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 권율, 강정일에게 전하는 마지막 '귓속말'

강선애 기자 작성 2017.06.01 10:41 조회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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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순정만화에 나올 법한 반듯하고 잘생긴 외모, 배우 권율은 '밀크남'이란 신조어가 딱 어울리는 남자다. 이런 그가 선 굵기로 유명한 박경수 작가의 드라마에 악역으로 출연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놀라웠다. 3개월이 지나 인터뷰를 위해 권율과 마주한 자리에서, 처음 캐스팅 소식을 접했을 당시의 의아했던 마음이 불현듯 떠올랐다.

권율은 최근 종영한 SBS '귓속말'(극본 박경수, 연출 이명우)에서 강정일 역을 맡아 열연했다. 강정일은 목에 핏대 세우고 화만 내는 전통적인 악역도, 살인에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요즘 유행(?)하는 사이코패스 형태의 악역도 아니었다. 선과 악이 공존했고, 세련된 수 싸움과 절제된 섹시함이 돋보였다. 극이 치닫을수록 더욱 치밀하게 반격을 준비하는 그의 꾸준함과 성실함은, 묘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있었다.

“악은 성실하다”는 극 중 대사가 잘 어울렸던 악역 강정일. 그가 이토록 매력적이었던 건 캐스팅 당시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훌륭한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준 권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정일 못지않게 권율도 성실했다. 치열하게 캐릭터를 분석했고, 꾸준하게 제작진과 상의하며 캐릭터를 잡아나갔다. 그렇게 권율 표 악역, 근면한 악인 강정일이 탄생했다.

'귓속말'이 종영하고 이제 강정일을 떠나보내야 할 시간. 악인이라 할지라도 강정일을 좋아했고 아꼈던 권율을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권율

Q. '귓속말'이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소감이 어떤가.

권율: 감사하다. 배우가 수치에 영향을 많이 받으면 안 되지만, 어찌 됐든 20%라는 시청률은 고생한 스태프들, 배우들, 이 작품에 참여한 많은 분들한테 조금이나마 보상이 된다. 그게 행복하고 기쁘다. 사랑해주신 시청자에게 감사하고, 한편으론 굉장히 홀가분한 느낌이다.

Q. 브라운관에서도 보였는데,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권율: 이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살을 조금 빼고 시작했다. 5kg 정도 뺄 생각이었는데, 6~7kg이 빠졌다. 너무 빠지니 체력적으로 힘들더라. 연기를 끝까지 집중도 있게 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번에 많이 했다. 이제 음식도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다시 살 좀 찌려 한다.

Q. 그렇게 살이 많이 빠진 건, 캐릭터를 소화하는 데 있어 감정적 소모가 컸기 때문인가.

권율: 아무래도 그렇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도 많았고, 감정의 높낮이도 컸다. 한 회차 안인데도 감정이 바닥을 쳤다가 굉장히 분노했다가, 그런 게 많아 힘들었다. 또 감정이 화면을 뚫고 나가 시청자에게 전달되려면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열 배 스무 배 훨씬 더한 감정으로 표현해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기에, 계속 그 감정에 집중하려다 보니 쉽지 않았다.

Q. 감정의 진폭도 큰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를 따라가야 해서 더 힘들었겠다.

권율: 당연히 힘들었다. 강정일이 다음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강정일이 활개치며 '와 신난다. 내가 이겼지?' 했는데, 이내 신영주(이보영 분)-이동준(이상윤 분), 혹은 최수연(박세영 분)-최일환(김갑수 분))에게 당해버린다. 그럼 내가 다 창피하다. 배우도 사람인지라, 뒤에 또 당할 수 있으니 앞선 연기에서 그걸 의식하고 하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귓속말'의 다른 배우들도 아마 그 부분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럴 땐 이명우 감독님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다. 배우가 힘들어할 때마다 굉장히 세심하게 대화를 나누며 중심을 잡아주셨다. 배우가 캐릭터만 본다면, 감독님은 숲을 본다. 전체적인 그림을 잘 봐주는 감독님 덕분에 두려움 없이 온전히 날 다 던질 수 있었다.

