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①] '악녀' 정병길 감독, 액션과 서사 사이의 선택들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6.21 15:42 조회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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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길 감독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악녀'는 장점만큼이나 단점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호불호도 명확히 갈린다. 종합예술인 영화라는 매체에서 부분적 장점만 두드러지는 영화를 볼 때 만족도와 실망감을 엇갈릴 수밖에 없다.

'악녀'는 그런 영화다. 액션은 기존의 어떤 한국 영화보다 진일보한 결과물을 보여주지만, 서사는 퇴행을 거듭하며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거둬들인 성취에 대해 깎아내릴 수는 없다. 도전과 실험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충무로에서 '악녀'는 표현 방식과 수위의 경계를 허물며 액션이라는 장르를 한 단계 격상시켜 놓았다.

정병길 감독은 이 작품으로 제70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 해외 영화제 호평은 제작진에게 더없는 영광이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인증하는 마크가 될 순 없다. 그래서 그는 개봉 후 관객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는 비판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

호평과 혹평을 오가는 반응 속에서 '악녀'는 전국 관객 100만 돌파를 앞두고 있다. 액션과 서사 사이에서 정병길 감독이 한 선택과 그 선택의 이유를 들어봤다.

악녀

Q. 칸영화제 버전에서 7~8분을 덜어냈다. 어떤 부분을, 어떤 기준으로 편집한 것인가?

A. 전체 러닝타임에서 7~8분을 줄였다. 우선 오프닝 시퀀스에서 가장 많은 분량인 40초를 총싸움에서 덜어냈다. 그리고 중간중간 마가 뜬다고 생각한 부분, 반복적 대사를 쳐냈다. 칸영화제 출품 당시에는 작업할 시간이 촉박했다. 출품 후 꼼꼼히 편집 작업을 하면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걷어낸 것이다. 전체적으로 관객들이 좀 더 보고 싶어 할 때 끝내자는 마음으로 편집했다.

Q. 오프닝 시퀀스에 대한 칭찬이 압도적으로 많다. 1인칭 시점 샷의 롱테이크는 어떻게 착안하게 된 건가?

A. 예전에 VR 단편을 준비했었는데 그때 공부를 많이 했다. 3D 다음에 VR((Virtual Reality: 가상 현실)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준비했던 작품은 '악녀'의 오프닝 시퀀스처럼 한 사람의 시점을 가되, 남녀 두 가지 버전을 만들어서 관람자가 선택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지지는 못했지만 '악녀'를 작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Q. 여성 액션 영화, 현재 충무로에서는 과감한 시도다.

A. '내가 살인범이다'를 끝내고 나서 여자가 주인공인 액션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액션 영화는 많아도 여성 원톱 액션 영화는 잘 없지 않나. 그래서 더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투자배급사 NEW에서 "해보고 싶은 걸 해봐라"했고, 시나리오를 보여줬더니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내 경우는 투자배급사가 먼저 정해지고 시나리오를 썼고, 배우가 캐스팅되기 전에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했다.

Q. 투자배급사 NEW에서 전적인 신뢰를 해줬나 보다.

A. 그렇다. 크랭크인 날짜를 정해놓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A급 배우가 안 붙어도 간다라는 마음이었다. 지난해 10월에 첫 촬영을 시작해 6월에 개봉했으니 촬영부터 개봉까지 1년이 안 걸렸다.

정병길 감독

Q. 액션에 대한 큰 그림은 어떤 것이었나? 

A. 내가 봤을 때도 재밌고, 관객들도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카메라 앵글에서 찾았다. 우리가 보지 못한 앵글을 찾으려면 신기한 장면이 있어야 했다. '오토바이 바퀴 밑에 카메라를 넣고 찍으면 어떨까'. '핸드헬드 카메라를 들고 뛰면서 찍어볼까', '보닛 위에서 주인공이 차를 본다면 재밌지 않을까?' 이런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창작을 좋아하고 영화적 고민을 좋아한다. 앵글도 새로워야 하지만 액션의 합도 새로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앵글을 아무리 화려하게 만들어도 액션이 새롭지 않으면 비슷하게 보일 테니까. 머릿속으로 상상한 앵글과 실제로 카메라에 적용했을 때가 다를 수 있으니 다양한 변수에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갔다. 

Q. 김옥빈은 최적의 캐스팅이었다. 

A. "시나리오를 쓰고 나니 김옥빈이라는 배우가 들어왔다. 시나리오를 줬는데 그 자리에서 OK 하더라. 기대보다 훨씬 잘해줬다. 사람들이 액션을 잘한다고 칭찬했지만 김옥빈이라는 배우가 갖고 있는 매력은 연기에 있다. 얼굴이 가진 오묘한 느낌도 좋다."

