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영화 핫 리뷰

'엘르',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심연의 스릴러(리뷰)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6.15 17:39 조회 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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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엘르'(감독 폴 버호벤)는 예상을 뛰어넘는 연기와 연출로 인간의 심연을 투영한다. 성공한 여성 CEO, 매력적인 이혼녀, 범죄자의 자식 등 사회적 편견을 딛고 살아가던 한 인물이 뜻밖의 사건을 통해 내면의 트라우마를 주체적으로 극복해나가는 흥미로운 성장담이기도 하다.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성공한 게임회사 CEO. 남편과 이혼한 뒤 고양이 마티와 살며 당당한 싱글라이프를 영위하고 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복면을 쓴 괴한이 침입한다. 미셸은 끔찍한 봉변을 당하지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괴한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보이지 않는 위협을 가한다. 미셸은 공권력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복수를 준비해나간다. 

영화는 주인공 주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평화로운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러나 정작 사건에 맞닥뜨리는 인물은 놀라우리만치 의연하게 대응해나간다. 

'엘르'는 대부분의 스릴러가 '범인 쫓기'를 통해 서스펜스를 강화하고 '범인의 정체'를 통해 갈등을 조성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런 기괴한 리듬감은 어딘가 뒤틀리거나 모자란 인물과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셸은 친구의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젊은 남자와 결혼을 준비하는 노모를 경멸한다. 하나뿐인 아들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친구에게 쩔쩔매며 엄마에게 손을 벌린다. 이혼한 남편은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져 질투심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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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의 가족은 사실상 해체됐다. 구성원들은 흩어졌고, 형식으로 엮일 뿐이다. 일반적인 윤리 규범을 가진 사람도 없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거나 연약하고 철없이 행동할 뿐이다. 블랙코미디처럼 보이는 이 분열된 가족상은 유럽 사회의 어떤 단면 나아가 현대 사회의 병폐를 집약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전하는 충격은 사건 자체가 아닌 사건 전후 인물의 행동과 심리 표현에서 드러난다. 특히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과 절제된 감정만을 표출하는 미셸은 그 자체가 미스터리다. 

이자벨 위페르는 자신이 연기한 미셜에 대해 "냉소적이고, 관대하고, 다정하고, 냉정하고, 칭찬할 만하고, 독립적이지만 한편으로 의존적이다"라고 정의했다. 상충할 수밖에 없는 성격으로 조합된 미셸은 명배우의 탁월한 연기력에 의해 영화적 매력을 머금은 인물로 재탄생했다. 

위페르는 인물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 하기보단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든다. 감독은 인물의 비밀을 제시하지만 미셸에 대해 더 많은 물음표를 가지게 했고, 그 물음표는 위페르의 다층적인 심리 연기에 의해 극대화된다.

미셸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멋진 커리어우먼의 내피를 쓰고 있지만 내면은 잔뜩 뒤엉켜 있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상처로 가득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는 그녀가 겪은 상처에 대해 무심하게 제시만 할 뿐 파헤치려 들지 않는다. 3인칭(Elle: 불어로 '그녀'라는 뜻)으로 쓴 제목에서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여러 사건에 의해 난타당하지만 꿈쩍하지 않은 그녀의 내면은 이미 오래전 산산이 부서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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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변을 당하고도 피해자처럼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함으로 가해자를 짓누르는 그녀의 모습은 충격을 넘어서 광기까지 느껴진다.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심연을 파고드는 '엘르'는 정신분석학적으로 탐구해봐도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다.

또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가해지는 여성에 대한 폭압도 끔찍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전진해나가는 '그녀'는 멋지다. 

'엘르'는 장인들의 내공이 느껴지는 영화다. 70대 후반의 노장 감독과 50대 중반 관록의 여배우는 최고의 연출과 연기로 인간의 심연을 파고든 품격있는 스릴러를 완성해냈다.  

'원초적 본능'과 '쇼걸' 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에 대한 깊은 탐구를 해온 폴 버호벤 감독은 '베티 블루 37.2'의 원작자 필립 지앙의 장편 소설 '오...'를 각색해 영화로 재탄생시켰다. 

성폭행 장면을 오프닝에 배치하지만, 전시적인 형태는 아니다. 오히려 놀랍도록 무미건조하게 그렸다. 일상의 평화를 깨는 교통사고처럼 말이다. 물론 성범죄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수위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감독은 이 장면을 인물이 숨기고 있던 트라우마를 깨우는 하나의 기폭제로 사용했다.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가해자에게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는 미셸의 미묘한 행동은 '스톡홀름 신드롬'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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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는 이자벨 위페르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어 탁월한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2001년 영화 '피아니스트' 이후 가장 강렬하고 압도적인 에너지로 대체 불가한 연기를 보여줬다. 

올해 초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생애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다. 세계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이자벨 위페르가 모국어(프랑스어) 영화로 미국 최고 권위의 시상식 후보로 올랐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다.

'엘르'를 보고 나면 진한 코냑 한 잔이 간절할 것이다. 독하고 어지러운, 그러나 중독성 강한 알코올 같은 영화다. 개봉 6월 15일, 상영시간 130분, 청소년 관람불가.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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