 시각적 즐거움과 극단에 선 인물들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긴장감이 상당하다. 이야기와 메시지를 위해 자신의 스타일을 절제했다고는 하지만 기차 시퀀스만큼은 화려한 카메라 워킹을 구사하며 이정출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의열단이라는 뜨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신파적 설정에 기대거나 의도적인 유머를 배제해 시종일관 묵직하다. 장면 장면의 밀도만으로 끌고 가는 시대극은 흔치 않다. '밀정'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체감할 수 있는 감정의 밀도가 상당히 높은 작품이다. 사건보다는 감정의 파고(波高)로 긴장감을 자아내는 스파이물이다. 

밀정

영화는 서사의 빈틈도 없잖다. 대표적으로 이정출의 궤적이 선명하지 않다. 마음의 움직임이 서사 구조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물의 전사가 거의 없다 보니 변화를 일으키는 동기가 빈약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다행히도 '밀정'에는 송강호라는 배우가 있다. 송강호는 나라를 저버린 죄책감, 독립에 대한 염원 등 이정출 내부의 복합적인 갈등을 입체적인 연기로 보여준다. 마음의 움직임은 외부의 동기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갈등하는 내면의 결과다. 이 배우는 인물의 복잡다단한 내면뿐만 아니라 시대의 어떤 공기마저도 얼굴에 담아냈다. 

김우진 역의 공유는 캐릭터가 상대적으로 평면적인 까닭에 연기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관객들의 뇌리에 남을 멋진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특별출연한 이병헌의 존재감도 상당하다. 독립운동의 추동적 역할을 하는 의열단 수장 정채산으로 분해 주연 못지않은 활약을 펼친다. 송강호와 이병헌을 한 프레임 안에서 만나는 것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8년 만이다.

발견에 가까운 배우는 엄태구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자 하시모토 역을 맡아 독사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의심하거나 짝눈을 희번덕거리며 매섭게 쏘아대는 연기는 일품이다. 송강호와 맞붙었을 때도 밀리지 않으며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줬다. 주목해야 할 신성의 등장이다. 

밀정

이밖에 서영주, 고준, 김동영, 원진아, 이상희 등 독립영화 신에서 인정받고 있는 젊은 배우들의 얼굴도 만날 수 있다. 분량보다 참여에 의미를 둔 출연이 반갑다.  

상영시간은 140분이다. 급진적 편집의 버전도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느리지만 깊숙하게 펼치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인물의 고뇌를 음미하기에 길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이다. 

'밀정'의 격조 있고 우아한 엔딩 시퀀스는 스파이물의 고전 '제3의 사나이'(감독 캐럴 리드)의 오마주다.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의 퇴장으로 끝을 장식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뤄낸 독립의 계보를 잊지 말라는 듯 실패 위에 또다시 탑을 쌓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어쩌면 이는 뜨거운 오프닝과의 대구(對句)다. 9월 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40분.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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