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영화 스크린 현장

[인터뷰] 김성수 감독은 왜 아수라판을 벌였나…부메랑의 역설

김지혜 기자 작성 2016.10.13 16:11 조회 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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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감독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지난해 8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만난 김성수 감독은 "내 생애 다시 없을 캐스팅이라, 설레기도 하고 부담도 크다"고 '아수라'(감독 김성수, 제작 사나이 픽처스)촬영을 앞둔 마음을 밝혔다. 크랭크인을 두 달 남겨둔 시점이었지만, 그는 시나리오를 고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수라'로 김성수 감독과 처음 만난 황정민은 "이렇게 부지런한 감독은 본 적 없다. 요즘 젊은 감독들이 배워야 할 성실함"이라고 존경심을 드러냈다.

1990년대 유행을 주도하고 현상을 만들어 낸 젊은이들을 지칭한 'X세대'에게 김성수 감독의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8)는 인생 영화다. 왕가위의 홍콩 영화들이 국내 극장가에서 반향을 일으켰던 그 때 우리에겐 '스타일리스트 김성수'가 있다는 자부심을 선사했다.

'아수라'는 김성수 감독에게 꿈의 영화다. 전작인 '감기'(2013)가 흥행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아수라'는 만들고 싶어 모든 것을 내건 작품이다. 흥행 부진에도, 신랄한 혹평에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찍고 싶은데로 원없이 찍은 후련함 때문일 것이다.

톱배우들의 멀티 캐스팅과 거대 자본이 합쳐진 상업 영화는 대부분 안전한 길로 간다. 그러나 '아수라'는 뜻밖의 길로 방향을 잡았고, 주저함 없이 직진했다. 그리고 끝까지 간 선택과 판단에 대해 김성수 감독은 후회가 없다. 

아수라

Q. 개봉 초부터 관객 반응이 들끓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A. 예상했던 바다. 당연히 호불호가 나뉠 것으로 생각했다.  

Q. '무사' 이후 오랜만에 직접 쓴 시나리오로 연출했다.

A. 데뷔작 '런어웨이'나 '비트','태양은 없다'는 각색만 했고, '무사'는 직접 썼다. 그 이후로 오랜만이다.

Q. '아수라'의 무엇에 꽂혔나?

A. 느와르 영화를 하고 싶었다. 이 장르의 영화가 무척 많은데 내가 만든다면 새로운 영화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쁜 놈들만 나오는 영화가 하고 싶었다. 보통 범죄 액션 영화에서 조무래기는 잠깐 나와서 두목 뒤에 있다가 한 방에 죽는 경우가 많다. 왜 저러고 사나 싶을 때가 많은데 그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닌가 싶더라. 그런 사람 중 한 명을 내세우면 어떨까. 그러면 필름 느와르 장르 안에서 보편적 가치, 우리의 현실을 투영할 수 있을 것 같더라. 또 악인들만 나오는 서사를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엄두가 안 난 것은 선한 사람이 부당한 이에게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폭력을 내세워 이기는 구도가 아니니 과연 이영화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Q. 제작사 사나이 픽처스를 만난 건 천운이었겠다.

A. 그렇다. 아마 한재덕 대표를 못 만났다면 끝까지 가슴에만 품고 있었을 영화다. '감기'를 마치고 더 늦기 전에 내 방식의 영화를 해보자 싶었다. 그런데 다들 영화화되기 힘들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한재덕 대표가 시나리오를 보더니 "재밌는데요? 이거 합시다"라고 했다. 

김성수감독

Q. 게다가 어머 무시한 캐스팅까지 등에 업었으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A. 우리 집사람도 캐스팅을 보더니 "이런 배우들 가지고 이렇게 찍을 거야? 고쳐"라고 하더라. 하늘이 준 기회인데 좀 더 관습적이고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다. 한편으론 이런 배우가 붙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나와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객이 볼 영화고. 신이 내게 준 축복이라 여겼다. 

Q. 영화의 주요 배경인 안남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안산과 성남을 합친 듯한 도시의 느낌이다.

A. 안남은 도시의 빈민의 달동네 느낌이었으면 했다. 과거의 냄새가 나는 쇠락하고, 부패한 도시의 느낌을 내고 싶었다. 또 서울에 붙어 있는 위성도시였으면 했다. 서울 근교의 낙후한 도시라면 이름이 뭐가 되어야할까를 생각했다. 실제 도시를 조합해서도 만들어 봤다. 안남시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 곳인데 사람들이 "나 거기 알아"라고 하는 사람이 많더라.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함 직한, 유사기억을 자극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름을 잘 지었구나 싶었다. 

Q. 어떻게 그런 가능의 공간과 이미지를 떠올리게 됐나. 

A. 서울 토박이인 내가 경험한 70~80년대는 엄청난 개발붐이 일었다. 조금만 낙후한 지역이면 부수고 파헤쳐서 새로운 건물과 아파트를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발 비리에 관한 뉴스가 나오곤 했다. 내가 봐온 그런 익숙한 풍경을 안남이라 곳에 펼쳐놓으면 도시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는 느낌이 들 것 같더라.