Q. 배우들이 액션신을 연습할 때는 디지털 콘티를 활용했나?

A. 프리비주얼 작업을 했다. 애니메이션으로 가상의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 콘티는 할리우드에서 옛날부터 해온 방식인데 그것의 문제는 컷트바리가 들어갈 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편집에서 또 한 번 승부를 걸어야 하니까. '악녀'처럼 롱테이크나 원신 원컷이 많을 경우 프리 비주얼이 효과적이다. 그래서 예산의 몇천만 원 정도를 프리 비주얼 작업에 할애했다. 

Q. 촬영을 담당한 박종훈 감독은 좀 생소한 이름이다. 그래서 기존 상업영화와는 다른 창의적인 앵글이 나온 게 아닐까 싶다.

A.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 작업을 많이 하신 분이다. 상업영화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기존의 방식을 바꾸는데 반박이 적을 것 같았다. 크고 무거운 카메라로는 빠르게 액션 디테일을 잡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몇몇 고난도의 액션신은 카메라를 스턴트맨에게 양보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박종훈 감독이 욕심이 있어서 액션 스쿨에서 와이어를 타면서 촬영하는 연습을 하더라. 권숙(김서형)이 총을 쏘는 장면은 무술 감독이 카메라를 매고 찍은 것이다. 

악녀

Q. 촬영에서의 그런 선택으로 인해 B급 영화 느낌이 두드러져 보인 것 같다.

A. 그렇다. 속도감 있는 액션을 담기 위해선 작은 카메라를 썼어야 했다. 앵글도 과감하게 회전시키고, 조명도 빨간색을 많이 썼다. 한국영화에선 잘 안 쓰는 방식이다. 안정적으로 만든다고 잘되는 것도 아니고 모험이 다 실패하는 것도 아니니 다른 느낌으로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제약받았고, 안된다고 하는 것들을 다 뭉쳐서 만들었다.

Q. 다른 영화들을 레퍼런스 삼지 않고 독창적인 액션을 만들고자 했다고는 하지만, 몇몇 장면들에서는 기시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죽는 것을 침대 밑에서 괴한들의 발만 쳐다보는 숙희의 모습은 '킬 빌'이 떠오른다. 오프닝 시퀀스의 시점 샷 역시 '하드코어 헨리'의 테크닉과 비슷하다. 

A. 그 장면은 '킬 빌' 뿐만 아니라 많은 액션 영화에서 사용한 장면이다. 침대 밑에서 아빠가 죽는 장면은 어렸을 때 봤던 영화들에 많이 나왔고. 그 기억이 너무 좋았다. 그 장면을 언젠가 영화에 옮겨보고 싶었다. 어린 숙희에게 중상의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관객에겐 보여주는 건 어떨까 고민도 했다.

정병길 감독

Q. 이미지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키는 작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A. 학창시절에 미술을 해서 그런 것 같다. 이미지를 보면서 스토리를 떠올릴 때가 많다. '악녀'의 경우도 '캐리'(감독 로만 폴란스키)에서 여주인공이 피를 뒤집어쓴 장면에서 모티브를 얻어 숙희가 피를 뒤집어쓴 장면을 발전시켰다. 물론 두 영화는 다르지만, 이미지의 힘이랄까. 비슷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액션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기존의 무엇과도 섞이지 않는 느낌이길 바랐다. 관객들은 익숙한 이미지도 새롭게 꾸미면 다르게 생각하지만, 너무 낯설면 어려워하니 둘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 싶었다.

Q. 빼어난 액션에 비해 이야기가 전형적이다. 특히 살인 병기인 숙희가 일상생활에나 모성, 사랑의 감정에 있어 지나치게 수동적이라는 비판도 많은데?

A. 고민이 되는 지점이었다. 상영시간을 늘려서라도 드라마를 차곡차곡 쌓아 나갈지, 아니면 이야기 진행을 빠르게 하면서 설득력을 획득할지 등 우리끼리도 생각이 많았다. 2시간 28분 분량의 가편집 버전은 극장판과는 좀 다르다. 드라마 선과 인물관계가 보다 뚜렷하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숙희에 대한 중상의 감정선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난 영화가 끝난 뒤 물음표가 남길 원했고, 영화적 생략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만약 영화가 흥행한다면 확장판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다. 지금은 숙희의 영화 같은 느낌이 강하다면, 중상이 주인공인 듯한 버전도 만들어 보고 싶다. 

Q. 데뷔작 '우린 액션배우다'부터 '내가 살인범이다', '악녀'에 이르는 필모그래피 모두 액션 장르다. 액션 마스터로서의 지향이 뚜렷한 건가? 

A. 꼭 그런 건 아니다. 의외로 주성치가 나오는 코미디 영화도 좋아한다. 현장이 너무 힘들 때 코미디 영화를 찍으면 현장에도 엔돌핀이 돌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한다. 그런데 액션 영화는 찍을 때 주는 쾌감이 있다. 처음 이미지를 상상할때 이게 과연 영상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 의문을 갖다가도 결과로 나오면 짜릿하다. 또 액션 디자인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재미가 남다르다. '악녀'의 촬영을 마치고 나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더라.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때문에... 액션으로 보여줄 수 있는게 더 많이 있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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