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 정우성 "민주주의 완성은 국민, 영화의 완성은 관객"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2.06 11:56 조회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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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정우성은 영화 '더 킹'(감독 한재림, 제작 우주필름)의 무대인사에서 자신을 '삼성동에서 온 잘생긴 블랙리스트'라고 소개했다. 가히 정우성다운 위트와 센스였다. 

지난해 10월, 언론을 통해 청와대가 작성을 지시한 의혹을 받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9,473명이 공개됐다. 이 리스트에는 송강호, 김혜수, 정우성, 박해일, 박찬욱, 김지운 감독 등 충무로 대표 배우와 감독의 이름도 올랐다.

정우성은 이 사실을 지난 11월 런던에서 알게 됐다. 당시 영화 '아수라'(감독 김성수, 제작 사나이픽처스)로 런던 한국영화제에 참석했던 그는 기자 간담회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제가요?"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사는 게 제일 좋지 않나 싶어요.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살아야죠. 이해의 충돌은 늘 어느 시대에나 있는데 그 시대의 기득권 세력이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 요구의 강요에 저항하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하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그들이 만든 거지 우리는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거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소신을 밝혔다.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온 한 배우의 소신은 많은 이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국민은 수면 아래 도사리고 있는 각종 의혹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 돼 국정 농단의 실체는 고개를 들었다.

더킹

정우성은 국정 농단 게이트가 터진 직후인 11월 말, 관객들 앞에서 "박근혜, 나와!"를 외쳤다. 팬들을 위한 쇼맨십 차원의 퍼포먼스라고 볼 수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할래"식 액션은 박수를 불렀다.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자아실현을 하고,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전한다. 정우성 역시 영화와 연기를 통해 사회의 공기를 흡수하고, 대중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영화 '더 킹'과 만난 정우성은 악의 축 '한강식'을 연기하며 잘못 사용한 권력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망치고 있는가에 경종을 울린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사법고시에 합격해 고속승진 끝에 검사장에 오른 인물, 누군가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배우가 자신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인물이 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해 정우성의 이야기를 옮긴다.  

더킹

◆ "내가 역사야, 이 나라고!"

"시나리오 처음 읽었을 때 대한민국의 가장 강력한 조직을 풍자해서 마음에 들었다. 용기 있는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영화를 준비할 때는 용기가 필요했겠지만, 배우의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조심스럽지는 않았다.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늘 정권마다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때마다 바로잡지 못했고, 바로잡을 의지도 없어 보였다. 문제의식을 던질 수 있는 것도 영화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느 순간, 선배가 되고 기성세대가 되어가고 있더라. 지금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후배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나에게는 바람직한 작품이었다"

정우성은 '더 킹'의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의 용기에 매료됐다고 했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력 집단을 해부하고 풍자하는 과감한 이야기가 흡입력 있게 다가왔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시대를 관통한 정서, 사회의 불합리함을 유쾌하게 그려낸 능수능란한 솜씨가 영화를 선택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 문제의식을 제시하는 영화니까 어려울 수 있었는데 감독이 톤앤매너를 잘 정했다. 관객들이 마당극을 보듯이 풍자와 해학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가 연기한 '한강식'은 '한강 스타일'을 축약한 이름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은유된 한국 근현대사의 불도저식 성장이 낳은 부패의 아들인 셈이다.

한강식은 "내가 역사야. 나라고!"라고 조무래기들에게 설파한다. 자신이 역사고 왕이라는 오만으로 똘똘 뭉친 인물을 정우성은 기대 이상으로 매끄럽게 연기했다. 자신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캐릭터를 능글맞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잘 쌓아야 잘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건 "품위 있는 척하는 천박함"이었다. 

더킹

한강식의 스타일은 내면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중요했다. 정우성은 "의상. 머리 모양도 중요했지만, 목소리와 말투가 중요했다. 굉장히 유연한 척하는 말투, 리듬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자기를 포장하고 위장하는 사람의 유창함과 능수능란함은 펜트하우스 연설신에 녹아냈다고 설명했다.

