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 '조작된 도시' 박광현 감독의 유의미한 실험과 성취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2.23 14:48 조회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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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현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테이블 위에는 맥북이 켜져 있었다. 그 공간이 인터뷰를 위한 장소라는 것만 인지하지 않는다면 박광현 감독의 개인 사무실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기자가 의자에 앉기 전까지도 감독의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돼 있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광현 감독은 테이블 위에 컴퓨터를 올려둔 것에 대해 "실시간으로 기사가 전송되고 댓글이 달리는 세상이니 나 역시 실시간으로 반응을 확인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맥북을 닫으며 대화의 장을 열었다.

12년, 영화 '웰컴 투 동막골'(2005) 이후 두 번째 영화를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데뷔작으로 800만 흥행 신화를 쓴 박광현 감독은 당시 영화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었다.

차기작은 '권법'으로 내정됐다.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는 모험에 가까운 SF 영화였다. 갓 제대한 조인성은 일찌감치 출연을 확정했다. 그러나 제작이 수월치 않았다. 박광현 감독은 다른 선택지를 찾아야 했다. 그때 만난 영화가 '조작된 도시'(감독 박광현, 제작 티피에스 컴퍼니)다.

조작된 도시

'조각된 남자'라는 제목으로 몇 년간 충무로에 표류했던 시나리오는 박광현 감독을 만나며 제작의 물살을 탔다. 초고는 한 남자에게 포커싱 돼 있었고 선혈이 낭자한 19금 복수극이었다. 박광현 감독은 작품의 초점을 인물에서 세계로 확장했고, 이야기 톤 역시 루저들이 만드는 희망으로 따뜻하게 바꿨다. '웰컴 투 동막골'을 함께했던 파트너 정태성 대표(현 CJ엔터테인먼트 영화사업부문 대표)가 뒤를 받쳤고 지창욱, 심은경 등 젊은 피가 수혈됐다.

"이번 영화는 작정하고 젊은 세대들을 타겟팅했다. 주인공들의 꿈과 낭만, 패기를 그려 10~20대 관객들이 재밌어할 영화를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젊은 배우들이 나온다고 젊은 영화가 아니다. 그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인물을 바라보는 게 중요했다"

'조작된 도시'는 단 3분 16초 만에 살인자로 조작된 남자가 게임 멤버들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며 짜릿한 반격을 펼치는 범죄액션영화. 게임을 차용한 소재와 만화처럼 펼쳐지는 세계에 대한 호불호는 뚜렷했했다.

제작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다. 박광현 감독은 "게임을 도입한 순간 반대가 너무 심했다. '말이 안 된다', '유치하다' 등 비판도 많았다. 어떻게 설득했냐고? 열정과 패기로.(웃음) 마냥 투자해 달라고 떼쓰는 게 아니라 내 나름의 전략과 비전을 가지고 설득했다. 다행히 허락을 해주시더라"고 말했다. 

남자 주인공 캐스팅은 투자사와 배우 모두 주저하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박광현 감독은 "투자사에서는 지창욱이 영화계에서는 검증되지 않았다고 반대했고, 배우는 시나리오의 낯섦과 실험성 때문에 주저했다. 양쪽을 설득하는 과정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전했다.

조작된 도시

"어떤 감독은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다고 하던데 난 아니다. 배우의 내면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만든 뒤 배우를 찾는다. 권유라는 인물을 만들어 놓고 가장 어울릴 만한 배우는 찾고 있었는데 TV에서 지창욱을 봤다. '조작된 도시'는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데 지창욱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어떤 비현실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눈망울이 아주 순수해 보인다. 딱 맞다고 생각했다"  

판단은 옳았다. 지창욱은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관객을 사건에 끌어들였다. 하루아침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권유의 억울함과 분노,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동료들과 의기투합할 때의 에너지는 생동감이 넘쳤다. 

박광현 감독의 불친절한 디렉팅은 지창욱을 힘겹게 하기도 했다. 세밀한 디렉팅을 통해 원하는 연기를 뽑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상황을 제시하고, 배우의 반응을 카메라에 담은 식이었기 때문이다.

"많이 힘들었을 거다. 어려운 신을 앞두고도 어떤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너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볼 거야', '예쁜 얼굴은 싫다. 만들어진 이미지를 없애고 민낯을 보여달라'는 모호한 주문을 하곤 했다. 매 순간 최소한의 것만 던져놓고,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 들게끔 했다. 그게 권유가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조작된 도시

영화가 공개된 후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의 신선함과 속도감 넘치는 액션에 대한 호평은 쏟아졌다. 무엇보다 실험이나 도전은 찾아볼 수 없는, 흥행 공식에 끼워맞춘 기획 영화가 주를 이룬 한국 영화계에 참신한 에너지로 가득한 상업영화가 등장했다는 반응이었다.  