권율

Q. '추적자 THE CHASER'을 시작으로 '황금의 제국' '펀치'까지, 박경수 작가의 작품은 선 굵은 남자들의 이야기인데도 시청률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이번 '귓속말'은 전작들에 비해 '약했다'는 일부 평가가 있는데?

권율: 내가 객관화시킬 수는 없지만, 박경수 작가님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귓속말'도 굉장히 재밌었다. 이번 작품은 박경수 작가님의 전작들과 장르는 비슷하지만 톤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멜로가 적었다면, 이번엔 '어른멜로'라는 축이 있었다. 박경수 작가님의 장르물에 열광했던 분들은 멜로가 한 축을 담당하는 게 낯설게 느껴졌을 거다. 전작들과 주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다를 뿐 똑같은 퀄리티의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박경수 작가님의 작품들을 갖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다.

Q. 박경수 작가 특유의 세태를 풍자하는 묵직한 대사들이 이번 '귓속말'에서도 돋보였다. 이를 전달하는 배우 입장에선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권율: “악은 성실하다, 악을 잡으려면 더 성실해야 한다”와 같은 주옥같은 대사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런 대사를 쓸 수 있는지, 작가님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굉장히 문학적이고 힘 있는 대사들이라, 연기자들도 허투루 연기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대사의 뜻을 잘 전달하고 있을까, 작가님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을까, 늘 생각했다. 연기적으로 아직 역량이 부족해 어려웠지만, 작가님의 내공에 감탄하며 잘 연기하려 애썼다.

Q. 엔딩을 보면 강정일이 교도소 안에서 열심히 몸을 만들며 눈빛을 빛내더라. 강정일이 복수를 다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엔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권율: 이 드라마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죄를 지은 자들은 죗값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이다. 강정일의 엔딩도 거기에 반하는 게 아니었다. 교도소에서 4년의 시간을 보내며 강정일 나름대로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 있었을 거다. 그 시간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앞으로 옥에서 나가 자신이 마주할 새로운 삶에 대해 강정일답게 준비하는 모습이라 생각해달라. 그 신을 촬영하며 감독님과 많이 상의했다. 강정일이 드라마틱하게 밝은 얼굴로 수감 생활을 하고 교화된 삶을 살고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허구일 것 같았다. 그 장면을 잘 보면, 강정일이 바라보는 아버지 사진 밑에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쌓여있다. 강정일이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지만 부칠 용기는 못 냈을 것 같다는 설정에서였다. 그런 디테일한 부분이 시청자에게 잘 전달되진 않았겠지만, 짧은 신 안에서 강정일다운 반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마지막 컷이다. 시즌2의 복수극이 시작되는 거 아니냐 하는데,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권율

Q. 악역인데도 불구하고 '섹시하다', '스마트하다', '연민이 생긴다' 등의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

권율: 우리 드라마 팀이 다 고생한 가운데 '너도 고생했다'는 칭찬 같다. 박경수 작가님은 강정일에 대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물이다. 기능적으로 악의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 앞에 방해가 되는 것들에 대해 강정일의 방식대로 싸우는 거다. 악역이라 생각하지 말고 연기해주면 좋겠다”라고 조언해주셨다. 감독님도 “눈에 핏대 올리는 악역이 아니다. 냉소적이었다가 편하게 풀어지기도 했다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채롭게 변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작가님, 감독님의 말을 쫓아가려 했다. 단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캐릭터라, 시청자가 '섹시하다' '연민이 간다' 같은 말을 해주신 것 같다. 모두 감독님과 작가님의 덕이다.

