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김지혜의 논픽션] "기자와 배우가 벽을 허물었습니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1.19 11:07 조회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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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미국 '골든글로브 어워드'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ollywood Foreign Press Association)가 주관하는 영화 시상식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TV 업계를 취재하는 외국 언론인으로 구성된 이 협회는 매년 공정한 심사 과정과 결과로 그해 최고의 작품과 배우를 선정한다. 

한국에도 골든글로브를 표방하는 시상식이 있다. 바로 '올해의 영화상'이다. '올해의 영화상'은 한국영화기자협회(회장 윤여수)가 주관하는 시상식으로 현직 기자들이 그해 최고의 영화와 감독, 배우, 영화인을 선정해 트로피를 수여한다.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주연상은 물론이고 올해의 발견상, 올해의 홍보인상 등 다른 영화 시상식에서는 볼 수 없는 수상 부문까지 만들어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애쓴 사람들의 노고를 기린다. 

올해로 8년째다. 누군가는 고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상식을 만들고 이끌어 온 기자들에겐 남다른 의미다.

제 8회 '올해의 영화상'은 2016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개봉한 한국 영화와 외화를 대상으로, 협회 소속 50개 언론사 73명의 기자 중 58명(1사2인으로 제한)이 투표에 참여해 수상자(작)를 가렸다.

18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상식은 문화일보 김구철 기자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기자가 시상을 하고 영화인이 트로피를 받았다. 

'올해의 영화상'에서만 볼 수 있었던 따뜻한 풍경을 전한다.

돌아저씨 라미란

◆ 라미란 "삼청동 라운드 인터뷰 없애겠다" 파격 선언

배우 라미란은 영화 '덕혜옹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지난 제5회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지 3년 만에 다시 한 번 영예를 안은 것이었다.   

라미란은 트로피를 받은 뒤 "몇 년 전 이 자리에서 '소원'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눈치 없이 다음엔 주연상을 받고 싶다고 허튼소리를 했는데 그 길이 참 험하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주연상, 조연상 그게 뭐가 중요하냐. 이 자리에 다시 설 수 있다면 신인상이라도 받고 싶다”고 행사 참석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기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만한 파격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라미란은 "기자들을 만나는 게 두려운 일이었다. 처음엔 몰라서 무섭고 두려웠는데 일을 계속하면서는 헛소리를 할까 봐 두려웠다. 이제 삼청동에선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 드라마 '응답하라1988' 끝나고 라운드 인터뷰를 한 적 있는데 이젠 그런 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삼청동은 기자들과 배우들의 일터이자 사랑방 같은 상징적 공간이다. 영화 개봉 전후로 진행되는 인터뷰는 평일 낮 삼청동 일대의 카페에서 이뤄진다. 다매체 시대로 접어들면서 배우와 감독은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일 이상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시간씩 간격으로 기자들과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개봉 영화 인터뷰가 동시기에 연이어 쏟아지는 것도 그 이유다.

시간대별로 인터뷰어를 달리해 엇비슷한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야 하는 인터뷰이한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기자 역시 고충이 있다. 매체가 많아지면서 1:1 인터뷰 문화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한 타임에 적게는 3~4개 매체, 많게는 7~8 매체의 기자가 함께 하는 '라운드 인터뷰' 형식이 자리 잡았다. 깊이 있는 대화와 진솔한 교감을 나누기엔 한계가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라미란은 이런 상황을 고려해 삼청동 라운드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파격 선언을 했다. 과연 이 약속은 이행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기자들 역시 두 손들어 환영한 선언이라는 것이다.   

