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①] 엄태화 감독, 이 시대에 '믿음'을 이야기한다는 건

김지혜 기자 작성 2016.11.25 12:44 조회 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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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화감독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얼굴이 낯익어요"

"동생 때문인가 봐요(웃음)"

엄태화 감독과의 인터뷰는 닮은 듯 안 닮은 동생 엄태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충무로에 오랜만에 등장한 영화 형제. 형(엄태화)은 연출은 하고, 동생(엄태구)은 연기를 한다. 두 사람은 작품을 함께하며 거듭나고 있다.

단편 영화 '하트 바이브레이터', '유숙자', '숲' 그리고 장편영화 '잉투기', '가려진 시간'까지 엄태화 감독이 연출한 모든 영화엔 엄태구가 등장한다. 때론 주연으로, 때론 조연으로.

'가려진 시간'은 엄태화 감독의 첫 번째 상업영화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기준점을 제작비 규모로 본다면 말이다.

엄태화 감독은 '가려진 시간'을 통해 영화적 욕망을 자본의 제약을 최소한으로 받으며 촬영했다. 그러나 돈의 크기보다 가치 있는 건 무형의 땀과 노력이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스토리텔링상 CG 작업에 공을 많이 쏟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시간이 곧 돈인 영화현장에서 추가 촬영까지 감행했고, 개봉 직전까지 CG를 손보는 등 공을 들였다.

엄태화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어요. 특히나 멈춤 세계에 관련한 CG 표현은 작은 부분까지도 찾아내서 오류를 줄이려고 했어요. 그 과정은 저보다는 CG팀이 고생을 많이 했죠. 시사회에서도 발견한 분들이 있어서 개봉 전까지 고쳤던 것 같아요. 다 만족스러울 순 없겠지만, 제가 해볼 수 있는 건 다 했던 것 같아요"

'가려진 시간'은 믿음에 관한 영화다. 모두가 나를 부정할 때 나를 믿어준 한 사람에 대한 헌신과 희생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다. 불신으로 가득 찬, 그 불신이 분노로 바뀔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가려진 시간'이 보여주는 믿음은 비현실적이라 신기루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최후의 보루 같은 희망을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신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을 수 있고 온전히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왜 엄태화 감독은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를 오가는 믿음의 서사에 천착했던 것일까.

"현실과 비현실이 맞부딪히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예전부터 멈춰진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주인공이 과거나 미래로 가는 경우는 많아도 멈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잘 없었던 것 같아요. 설정 자체가 주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작자 미상의 한 그림을 보게 됐어요. 거대한 파도 아래 한 남자와 여자가 서 있는 그림이었어요. 두 사람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생각하게 됐죠. 멈춰진 시공간과 두 사람의 이미지가 합쳐져 지금의 이야기를 만들게 됐어요"

가려진 시간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엄태화 감독에게 이미지는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그는 "원래 그림을 좋아해서 소설이나 시 같은 텍스트보다는 이미지로 스토리텔링 하는 것이 좀 더 익숙하다"고 말했다. 전작인 '잉투기'는 피칠갑한 남자랑 밀가루를 뒤집어쓴 여자의 장면의 이미지가 떠올라 '현피'라는 소재로 확장한 사례였다.

멈춘 세계와 흐르는 세계,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이야기 전개를 구축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 상상의 영역을 펼치는 영화일수록 창작자의 자기 검열이 엄격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어야 타인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태화 감독은 이 이야기를 만들면서 어떻게 자기 검열의 벽을 뛰어넘었을까.

"판타지라고 해서 너무 허무맹랑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했어요. 세계관을 확실히 구축하고 가야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느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관객들은 수린의 감정에 이입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니 저런 이야기가 있을 법하다고 믿어야 하죠. 그렇다고 판타지의 영역에 너무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굳이 안 보여줘야 할 지점까지 보여줘야 할 수도 있으니 적정선을 찾아야 했어요. 관객들은 수린을 따라왔지만 수린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야 했어요. 관객들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싶었거든요.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나요?'라고요"

엄태화 감독의 야심은 최적의 파트너들과 함께 실현됐다. 바로 신은수와 강동원이다.

가려진 시간

"은수의 얼굴에는 이야기가 있어요. 보는 순간 수린의 외로움이 잘 표현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성격이 소탈하면서도 강단이 있어요. 오디션 때도 다른 배우들과 달리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려 하지 않은 쿨한 모습이었거든요. 그 점이 수린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연기 경험이 없다는 것도 부담 요소가 아녔어요. JYP에서 가수 연습생을 할 정도면 그 어려운 노래, 춤 학습 과정을 이겨냈다는 것이니까. 한 달 정도 연기 트레이닝을 시켰고, 아니나 다를까 빠르게 성장했어요"

영화 초반 한 시간을 아이들 세계의 감정을 쌓는 과감한 선택을 한 만큼 그들의 심리묘사에 대한 엄태화 감독의 섬세한 연출도 돋보였다. 특히 아이들의 시선에서 어른의 세계를 바라보는 장면들은 큰 인상을 남겼다.

"아이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캐스팅 전부터 초등학생에게 피자를 사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말투를 즐겨 쓰는지를 공부했죠. 어릴 때 내 또래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서 좀 가짜 같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도 출연하는 아이들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반영했어요"

또 한 명의 주역 강동원도 빼놓을 수 없다. 엄태화 감독의 머릿속에 그렸던 성민의 이미지를 실현해 준 것은 물론이고 작품 외적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동원 씨는 영민한 배우예요. 상황판단이 신중하고 자기 자신을 늘 객관적으로 평가해요. 가장 좋은 점은 현장을 즐긴다는 것이죠. 자기 주관이 확실하지만, 고집쟁이는 아니에요. 상식적이고 말이 잘 통하는 파트너였어요"   

엄태화 감독의 강동원 활용법도 여느 감독과는 달랐다.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그를 불필요하게 과용하지 않고 작품에 녹아들게 했다.

엄태화 감독은 "이 시나리오를 선택한 순간부터 강동원 씨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분량이나 역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빛나는 장면들이 탄생한 거라고 봐요"

엄태화감독

'가려진 시간'이 제작비 초과로 꼭 필요한 장면을 찍지 못하고 있을 때 강동원은 투자배급사를 설득하는 역할도 앞장섰다.

"영화 속 몇몇 장면들은 촬영하지 못할 뻔하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아이들이 세계에 갇혀서 선 밖으로 나가보려고 하는 장면인데 예산 때문에 그 신을 대사로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동원 씨가 투자사와 제작사를 설득하는 데 도움을 줬어요. 본인이 등장하지 않은 장면인데도요. 어린 성민의 이야기이지만 어른 성민에게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라고 함께 싸워줬어요"

'가려진 시간'을 통해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른 만큼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도 생긴다. 엄태화 감독은 "SF장르의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시나리오가 구체화된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쪽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다. 궁극적으론 다양한 장르, 색깔의 영화를 많이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어떤 감독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에는 깊게 생각하더니 '스즈키 세이준'과의 일화를 전하며 자신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예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오랜 팬이던 스즈키 세이준 감독(93)의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2005)을 봤어요. 그날 GV(관객과의 대화)에 감독님이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오셨더라고요. 어떤 관객이 영화를 잘 찍는 노하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는 단호하게 "미래의 경쟁자에게 알려줄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나도 나이가 들어 산소호흡기를 끼고도 GV를 할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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