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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가려진 시간', 강동원 판타지로 완성한 믿음의 서사

김지혜 기자 작성 2016.11.03 15:27 조회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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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시간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가려진 시간'을 연출한 엄태화 감독은 '비현실과 현실의 충돌'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이 말을 기반해 그의 전작들을 되새겨 보면 '꿈과 현실'('숲'), '인터넷 공간과 현실'('잉투기')이 서로 영향을 끼칠 때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는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공통된 특징은 장난처럼 시작된 일이 어떤 사건으로 커지면서 딜레마에 부딪히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가려진 시간'(감독 엄태화, 제작 ㈜바른손이앤에이)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간이 상대적으로 작용하는 판타지의 영역에서 풀어낸 영화다.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았던 엄태화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으로 그의 흥미로운 영화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수린(신은수)은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은 후 새 아빠(김희원)와 함께 화노도로 이사를 온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공상에 빠져 지내는 수린에게 성민(이효제)이 다가온다. 두 사람은 둘만의 공간에서 추억을 쌓고, 둘만의 암호로 편지를 주고받는다. 

어느 날, 공사장 발파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수린은 친구들과 산으로 가고, 모두가 실종된 채 수린만 돌아온다. 그리고 며칠 뒤 자신이 성민(강동원)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가려진 시간

현실에서 있음 직한 일이 아니다. 고대 설화에서나 나올법한 '요괴의 알'에 의해 불가사의한 현상이 펼쳐진다. 알이 깨지자 아이들이 사라졌고, 수린과 성민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누군가에게 초 단위로 흐른 시간이 누군가에겐 광속으로 지나갔다.

판타지의 영역에서는 신비로운 현상이지만, 아이를 잃어버린 이들에겐 현실 공포다. 아동납치나 소아성애를 이야기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비약이 아닌 것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현상은 그야말로 '미스터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간이 멈췄다는 말로는 표현 범위가 좁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가려진 시간'이라고 명명한 영화의 제목은 탁월하다.

영화는 수린과 성민에게 다르게 적용된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서사를 펼친다. 영화는 성민의 시간보다 수린의 시간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판타지만큼이나 리얼리티에 힘을 싣는다. 현실 영역에서 실종 사건은 극의 미스터리적 요소를 부각시키는 큰 줄기기도 하다.

분위기로는 '늑대소년'을, 장면으로는 팀 버튼의 몇몇 영화들이 떠오른다. 굳이 특정 영화를 언급하지 않아도 이 영화가 그려낸 환상의 세계는 유려하다. 물 한 방울의 마법과 한 폭의 회화 같은 정지 화면 등 아이들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춘 듯한 장면 장면의 힘이 상당하다.

영화는 미스터리 요소를 유지하면서 드라마를 켜켜이 쌓아 올린다. 같은 시간이 다르게 적용된 수린과 성민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공감이나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둘만의 세계다. 

가려진 시간

'가려진 시간'의 화법은 엄태화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묘하다. 인간의 열등감을 스릴러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던 '숲'이나 잉여 청춘의 자화상을 액션으로 풀어낸 '잉투기'와 비교해 창의적이되 비대중적인 방식으로 판타지 세계를 안내한다. 판타지와 현실을 오가는 영화는 유보적인 결론을 택하는데 이는 명확한 엔딩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수도 있다. 또한 흥미롭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중반 이후 표류하며 힘이 떨어진다는 것도 아쉬움이다.

시공간의 이동, 느린 호흡, 재기발랄한 유머 등은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설다. 그러나 이 조합은 뜻밖에도 쉽게 빠져들게 된다. 누구나 쉽게 이야기하는 '믿음'이라는 감정은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믿음'은 곧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엄태화 감독이 펼친 판타지의 세계는 믿음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설계됐다. 모두가 의심하는 진실을 믿어준 단 한 사람에 대한 순정, 이 동화는 그렇게 완성됐다. 무엇보다 무드로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고, 호기심으로 긴장감을 끌어가는 감독 특유의 능력은 빛난다. 

이 여정엔 강동원이라는 스타가 큰 기여를 한다. '강동원 판타지'가 판타지 장르와 만났을 때의 시너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린 성민이 형성한 감성이 어른 성민으로 옮겨오면서 일순간 삐걱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좀 더 세밀한 감정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신비로운 외모가 만회한다. 

가려진 시간

29살의 성민이 "나 (13살의) 성민이야"라고 말할 때 기꺼이 믿고 싶은 마음은 그 존재가 '강동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어른이 된 아이를 연기한 강동원이 아닌 진짜 아이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투명하고 맑은 감성으로 보는 이에게도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 신은수와 이효제의 연기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어른이 된 아이 '태식' 역의 엄태구도 짧지만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무엇보다 '가려진 시간'은 엄태화라는 이름을 아로새기게 될 작품이다. '숲'과 '잉투기' 등과는 완전히 다른 소재와 분위기의 작품으로 상업영화계에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전작들을 능가하는 도약이라는 데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폭을 넓힌 전진이라는 것이다. 12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29분, 개봉 11월 16일.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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