박찬욱감독

◆ 박찬욱 감독 "'아가씨' 지켜준 기자들 마음 알아"

영화 '아가씨'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이날 시상식에서 '올해의 영화인'상을 받았다. 시상식 무대에 선 박찬욱 감독은 "작품상, 감독상을 안 주니까 미안해서 이 상을 주는 것 다 안다"고 말하며 웃음 지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감독으로서 해야하는 전 과정을 다 골고루 즐기고 행복하게 하는 편이다. 단 하나, 인터뷰만 빼고 말이다. 그게 세상에서 가장 곤욕스럽고 괴로운 일이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아가씨' 때문에 무려 49일 동안 세계 10여 개가 넘는 도시를 돌며 수백 번의 인터뷰를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러려고 영화감독이 됐나' 자괴감에 빠졌다. 하루쯤은 영화감독을 관둘까 생각도 했다. '그냥 제작자로만 남을까? 더 이상 못하겠다' 그런 단계까지 갔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박찬욱 감독은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인터뷰가 싫은 건 기자가 싫어서가 아니라 만들어 놓은 작품을 말로 설명하려니 쑥스럽고, 순수한 예술을 훼손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기자를 먼저 만나는 관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 다음부터는 할 만해지더라. 앞으로도 기피하지 않고 인터뷰를 하고 영화감독도 계속 할까 한다"고 다짐을 전했다.

기자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는 기자들 덕도 많이 봤다. 이 영화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써줬는지 잘 알고 있다. 기사를 쓰면서 품위를 유지한 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여성의 연대를 다룬 소재와 메시지가 곡해되지 않도록 기사로 잘 풀어낸 것과 출연 배우의 스캔들을 개봉 전까지 보도하지 않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애둘러 표현한 말이었다.   

더불어 "'아가씨'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뭐니 뭐니 해도 '아가씨'는 여성에 관한 영화고, 이 영화와 관련된 여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말로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송강호

◆ '블랙리스트' 송강호의 영화를 향한 진심

남우주연상은 송강호의 몫이었다. 영화 '밀정'으로 받은 첫 트로피였다. 송강호는 기자들이 한 마음으로 신뢰하고 존경하는 배우기도 하다. '올해의 영화상'에서 무려 세 차례나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역대 최다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트레이드 마크인 함박웃음을 지으며 무대에 오른 송강호는 "이병헌이 사라지니 드디어 제게 기회가 오네요. 지난 한 해 병헌이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오늘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오신 손예진 씨, (남우주연상)파트너가 바뀌니 새롭죠?"라고 말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송강호는 지난해 대부분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번번이 '내부자들'의 이병헌에게 밀려 수상을 하지 못했다. 그 상황을 재치있게 표현한 농담이었다. 이어 큰 울림을 주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과 몇 명의 관객, 단 몇 시간에 그친다고 해도 그게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그게 영화의 매력인 것 같다. 이 트로피가 그러한 가치, 용기를 주는 것 같다. 앞으로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로 묵묵히 가겠다. 대단히 감사하다"

송강호의 이 말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2013년 영화 '변호인' 이후 2년간 활동을 쉬었다. 이를 두고 끊임없이 외압설이 제기됐다. 대한민국 최고 배우인 송강호를 정치적 부담 때문에 쓰지 않을 투자배급사와 감독이 있을까 싶지만,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송강호는 2015년 '사도'를 통해 스크린에 복귀했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작품은 모두 쇼박스의 투자·배급작이었다. 대기업인 CJ엔터테인먼트와 '변호인'을 투자배급했던 NEW와는 단 한 편의 영화도 함께하지 못했다. 이것은 우연일까. 최근 불거진 블랙리스트 파동은 설이 아닌 진실로 밝혀지고 있는 분위기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송강호는 매 작품 최고의 영화와 연기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또 단순히 오락적 재미를 떠나 관객들에게 다양한 담론을 제시하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2016년엔 일제 강점기 의 이중 스파이를 다룬 '밀정'을 선보였고, 2017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소재의 '택시 운전사'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그의 말은 인간 송강호, 배우 송강호를 대변하는 소신이고 진심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나홍진감독

◆ 나홍진 감독, 소감도 반전 "오늘날 나를 만든 건 최동훈...?"

나홍진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도 미끼를 던졌고 반전의 묘미를 안겼다. 이날 시상식에서 나홍진 감독은 개인 최고의 영예인 감독상과 시상식 최고상인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곡성'은 지난해 상복이 터진 영화였지만, 작품상과 감독상을 함께 받은 시상식은 '올해의 영화상'이 유일했다. 기자들의 독보적인 지지를 받은 셈이다. 

