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영화 핫 리뷰

[리뷰] '최악의 하루', 하얀 거짓말의 마법

김지혜 기자 작성 2016.09.02 17:32 조회 1,157
기사 인쇄하기
최악의 하루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은희(한예리)는 료헤이(이와세 료)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거짓말을 파는 일을 해요"
"은희 씨는요?"

"저도요"

두 사람은 서촌의 한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여자는 연극배우고, 남자는 소설가다. 생각해 보면 연기와 소설 모두 무(無)에서 有(유)를 창조하는 영역에 있는 예술이고, 그럴듯한 가짜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영화 '최악의 하루'(감독 김종관, 제작 인디스토리)는 지리멸렬한 연애의 풍경을 담은 리얼리즘 영화인 동시에 어떤 마법의 순간을 그린 판타지 영화다. 

어쩌면 은희는 료헤이가 집필한 단편 소설집 '어둠 속에서' 소환해 낸 인물이 아닐까. 그리하여 이 영화는 료헤이가 자신이 창작한 가공의 인물과 현실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료헤이를 인터뷰하러 온 잡지사 기자 현경(최유화)은 "작가님은 너무 잔인해요. 인물을 위기에 넣어놓고 꺼내주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녀의 말처럼 은희에겐 험난한 하루가 펼쳐진다. 두 명의 문제적 남자 현오(권율)와 운철(이희준) 때문이다.

최악의 하루

◆ '우리 누구나 이 정도의 거짓말은 하고 살지 않아요?'

누군가를 속이는 거짓말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선의의 거짓말을 지칭하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은가. 왜 은희의 거짓말이 현오에게 비아냥의 구실이 되어야만 할까. 그것이 1년 넘게 만난 여자친구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착각해 부르는 것보다 나쁜 것일까.

은희에게 거짓말은 임기응변과 같은 것이다. 곤란한 상황을 미리 방지하거나, 닥친 곤란함을 순간적으로나마 무마해 보려는 안간힘의 일종이다. 적어도 이 하얀 거짓말엔 악의가 없다. 

이혼한 과거를 속이고 은희를 만난 운철은 "진실이 어떻게 진심을 이겨요?"라는 말로 자기합리화를 한다. 그리고 행복해지지 않기 위해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다고 선언한다. 궤변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마치 연극에서 인물이 등,퇴장을 거듭하다 한 장소에서 맞닥뜨리는 것처럼 세 사람은 남산의 산책로에서 부딪힌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어떤 하루의 진풍경이다.  

최악의 하루

◆ 사랑, 자기 모순의 딜레마

일본에서 온 소설가 료헤이는 단 2명이 참석한 독자와의 대화 자리에서 소설집의 집필의도를 말한다. "연애라는 최소한의 관계 속에는 무궁무진한 감정이 있다. 이 책을 통해 자기모순의 함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료헤이의 말처럼 너(남자)와 나(여자)의 1:1 관계 속에서도 감정은 무궁무진하게 발생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가볍고 간사한 것이라 종잡을 수 없다. 무심코 올린 트윗 하나로도 위치 추적이 가능한 세상이지만, 정작 그 사람의 진짜 감정은 추적 불가능하다.

은희는 현오와 운철 중 누구를 더 사랑했을까. 현오는 은희의 몸이 아닌 마음을 탐했을까. 운철의 거짓말은 진심을 위한 최선이었을까. 이런 단순한 궁금증이 마구 피어오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궁금증의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관계의 균열과 파국을 자초하고도 자신을 변호하고 포장하려고 애쓰는 세 남녀를 그리는데 집중한다. 

'최악의 하루'는 가장 보편적 인간 관계인 남녀 사이를 통해 자기 모순의 딜레마에 빠지는 흥미진진한 풍경을 선사한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은 사람 구경이라는 듯 말이다. 

최악의 하루

◆ 최악의 하루의 해피엔딩

"긴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좋아해요.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는"

홀로 남겨진 은희는 연기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다. 그녀에 따르면 오늘은 '긴 긴 하루'였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었다. 

남산에서 다시 만난 료헤이와 은희는 어둠이 내린 산책로를 걷는다. 이 순간은 료헤이가 자신이 만들어 낸 욕망의 인물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환상(은희)과 현실(료헤이)이 제3의 공간에서 부딪히는 그런 순간이다. 

은희는 연극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며 넋두리한다. 그러나 "그 연극이란 게 할 때는 진짜"라고도 한다. 은희의 거짓말은 적어도 그 순간엔 진심이다. 

최악의 하루

료헤이는 하루 내내 고달팠던 은희에게 마침내 해피엔딩을 선사하고자 한다.

"지금과 계절이 달라요. 눈이 내려요. 한 여자가 걸어옵니다. 무표정하게 걸어오다 뒤를 돌아봐요. 어두워진 산책길 너머로.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위로받았다. 그녀도, 그녀를 지켜보는 관객도. 하얀 거짓말의 마법이다.

ebada@sbs.co.kr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