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영화 핫 리뷰

[리뷰] '여교사', 사제간 로망스를 생각하는 당신에게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1.04 13:04 조회 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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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교사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요즘 나의 관심사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어떻게까지 할 수 있느냐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치정극이 보통 윤리에 부딪히는데 '여교사'에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감정을 다루려 한다"

김태용 감독은 영화 '거인'(2014) 인터뷰 당시 차기작에 대해 "윤리를 넘어선 치정극"이라고 소개했다.

선언대로다. 영화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야릇한 상상력은 페이크다. 설정의 파격만 가져올 뿐 인간의 감정적 추락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여교사'(감독 김태용, 제작 외유내강)는 위험한 관계를 다룬 많은 영화가 결국 윤리의 벽에 부딪히며 파국을 맞는 전개를 구사하지 않는다. 대신 관계에서 촉발되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갈등에 집중한다. 주인공 효주의 욕망 근저엔 뿌리 깊은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계약직 여교사 효주(김하늘)는 자기 차례인 정교사 자리를 치고 들어온 이사장 딸 혜영(유인영)이 몹시 거슬린다. 부임 첫날부터 학교 후배라며 다가와 살갑게 굴지만,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다 우연히, 임시 담임이 된 반에서 눈여겨보던 무용 특기생 재하(이원근)와 혜영의 관계를 알게 된다. 효주는 이 비밀을 빌미로 혜영을 곤란하게 하면서 자신의 이익도 취하려 한다. 그 가운데 재하가 학생이 아닌 남자로 접근해 오기 시작한다.

여교사

줄거리만 보면 여교사와 제자의 위험한 사랑을 다룬 치정극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초점을 '사랑과 욕망'이 아닌 '질투와 열등감'에 맞춘다. 그리고 내면의 아킬레스건을 드러낸 인물이 어떻게 자멸하는가를 극단적 전개로써 보여준다.

효주는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에 어렵게 사범대를 졸업했을 것이다. 임용고시에 실패했고, 사립고등학교의 부교사가 됐다. 계약직의 설움은 교직 사회라고 다를 바 없다.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 동료들은 다른 위치에 올라 보이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후천적으로 습득된 열등감은 무섭다. 자격지심과 피해의식도 동반한다. 상대적 박탈감은 가진 자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이어진다. 이는 죄를 짓고도 죄의식에 빠지지 않게 만들며,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 영악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효주는 열등감이 키운 괴물이다. 이 영화가 윤리나 계급에 의해 추락하는 인간을 그린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바로 그 지점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 어떤 누구를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여교사'는 학교라는 공간, 교직이라는 사회, 교사와 제자라는 위치를 통해 부조리와 비윤리의 경계를 오간다. 영화는 교직사회의 위계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직접적이고 딱딱하게 그리며 불편한 감정을 조장한다.

피상적인 상황제시와 섬세하지 못한 인물 묘사는 아쉽다. 초, 중반까지 제시된 환경과 인물의 성격으로 미뤄봤을 때 후반부의 극단적인 행동이 자연스럽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인물이 자존심을 몽땅 내려놓는 이유가 '욕망'인지 '자리'인지도 모호하다. 관객은 효주를 얼핏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공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교사

물론 영화가 인물의 행동을 모두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감정과 행위, 그 자체로도 이야기가 된다. 이런 인물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사회도 있다는 것이 영화적 흥미와 재미를 제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느 순간 미리 정해놓은 파격적인 결말을 향해 폭주한다. 그간 쌓아온 설정과 감정마저도 단순화하며 말이다. 

김태용 감독은 전작 '거인'에서 그룹홈(Group Home)이라는 사회를 배경으로 살아남기 위해 영악해지는 열일곱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바 있다.

감독은 '거인'과 '여교사'의 공통분모는 '생존'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영재의 생존이 막다른 길에 다다른 절박함으로 와 닿았다면 효주의 생존은 출구 없는 절박함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인물의 몰락이 안타까운 것은 '인간은 때론 어리석다'는 연민 때문일 것이다. 

정서적으로 레퍼런스 삼은 영화는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2001)일 것이다. 효주는 환경에 의해 욕망을 거세한 채 생존에만 집중했던 인물이다. 사랑의 본질은 모른 채 쾌락만 추구했던 에리카(이자벨 위페르)와 같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지점도 있다. 그러나 효주가 자신을 그렇게 내팽겨칠 만큼 절박했을까와 같은 의문은 남는다. 인물의 내면을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 들고 묘사했다면, 보다 많은 이야기가 가능했을 영화다. 

여교사

김하늘은 뛰어난 연기로 각본의 빈틈을 메운다. 푸석푸석한 피부, 생기를 잃은 표정, 초점을 잃은 눈빛 등 그녀가 표현해 낸 심연의 얼굴은 희망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효주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영화가 조성하는 불편한 긴장감의 대부분은 김하늘의 예민하면서도 섬세한 감정 연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재하' 역의 이원근 역시 인상적이다. 식물처럼 살아온 한 여성의 삶에 파동을 일으키는 상징적 존재로서 한껏 매력을 발산한다. 그 아름다움에도 이면은 있다.

어쩌면 관객으로 하여금 가장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은 재하일 수도 있다. 만개한 청춘은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무지와 결핍의 미성숙한 자아를 형성한 청춘은 어리석고 영악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여교사'의 재하는 '거인'의 영재와 일견 닮은 부분이 있다.

'여교사'는 다층적인 갈등 구조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게끔 한다. 영화가 세 인물의 단면이 아닌 양면을 끊임없이 부각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설정의 파격과 장면 장면의 긴장감, 무엇보다 배우의 강렬한 연기는 극의 집중력을 높인다. 이 영화의 충격과 파격은 베드신이 아닌 권력 관계의 전복, 감정선의 드라마틱한 굴곡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결말의 과감함과 세기에 비해 전반적인 균형과 디테일을 놓친 점은 못내 아쉽다. 청소년 관람불가, 상영시간 96분, 개봉 1월 4일.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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