시상식 시작 후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나홍진 감독은 감독상 호명과 함께 무대에 올랐고 "어쩌면 다음 작품을 함께할지도 모르는 관계자들과 오늘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며 "집에서 자다가 정신없이 달려왔다. 몰골이 안 좋아도 양해 부탁드린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수상 소감에서 나홍진 감독은 최동훈 감독에 관한 일화를 밝혔다. 나 감독은 "2004년경이었다. 영화감독을 하려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진도가 너무 안 나가는 거다. 그때 한 기사를 읽었다. 최동훈 감독이 '범죄의 재구성' 시나리오를 발로 뛰는 취재 끝에 썼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너무 큰 감명을 받아 나도 미친 놈처럼 경찰서를 헤집고 다녔고, 여러 형사를 만났다. 그렇게 '추격자'라는 영화가 탄생했다"고 전했다.

나홍진 감독의 이야기엔 반전이 있었다. 나 감독은 "'추격자'가 잘되고 나서 사석에서 최동훈 감독님을 만났다. 그래서 그 기사 이야기를 했고, 감독님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최 감독님께서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 기사 누가 썼냐고 내게 되물었다"고 말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나홍진 감독은 "어쩌면 그 기사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 기자분을 비롯한 여기 계신 모든 기자께 감사드린다"는 훈훈한 말로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부산행

◆ "천만 영화 만들어 이제야 발견됐다" 연상호 감독의 위트

'올해의 영화상'은 매년 시상식 후 뒤풀이 자리를 가진다. 이 자리의 모토는 "기자가 밥 사는 날"이다. 많은 이들이 기자에 대해 '얻어먹고', '받아먹는' 것이 일상화된 특권층(?)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기자들이 관계자에게 밥을 대접하는 경우도 있다. 이 날이 그런 날이었다. 

시상식 뒤풀이 자리에는 수상자 전원과 업계 다수의 관계자들이 자리했다. 분위기 메이커는 뜻밖에도 연상호 감독이었다. 지난해 영화 '부산행'으로 천만 감독의 대열에 오른 연상호 감독은 이날 '올해의 발견상'을 받았다.

연상호 감독은 술자리에서 "천만 영화를 하니 이제서야 발견됐다"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물론 이 말엔 뼈도 있었다. 알려졌다시피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 '사이비'를 만들며 애니메이션의 새 바람을 일으켰고, '부산행'을 통해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렬한 (실사영화) 데뷔식을 치렀다.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칸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받아 수십 개의 상을 받았지만, 다수의 관객과 기자들에게 인정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흥행 감독이 된 이후에나 가능했다는 씁쓸함을 담은 말이었다. 

연상호 감독은 천만 감독이 된 후에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있다. '부산행' 이후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선보였고, 후배인 홍덕표 감독의 '졸업반'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이 자리에서도 '졸업반'에 대한 기자들의 관심을 부탁했다. 

본인 역시 차기작 '염력'을 준비하는 동시에 새로운 만화 작업을 시작했다며 그 결과물을 보여주기도 했다. 연상호 감독이 작화를 재개했다. 실사 영화는 물론 애니메이션도 계속해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은 '올해의 영화상' 각 부문별 수상자(작) 명단-

▲작품상 - '곡성'
▲감독상 - '곡성' 나홍진 감독
▲남우주연상 - '밀정' 송강호
▲여우주연상 - '덕혜옹주' 손예진
▲남우조연상 - '부산행' 마동석
▲여우조연상 - '덕혜옹주' 라미란
▲신인남우상 - '4등' 정가람
▲신인여우상 - '아가씨' 김태리
▲올해의 발견상 - '부산행' 연상호 감독
▲올해의 독립영화상 - '우리들'
▲올해의 외국어영화상 - '라라랜드'
▲올해의 영화인 - 박찬욱 감독
▲올해의 홍보인 - NEW 양지혜 팀장
▲올해의 영화기자 - 이데일리 박미애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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