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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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박열', 이제훈이 부활시킨 불량 청년의 영육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6.22 17:31 조회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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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글에서 사람을 보았다. 도발적인 한 편의 시를 읽었고, 글쓴이를 쫓았다. 이토록 당당하게 자신을 '개새끼'라 칭한 사람은 조선 청년 박열(이제훈)이었다. 

영화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영화 같은 만남을 오프닝에 배치한다. 그리고 배우들의 입을 통해 '개새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토해내게 만든다. 욕이라서 거부감이 들기보다는 한 인물의 캐릭터를 반영하는 절묘한 표현으로 느껴진다. 박열은 힘으로 나라를 빼앗고, 폭력으로 자유를 말살한 세상(일제 강점기)에서 '개새끼'가 되어야 했던, '개새끼'의 삶을 선택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1922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다. 일본 내각은 민란의 조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를 계기로 무고한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한 이른바 '관동 대학살'이 벌어진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두려웠던 일본은 사건을 은폐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불령사(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한인 14명과 일본인 5명 등을 규합해 만든 사상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던 대표적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박열을 비롯한 말 안 듣는 조선인들을 지칭하던 말) 박열을 지목한다.       

일본 내각의 계략을 눈치챈 박열은 그들의 끔찍한 만행에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스스로 황태자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대역죄인이 돼 사형까지 무릎 쓴 공판을 시작한다.

박열

박열은 아나키스트였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이념으로 제국주의가 가진 폭력성에 대해 분노하고 투쟁한 아나키즘 사상에 사로잡혔다. 아나키즘은 모든 제도화된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한다. 박열이 민족주의를 내세운 독립운동가들과 달랐던 점은 탈국가, 탈민족을 지향했으며,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의 가치관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에겐 개인의 자유가 최상의 가치였다. 

영화는 행동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박열을 주목한다. 뜨거운 가슴이 차가운 머리를 압도하는 박열은 책상머리에 앉아 독립을 모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제 강점기 배경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들이 시종일관 무겁고 뜨겁게 극의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박열'은 중반까지 밝고 유쾌하게 극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실존 인물의 캐릭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자유로운 영혼'이다.

타이틀롤을 맡은 이제훈은 뜨거운 에너지와 열정적인 연기로 박열의 영육((靈肉)을 스크린에 부활시켰다. 보는 이에 따라서 연기가 다소 과장돼 보인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것은 전에 없던 캐릭터를 보는 데서 오는 낯설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이야기는 실화며, 각각의 상황 또한 고증에 충실하다.

종전의 이미지를 뒤엎는 캐릭터로 오프닝에 등장한 후 극을 완전히 장악하며 전진해나간다. 이제훈이 영화 내내 보여주는 들뜬 에너지는 암흑의 시대와 대비를 이루며 흥미를 자극한다. '파수꾼', '고지전', '건축학 개론' 등 폭넓은 장르에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던 모범생 배우의 야수적 면모가 반짝인다. 

박열

'박열'을 타이틀롤로 내세운 영화지만,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이 되는 인물은 가네코 후미코다. 박열의 연인이기 전에 사상적 동지이자 조선 독립을 염원하는 이방인이다. 남자에게 종속돼 운명을 맡겼던 조선 시대 보편적 여성상을 생각하면 탈 시대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동주'를 통해 얼굴을 알린 최희서는 인물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분석을 통해 그때의 가네코 후미코를 정확하게 그려냈고 지금 이 시대, 한국의 관객에게 소개한다. 

다테마스 검사 역의 김준한은 '동주'의 박정민에 버금가는 발견이자 수확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로 조선인과 일본인을 가르지 않은 감독의 연출에 힘입어 김준한은 이성과 감성이 살아있는 가해자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준익 감독은 지난해 발표한 '동주'에 이어 다시 한번 일제 강점기를 뜨겁게 살았던 청년을 묘사했다. 같은 시대지만 다른 캐릭터를 통해 전혀 다른 톤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영화의 구조적 틀에 있어서는 '동주'의 기시감이 들고, 설명적인 각본은 아쉬움을 자아낸다. 6월 28일 개봉, 상영시간 129분, 12세 이상 관람가.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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