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영화 스크린 현장

[김지혜의 논픽션] 김민희, 일단 연기만 보자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3.17 11:23 조회 2,544
기사 인쇄하기
밤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로만 관심과 집중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베를린영화제 참석 당시, 무엇보다 기뻤던 건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들이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민희는 한국 배우 최초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지난 2007년 전도연이 영화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10년 만에 날아온 낭보였다.

그러나 앞선 전례의 여배우들과 달리 수상 관련 기자회견도 열지 않았고, 문화훈장도 받지 못했다. 영화제 폐막 후 10여 일이 지나 조용히 입국했다. 

지난 13일. 김민희와 홍상수 감독은 베를린 수상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 언론시사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민희는 영화로만 관심과 집중을 받는 것을 '바람'이라고 표현했다. 배우가 신작을 내놓고 작품과 연기로 평가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러나 지금 김민희에겐 당연한 것이 아닌 '바람'이 되었다.

이 자리 역시 두 사람의 '관계'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 영화에 관한 평가는 뒷전이었다. 그렇게 베를린영화제 수상작은 대중과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불륜 논란을 차치하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이제 막 당도한 두 사람의 신작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베를린영화제는 무엇 때문에 김민희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는지 깊고 넓게 들여다볼 때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현실과 영화의 구분이 모호해 보이는 연기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 왜, 무엇 때문에 베를린은 김민희의 연기에 반했을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

◆ '사랑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할까'…김민희의 탁월한 자기분열 연기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오롯이 김민희로 완성된 서사다. 김민희의, 김민희에 의한, 김민희를 위한 이야기다.

1부는 함부르크에서 시작된다. 영희(김민희)는 시장, 공원, 집, 해변 등을 오가며 친한 언니 지영(서영화)과 헤어진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영희는 그 남자가 자기를 찾아 독일로 오겠다고 했지만,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사랑 그 후, 영희의 모습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녀의 말과 행동을 통해 마음을 보여준다. 사랑 후 남겨진 상처와 떠도는 외로움, 상대의 존재에 대한 환영과 허상에 관한 이야기를 영희를 통해 표현해냈다.

2부의 공간은 강릉이다. 영희는 독일에서 귀국해 바다를 끼고 있는 지방을 찾았다. 오래된 영화관에서 홀로 영화를 보며 눈물짓는다. 영희는 극장을 나서다 선배 천우(권해효)를 만난다.

그를 따라다니다 명수, 준희를 잇따라 만나고 함께 술을 마신다. 이들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잃은 영희를 동정하고, 위로하며, 질타하고, 충고한다. 영희는 자신을 둘러싼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사람들 사이에서 내면의 상처와 분노를 드러낸다.

"사랑을 못한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비겁하고 진짜에 만족하면서 다 좋다고 살고 있다" 
"사랑을 못하니까 사랑에 집착하는 거잖아요. 그거라도 얻으려고"

그러면서 사랑의 의미와 자격에 대해 성토한다. 영희는 아직도 사랑이 어렵고 그래서 더 알고 싶다.

밤

베를린영화제에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본 할리우드 리포터는 "김민희는 시종일관 관객을 깨어있게 한다"고 호평했다. '버라이어티'는 "영화가 보여주는 면밀한 진지함은 상당 부분 김민희의 빼어난 연기 덕분이다. 제2부에서 극대화되어 드러나는 내면의 고통을 그녀는 거친 언어로 섬세하게 이끌어낸다"고 극찬했다.

'깨어있는 연기', '거친 언어' 등 연기의 형태와 형식에 관한 외신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영화 속 김민희의 연기는 이제껏 봐온 김민희의 연기와도 다르고, 홍상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과도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김민희의 연기는 시종일관 예민하고 날카롭다. 때때로 광기를, 때때로 연민이 느껴지는 감정의 높낮이를 넘나든다. 처연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최근 김민희를 향한 대중의 비난과 질타가 계속되면서 수상 자체를 깎아내리는 여론 역시 적지 않다. 일부의 대중들은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무슨 연기냐"고 수상의 정당성에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은 배우에 대한 모독이다. 인간 군상을 몸과 감정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전위예술가이며 감정노동자다. 유사 체험을 했고, 그와 비슷한 이야기와 캐릭터를 연기로 표현한다고 해도 모두가 뛰어난 배우일 수는 없다.

배우는 인간 복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인 동시에 고도로 훈련된 기술자기도 하다. 배우가 인간의 행위와 감정을 연기하는데 쏟는 노동과 노력의 강도는 쉬이 폄하할 수 없다. 김민희는 자신의 삶을 드러내 평가받은 게 아니라 고도의 기술과 표현의 완성도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밤의

◆ 홍상수의 공간과 사람, 그리고 사랑의 제언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 감독의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지난 2011년 김기덕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낸 영화. 이 작품은 그해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아 대상을 탔다.

홍상수 감독은 신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형식과 언어로 풀어냈다. "늘 홍상수는 자기 반영의 결과물을 내놓았다"라고도 할 수 있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개인적 디테일을 사용해 전체를 창작하는 기존의 작업 스타일과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개인적 이야기를 창작의 밑바탕으로 깔고, 자신만의 형식적 디테일로 풀어냈다.

이제는 대다수의 대중이 알아버린,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현실과 중첩돼 보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영화적 세계에 끌어들이는 위험한 도전을 한 셈이다. 아무리 예술의 외피를 두르고 있어도 "자기변호와 항변일 뿐"이라는 곱지 않은 시각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는 홍상수 감독에게 큰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공간과 사람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같은 공간과 동선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공간과 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리듬과 인물 간 접합과 분열의 파열음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다.

함부르크가 영희의 외로움에 침전하는 공간이었다면, 강릉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인들과 충돌하며 현실의 고단함을 알알이 느끼는 공간이다. 유부남 영화감독과의 연애 후 모든 것을 잃은 여배우 영희에 대한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개입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누군가가 규정하고, 평가하는 상황, 무엇보다 사랑이 끝나고도 의문만 남은 그 사랑 때문에 괴롭다.

두 도시는 모두 해변을 끼고 있다. 해변은 자기 분열적 상황에 놓인 영희를 품는다. 영희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거나 해변에 누우며 잠시의 안락을 느낀다.

홍상수 감독은 "해변은 마음속의 것들이 생생하게 현현하는 곳이고, 그리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해변의 여인'이나 '다른 나라에서'와 같은 최근작에서도 해변은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 바 있다. 

밤

영화 후반부, 영희는 영화감독 상원(문성근)과 재회한다. 김민희와 홍상수의 환영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역시 사랑의 역사와 진통이 영화에 고스란히 배어있다고 느껴진다.영화는 영희와 상원의 이별 이후의 상황부터 진행되지만 영희가 겪는 고통은 현재 진행형으로 보여준다.

상원 역시 영희에 대한 애정과 죄책감을 밝히면서도 "내가 정상이 아니야. 후회해. 근데 후회의 달콤함에 빠졌어"라는 모순의 말을 이어간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GV 당시 홍상수 감독은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죽어도 된다. 안달하지 말자. (중략) 두려움보다는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 많이 한다.”

당시 그를 지배했던 생각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투영된 듯하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사랑의 발화와 소멸 그리고 삶과 죽음의 그림자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연작으로도 여겨질 수 있지만,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이은 사랑을 향한 홍상수 감독의 제언과도 같은 영화다.

ebada@sbs.co.kr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