Q. 안남시의 극단적 상황과 폭력이 과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지적도 있다. 

A. 늘 이런 물리적 폭력과 극단적 상황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더 지독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국민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말만 앞서는 경우를 뉴스에서 많이 볼 수 있지 않은가.

아수라

Q. 검찰, 경찰, 정치권의 묘사가 디테일하게 나온다. 취재 과정이 궁금하다. 

A. 지방 시청 근무자, 현직 경찰, 부시장과 시장 그들의 수행 비서, 지방 도시의 토건 세력, 실제 건달, 건설사 사장 등 다양한 사람을 소개받아 만났다. 두 명의 형사가 도와줬고 검사 출신 변호사, 현역 검사도 만났다. 그런데 검사는 말을 아끼더라. 경찰 중에서는 '부당거래' 때 류승완 감독에게 도움을 준 형사를 소개받았다.

Q. 장례식 장면을 위해 달려온 영화 같다. 그야말로 생생한 지옥의 재현이었다.

A. 우리 영화를 응축시킨 하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비서실장의 장례식장이지만 그로 인해 핵심인물이 한 공간에 모이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다. 많은 회의와 리허설 끝에 완성된 시퀀스다.

Q. 어떤 것에 중점을 뒀나?

A. 우리 영화 속 골목이나 길들이 대부분 좁고 음침하다. 미로 같은 그 골목 골목을 지나 다다를 공간이 장례식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은 세트로 지어 찍었는데 창을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배우들조차 촬영하면서 밀실 공포증이 생길 것 같다고 힘들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잘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웃음) 인물들을 지하 밀실에 밀어 넣어야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 여기고 자기 주인도 물 수 있는 상태가 될 것 같았다. 그곳은 우리 영화의 종착점이자 영화 초반의 행위를 반복하는 공간이다. 도경(정우성)이 작대기(김원해)에 했던 행동은 박성배(황정민)에게 당하게 된다. 자기가 저지른 악행의 부메랑을 맞게 되는 곳. 악인들이 응징당하고 그들의 썩은 영혼이 소멸해 진혼곡이 퍼지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세팅을 했다.

아수라

Q. 반면 장례식장 시퀀스는 너무 잔인해 폭력을 전시한다는 비판도 있다. 촬영할 때 이런 시선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

A. 없었다. 나는 더 하고 싶었다.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폭력 장면을 찍을 때는 사람에게 통쾌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면 주인공의 감정은 극대화하고, 당하는 상대방은 인격이나 표정은 지워서 찍어야 한다. 폭력의 폭력성을 거세해야 즐거운 볼거리로 여길 수 있다. 폭력 장면이 관객에게 피가 튀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관객들이 편안하게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편집할 때 음향도 보통의 액션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는 하나도 안 쓰고 여러 가지 소리를 조합해서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만들어 썼다. 보는 이들을 섬뜩하고 불편하게 해야 했다. 우리 영화는 악행과 폭력에 관한 영화다. 이 악의 도시에서의 지불 수단과 거래 방식은 폭력이라는 화폐를 사용한다. 이 인물들이 다 일종의 폭력적인 주종관계, 협박 관계,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다. 영화 장르상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성패를 가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몰아붙였다.

Q. 폭력의 수위와 감정의 과잉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신 자체의 완성도 측면에서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카체이싱을 비롯한 장례식 액션신들은 할리우드에서도 탐낼 만한 촬영 방식과 완성도다.

A. 할리우드에서는 좋아는 하지만 쓰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사람의 무의식을 악의적으로 만들면 불편해하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 대해 극단적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나의 의도에 걸려들었단 생각도 든다. 그 분들도 어쩌면 시간이 지나고, 폭력의 잔영이 사라지고 나면 다르게 느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수라

Q. 어떤 점에서?

A. 누구나 마음 안에 악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심연에 누워있어서 드러나지 않으면 행복한 거고, 꿈틀거린다면 거대한 흙탕물을 일으킨다. 인간의 모든 욕심은 자기가 가질 수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과도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폭력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다 보면 박성배(황정민), 김차인(곽도원)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그런 것들에 한 번쯤 공감해 주시지 않을까 싶다.

Q. 이 영화는 메시지를 주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지옥을 보여줄 뿐이지.

A. 그렇다. 난 교훈을 주는 영화를 가장 싫어한다. 설교하는 영화를 싫어해서 하지 않았지만, 인물 배치를 통해 역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기만 옳다고, 자기 신념만 따르라는 사람 때문에 세상이 망조가 든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제 잘났다고 하는 인물이 말로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남의 말을 안 듣고, 잘못에 대해 시인하지도 않는다.

내가 처음 '아수라' 시나리오의 제목을 '반성'으로 지은 이유가 반성하지 않은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도경(정우성)만은 반성하고 후회한다. 자발적 악인도 아니고, 끝내는 반성을 하니 그만은 반인반수다.