한편으론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적잖았다. 박광현 감독은 "스스로 이야기의 개연성을 엄청나게 따지는 편이라, 그런 평가는 좀 속상했다"고 운을 뗐다.


"개연성은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여울(심은경)이나 데몰리션(안재홍)이 게임 안에서 권유(지창욱)가 리더였다고 현실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 사람들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다양하게 반응하는데 판단의 기준은 본인이다. 영화에서 권유를 도와주는 사람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뭔가 하나씩은 컴플렉스와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다. 현실 세계에선 부딪히고 상처받은 영혼들이지만 온라인 세상 안에서는 서로 끈끈한 우정과 유대감을 쌓고 있다. 어떤 상황의 감정에 잘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다. 그런 차이를 고려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개연성 지적은 모니터 시사 때부터 감지됐다고 했다. 그러나 박광현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밀고 나갔다.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르고 감흥도 다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은 모니터 시사회 때 어느 정도 예측했다. 150명의 예비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출구 조사를 했다. 개연성에 대한 지적도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덕인 신선함과 스피드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 의도가 통하는구나' 생각했고, 그부분을 집중해 영화를 잘 다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박광현

공백기 동안 한국 영화계의 흐름과 대중들의 기호를 분석하는 일도 놓지 않았다. 최근 한국 영화를 형성하고 있는 일련의 트렌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선을 내놓기도 했다.

"최근 한국 영화는 비열하고 독한 세상,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마찬가지로 리얼 베이스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배우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유튜브에 외국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보고 쏟아낸 반응을 모아둔 영상물이 있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한국 관객들은 감정을 세고 강하게 연기하는 배우를 최고라 한다"는 것이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영화도 표현은 사실적으로 해야 좋아한다. 요즘 한국 영화의 메인 타겟층은 30~40대인데 10~20대 관객도 그 영화를 같이 소비한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그래. 인생은 X 같은 거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난 세대별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방식이 다르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다 노인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나는 젊은 관객들을 위한 청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꿈과 패기, 낭만과 희망이 있는 영화 말이다. 다수가 비현실적이라고 해도 '조작된 도시'를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고 싶었다. 젊은이가 나온다고 청춘 영화가 아니라, 어른의 시각으로 만든 청춘 영화가 아니라, 그 친구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는 전국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박광현 감독은 자신의 비전과 방향성을 믿고 지지해 준 정태성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웰컴 투 동막골'의 제작 주역과 연출 주역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십 년을 훌쩍 뛰어넘었다. 정 대표는 박광현 감독의 차기작이 지연되고 있을 때도 격려를 아끼지 않은 고마운 존재다. 그런 만큼 12년 만에 나온 박광현의 신작에 대한 감회도 남달랐을 터.

"정태성 대표는 우리 영화가 캐스팅과 투자가 가능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이 주셨다. 비즈니스맨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치를 가지신 분이다. 또 텍스트만 가지고도 조감도를 그리실 수 있는 사람이다. 영화를 본 뒤 감격적이라고 하시더라. 진심으로 재밌게 봤다면서 "이 정도 결과물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용기 내도 돼"라고 하셨다. 아마 속으로는 '아휴...저거 12년 동안...' 하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까 싶다.(웃음)"

조작된 도시

40대 후반의 나이지만 몸 속엔 10대의 소년이 사는 듯했다. 특히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망, 표현 방식의 도전에 대한 열의는 놀라웠다. 무엇보다 획일적이고 고착화된 충무로의 환경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박광현 감독에겐 여전히 영화가 꿈의 영역에 있는 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어린 시절 추억 한 장을 펼쳤다. 

"어렸을 때 집이 가난했다. 간식 하나 사 먹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도 내 기준에서 영화 티켓은 싸다고 생각했다. 장난감 안 사고, 간식 안 사먹으면서 열심히 돈을 모아 극장을 가곤 했다. 그때 본 영화들이 '슈퍼맨', '태권 브이' 같은 영화다. 그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로봇이 날아다니고, 슈퍼맨이 적을 무찌르는 모습은 꼬마가 보기엔 엄청난 충격이고, 즐거움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이 판타지를 나도 누군가에게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던 것 같다. 이처럼 영화라는 게 누군가에겐 되게 멋진 모험이고 판타지다. 그래서 창작자들은 다채로운 작품을 관객들에게 선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앞으로의 방향성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박광현 감독은 "재미난 영화를 할 것이다. 잰척하거나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한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 재미로 가득한, 영화적 충격을 선사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영화라도 그렇지 않다면 우리네 현실이 너무 팍팍하지 않은가"라고 웃어 보였다.

기꺼이 응원하고 싶은 비전이었다. 

ebada@sbs.co.kr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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