Q. 강정일이 가장 나쁘게 보였던 순간은 연인 사이였던 최수연과 진흙탕 싸움을 할 때였다. '사랑과 전쟁'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권율: '귓속말'에는 '어른 멜로'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그 '어른 멜로'라는 건,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시작하는 멜로가 아닌,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남녀관계라 생각한다. 이동준과 최수연의 정략결혼이 그랬고, 신영주와 이동준의 첫 만남도 서로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는 이해관계였다. 강정일과 최수연도 사랑이라 생각했지만, 보국산업과 태백의 이해관계가 바탕이 됐을 거다. 이런 게 '어른 멜로'가 아닐까. 이해관계로 시작한 사랑이라면, 그 이해관계가 끊어질 경우 더 빨리 무너지고 더 무섭게 돌아서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강정일과 최수연도 서로서로 더 악하게 물고 뜯을 수 있었을 거다.

Q. 강정일이 성실하고 치열한 악역이었다면, 권율은 그런 강정일을 성실하고 치열하게 분석해서 연기한 것 같다.

권율: 매 순간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내가 더 치밀하고 치열하게 하지 않는다면, 강정일의 불안정성을 내가 잘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불안함과 벼랑 끝에 선 심정의 연속이었다.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작품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내가 무너지는 것 같은 힘든 작업이었다. 순간순간 두려웠던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스스로의 의심을 뒤엎고 처음 먹었던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끝까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고민했다. 잠도 잘 못 잘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다른 작업들보다도 더 예민하고 절박하게 임했던 것 같다. 그 시기가 나한테는 고3 수능 보듯이 치열한 시기였다.

Q. 강정일에게 '근성'이란 것을 배운 것인가.

권율: 배우로서 강정일처럼 갔으면 좋겠다. 물론 범법적인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근성과 끈기로 몰두하는, 그런 것 말이다. 나도 배우로서 끝까지 목표를 향해 가고 싶다.

권율

Q. 데뷔한 지 10년이 됐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어떤가?

권율: 이렇게 계속 연기하고 있다는 게 굉장히 감사하다.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자랑스럽다. 당시엔 왜 나한테 기회가 오지 않을까 낙담했고, 빨리 힘든 시간이 지나가면 좋겠다고 여겼다.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내게 무기가 됐고,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지난 10년이 '나란 배우의 가능성을 알아달라' 하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10년은 그 가능성을 내가 어떻게 신뢰로 발전시키는지 지켜봐 달라.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

Q. 장르나 캐릭터에 제한 없이 다양하게 도전하고 있다. 작품 선택 기준이 있나?

권율: 내가 좀 힘들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도전하고 싶단 생각이 강하다. 안정성, 캐릭터의 연속성이 있는 캐릭터들보단, 내가 엎어지고 다치기도 하며 극복해내야만 하는 것들, 그런 작품을 하고 싶다. 배우가 어떤 작품을 만나는 건 큰 인연이다. 주어지는 대본, 캐릭터, 시기, 작가-감독과의 소통 등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삐끗하면 만나기 힘들다. 그래서 작품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한다. 도전 욕구가 생기는 작품을 선택하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게 오는 작품들 모두가 소중하다.

Q. 이번에 감정소모가 큰 캐릭터를 맡아서, 차기작은 좀 말랑말랑한 캐릭터를 하고 싶지 않나?

권율: 그렇다. 오랜만에 재밌게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또 반대로, 이번에는 감정노동이 아니라 액션물같이 육체노동이 심한 작품을 하고 싶기도 하다.

Q. '귓속말'과 강정일을 완전히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마지막으로 내 모든 것을 바쳤던 강정일에게 한마디 한다면?

권율: 정일아, 네가 목표를 향해 가는 모습은 멋지고 훌륭해. 하지만 그 안에서 조금 더 남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리더가 되면 좋겠다. 그들을 다독이고 설득하면서 말이야. 넌 목표하는 곳에 어느 방식이든 가게 될 사람이니, 송곳 같은 리더가 아니라 모든 걸 다 담을 수 있는 그릇 같은 리더가 되면 좋겠다.

[사진=김현철 기자 khc21@sbs.co.kr]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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