Q. 당신이 만든 '비트'와 '태양은 없다'는 그 시대 가장 젊은 영화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수라' 같은 용광로 같은 영화를 내놓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 젊은 감각의 비결 말이다.

A. 젊기는 무슨, 이제 갈 참인데...하하. 그렇게 봐주셨다면 내가 좋은 스태프를 써서 그런 거다. 능력 있는 스태프를 쓰면서 잘하라고 겁박을 주면 된다.(웃음) 감독은 시어머니다.

아수라

Q.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영어완전정복'(2003)은 어떻게 만들게 된 건가? 당시 김성수 감독을 좋아하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정말 의아했다. 물론 그 영화도 극장에서 봤다.

A. 일단 고맙다. 그 영화는 내가 만든 회사 나비픽쳐스에서 준비하던 영화였다. '달마야 놀자'를 만든 박철관 감독이 연출하기로 했는데, 촬영 전에 "못하겠다"고 하더라.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시킬 순 없었다. 당장 감독을 구해야 하는데 우리가 원하는 감독이 구해지지 않았다. 투자사가 "감독님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녜요?"라고 해서 책임감에 내가 연출하게 됐다. 

Q. 김성수와 안 어울리는 영화이긴 했지만,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변신이라는 점에선 재밌었다.

A. 영화는 망했지만 과정은 재밌었다. 코미디 영화는 현장도 정말 재밌더라. 그 당시엔 정말 재밌게 찍었는데 희한한 게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생각이 안 나더라. 촬영장 분위기도 좋고 스태프들과도 하하 호호하면서 찍었는데 고생을 안 해서인가. 행복은 아사무사한 거구나 싶더라.

Q. 지금 생각해 보면 말괄량이 삐삐 같은 스타일을 하고 영어 초보자를 연기한 이나영의 변신도 놀라웠다.

A. 그렇지. 외계인 같은 배우다.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4차원 같은 구석이 있다. 심지어 본인도 그걸 안다. "감독님 저, 외계인 같지 않아요?" 이런 말도 자주 했었다. 얼마전에 원빈 씨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한다. 

김성수감독

Q. '무사' (2001)이후 '감기'(2013)까지 무려 12년간 연출 공백이 있었다. 그 시간은 어떻게 보냈나?

A.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고, 중국에서 영화사를 차려 중국 영화를 기획하고 만들었는데 쫄딱 망했다. 그 과정을 통해 느낀 것이 나 같은 사람은 교수하면 안 되고, 사업하면 안 된다는 거다. 물론 그러면서 영화도 준비했는데,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다 보니 진행이 잘 안 됐다. 

Q. '감기'도 좀 의외의 선택처럼 보였다.

A. 이제 영화 연출만 하면서 천만 감독으로 복귀해야겠다는 각오로 한 영화인데,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잘 안 됐다. 그 영화를 통해 내가 실력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Q. 일부러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 우리 시대 때 당신은 최고였다. '비트'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꼽는 최고의 청춘 영화다.

A. '비트'가 개봉했을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지 않았다. 다들 왕가위 따라 했다고 비판하고 그랬다. 그런데 개봉 6개월 정도 지나고 나니 반향이 일더라. 어느 순간 내가 유명인사가 돼 있었고 고소영, 임창정이랑 예능 프로에도 나가고 그랬다. 주변 영화인들이 "네가 뭔데 방송에 나오냐"고 욕하고 그랬다.

비트

Q. 데뷔작 '런어웨이'(1995)는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는데 2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비트'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인가?

A. 음...이런 건 있다. 박광수 감독님 조감독을 하던 시절에 만들었던 단편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여러 번 초청됐다. 그때 파리에 머물면서 베를린 등 유럽의 몇몇 도시와 북아프리카를 여행했는데 너무 인상적이었다. 유럽의 문화와 사람들을 접하면서 한국이 많이 답답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느낀 것 중 하나가 '오늘 배운 건 내일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배운 게 내 안에 체화되려면 적어도 2~3년은 걸리더라. 그런 시각적 충격과 생각의 변화가 '비트'나 '태양은 없다'를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Q. 유럽행 이후 2~3년 뒤에 만든 영화가 '비트'였던 셈인데, 자전적 이야기가 투영돼 있다고 들었다.

A. '비트'로 유명해지고 나서 친구들이 나를 자랑스러워하더라. 그전엔 "병신, 지가 무슨 영화를 한다고..."라고 놀렸는데...'태양은 없다' 개봉 때 동네 친구들을 명보극장에 불러서 보여준 적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친구들이 하나같이 "야, 왜 내가 영화에 나오냐"고 하더라. 참나...그 영화들 속엔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Q. '알고 해야 한다'라는 것에 대한 어떤 철칙이 있는 것 같다.

A. 알고 있다고 해도 영화를 잘 만들긴 어렵다. 그럼에도 자기가 아는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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