정우성은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자들은 지저분하다. 그 지저분함을 무너뜨리기까지는 화려한 유리의 성을 쌓아야 했다. 굉장히 그럴싸하게 멋들어지게 노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강식은 태수(조인성)에게 모멸감을 준다. 역사 공부를 하라고 훈계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한강식은 삶을 어떤가. 현실의 부조리함에 기승해 자신의 성공을 일궈오지 않았나. 비단 한강식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현실에 타협하고 편승할 때가 있다. 그 연설을 통해 씁쓸함을 주고 싶었다"

◆ "상고 나온 새끼가 어디…"

'더 킹'에서 가장 짠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영화 중반부 정권 교체를 알리는 투표 결과가 나왔을 때다. 전략부 검사들은 조바심을 내며 개표 방송을 TV로 지켜본다. 출마 당시 눈여겨보지 않았던 족보 없는 인권 변호사의 승리로 끝나자 그들은 "어디 상고 나온 새끼가..."하고 분노를 표출한다.

이 장면은 감독의 상상력으로 완성된 픽션이지만, 관객에게 엘리트 의식에 찌든 검사 세계의 단면을 본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故 노무현 대통령이 재직 시절 민주평통상임위 연설에서 "저 난데없이 굴러들어 놈"이라는 자조섞인 표현을 쓰며 주변의 왜곡된 시선에 울분을 토했던 모습도 오버랩 된다.

정우성의 언변은 두서없지만, 귀를 갖다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최근 몇 년간 다양하고 새로운 작품 선택을 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는 정우성은 폭넓어지는 작품 선택만큼이나 인문학적 소양 역시 깊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에 대해 "표면적 이해보다는 내면적 해석에 신경을 쓰려고 한다. 생각을 단순하게 하려고 하지 않고 깊게 들여다보고 내 생각도 의심을 하려 한다. 모든 것은 다 관심에서 시작된다. 관계도 그렇고, 자기 성찰도 그렇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우성은 '더 킹'을 선택한 것에 대해 주저함이 없었다. 선택 당시만 하더라도 이 영화의 짙은 풍자색 때문에 출연을 말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는 "내가 '누구 나와'라고 했을 때 위험한 거 아니냐는 말들이 나오면 그런 확신이 든다. 나를 지켜주는 건 날 바라보는 대중이라는 거. 날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욱더 자신 있고 힘 있게 나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우성

◆ "정치란 말이야. 당한 것에는 보복을 해야지"

"정의를 이야기하는 게 정치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상식선의 이야기를 정치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규정짓는 건 표현을 위축시킬 수 있다. 학교에서 타인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나. '더 킹'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 같이 사는 공동체에서 인간의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영화일 뿐이다"

정우성은 자신의 최근 발언과 행동에 대한 과장된 칭찬을 경계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데 사이다 발언으로 표현할 정도로 사회적 분위기가 경직돼 있었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의지를 많이 꺾어놓은 상태지 않나.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건 내가 철들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웃음) 그 타협이 무엇을 위한 타협인지, 얼마나 정당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쪽팔리잖아요"

동시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무대인사를 하면서 '더 킹'이 던진 순수한 질문, 문제의식을 되새겼다. 영화의 완성은 관객, 민주주의 완성은 국민이 해준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멀고, 정치인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우리 영화에서도 말하지만 주인의식, 주인이기 때문에 일할 사람을 뽑는 거다. 투표는 우리의 주인을 뽑는 게 아니라 우리를 대변할 사람을 뽑는 것이다. 그래서 그 권리를 잘 행사했으면 좋겠다"

정우성

정우성의 차기작은 남북문제를 다룬 '강철비'(감독 양우석)이다. '더 킹'에 이어 다시 한 번 용기 있고 의미 있는 선택을 한 셈이다.

"이런 소재의 영화가 거듭 기획되고 제작되는 건 표현에 대한 갈증이 쌓이고 쌓여서 된 것으로 생각한다. 영화의 장르 확장, 소재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영화인들도 한 국민으로서 세상의 불합리함을 해소할 방법을 찾은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정우성에게 삶의 낙을 물었다. 그는 "오늘이 삶의 낙"이라고 답했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한 발버둥은 그를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그리고 의미있게 만든다. 

"난 흥을 즐긴다. 어릴 때 아무것도 없이 사회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씩 뭔가를 성취해 나갔을 때 너무 신났다. 신난다는 건 좋은 에너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기분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게 사회 분위기기도 했고. 신바람을 다 같이 나눌 수 있는 그런 시기가 빨리 오길 기다린다"

ebada@sbs.co.kr

<사진 = 아티스트 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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