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꾸깃했던 설경구, '불한당'으로 활짝 핀 신화

김지혜 기자 작성 2017.10.29 11:42 수정 2017.10.29 14:55 조회 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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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꾸', '설탕', '우리꾸', '울꾸'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지만, 배우 설경구의 별명이다. 정확히는 지난 5월 이후 팬들로부터 부여받은 기분 좋은 선물이다. 더불어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도 생겼다.

설경구는 입지전적인 배우인 동시에 드라마틱한 인기 곡선을 탄 스타다. 대학로에서 연기를 시작한 설경구는 1999년 영화 '박하사탕'(감독 이창동)으로 충무로의 배우 지형을 바꿔놨다. 당시 한석규와 최민식이 양분하고 있던 연기파 배우 구도는 최민식, 설경구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송강호까지 가세해 '설송최' 트로이카 시대가 열렸다.

'공공의 적', '오아시스', '실미도', '역도산', '열혈남아', '그놈 목소리', '해운대' 등으로 이어진 필모그래피는 연기력을 물론 대중성까지 확장한 선택으로 최초의 천만 배우('실미도'), 최초의 쌍천만 배우('실미도'+'해운대')라는 빛나는 수식어도 얻었다.

승승장구하던 설경구에게 부침도 있었다. 이혼과 재혼 등의 개인사가 배우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설경구는 2006년 이혼했고, 2009년 동료배우 송윤아와 재혼했다. 두 사람은 2002년 영화 '광복절 특사'에서 호흡을 맞추며 인연을 맺었고, 2006년 영화 '사랑을 놓치다'에서 애틋한 멜로 연기를 선보였다.

설경구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연애가 첫 번째 결혼 생활 중 이뤄진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재혼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게다가 전처의 언니가 작성한 글이 인터넷에 공개돼 그 의혹에 기름을 부었다. 설경구와 송윤아는 루머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지만, 대중들의 날개 돋친 상상력까지 제어할 수는 없었다.

설경구는 묵묵히 연기 활동에 전념했다. 공교롭게도 커리어도 하향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용서는 없다', '해결사', '스파이', '공공의 적 2,3' 등이 모두 평단과 흥행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얻었다.

2013년 '감시자들'과 '소원' 이후 선보인 '나의 독재자', '서부전선', '루시드 드림'은 100만 관객도 넘지 못하는 흥행 참패를 거뒀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설경구는 한물갔다", "연기가 늘 똑같다" 등의 가차 없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설경구는 신인 감독과의 작업 빈도가 높았다. 톱배우들이 신인 감독과의 작품을 꺼리는 것은 아이디어와 시선은 참신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한 현장 통솔력 부족과 연출력 미숙 때문이다. 그러나 설경구는 계속된 흥행 실패에도 신인 감독과 작업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위기의 설경구에게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은 영화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청춘 그루브'와 '나의 P.S 파트너'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변성현 감독의 세 번째 영화였다.

설경구

이 영화는 범죄조직의 1인자를 노리는 재호(설경구)와 세상 무서운 것 없는 패기 넘치는 신참 현수(임시완)의 의리와 배신을 그린 범죄 액션물이었다.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언더커버 범죄물이라는 점에서 '프리즌'과 '신세계'의 아류일 것이라는 우려도 적잖았다.

다행히 진부한 이야기의 한계를 참신한 스타일과 흥미로운 정서로 채우며 느와르 영화의 또 다른 영역을 개척했다. 그 결과 지난 5월 열린 제70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개봉 첫 주 SNS 논란에 휘말리며 흥행세에 제동이 걸렸다. 감독이 올린 글은 누군가에 의해 특정 부문만 발췌돼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고 갖가지 논란이 불거졌다. 영화는 90만 명 선에서 극장 상영을 마무리하는 듯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를 사랑한 관객들이 반복 관람을 넘어 극장을 대관해 단체 관람 릴레이를 펼쳤다. 이들을 가리켜 '불한당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불한당원들의 대관 상영은 서울, 경기권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됐다. 극장 상영은 6월 말경 마무리됐지만, 단관 행사는 10월 말인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대관 상영으로만 2만 명이 넘는 관객을 추가로 동원했다.

과거에도 '무뢰한','아수라' 등의 영화에 마니아들이 집결하는 현상이 빚어지기는 했지만 '불한당'만큼 능동적인 양상을 띠지는 않았다. '불한당원'들의 사랑과 열정을 고맙게 여긴 설경구, 임시완, 김희원, 전혜진은 대관 행사에 참여해 관객들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설경구는 개인적으로 한 번 더 극장을 찾았다. 

불한당

설경구는 변성현 감독을 만나 새로운 옷을 입었다. 변성현 감독은 설경구를 캐스팅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선배님을 빳빳하게 펴 드리겠다"는 호기로운 제안을 했다. 처음에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부터 의상, 헤어 등 스타일에서도 큰 의견차가 있었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부딪히며 접점을 찾아 나갔다. 

이같은 작업 과정이 25년 차 배우에게는 적잖은 자극이 됐다. 감독뿐만 아니라 촬영(조형래), 미술(한아름) 등 메인 스태프 모두 경험이 많지 않은 신인이었지만 밤을 새가며 스타일을 논의하고, 영화의 방향을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영화에 미쳐있다는게 이런 거구나'를 느꼈다고 전했다.

2010년 이후부터 설경구의 연기는 고착화된 면이 없지 않았다. 불의 기운을 뿜어내는 연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지만, 유연성이나 확장성에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동물적 감각과 본능 그리고 경험과 연륜으로 완성된 설경구의 견고한 연기 세계는 참신한 DNA로 무장한 '불한당'의 젊은 피를 수혈받아 더 넓고 깊게 확장됐다. 그 결과, 강렬하면서도 쓸쓸하고 남성미 넘치면서 섹시하기까지한 '재호'를 만들어냈다. 설경구는 데뷔 후 무수한 얼굴을 보여줬지만, '재호'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설경구는 지난 25일 열린 제54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불한당'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강력한 경쟁자였던 '택시운전사'의 송강호를 물리친 결과였다. 더불어 제37회 영평상에서도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됐다.

대종상 시상식에 참석한 설경구는 영화 속 시그니처 의상인 쓰리 피스 수트를 입고 무대에 올라와 "나를 빳빳하게 펴준 변성현 감독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어준 스태프, 파트너 임시완, CJ 이진희 PD, 제작사 플룩스 픽처스 안은미 대표 그리고 나의 동지 송윤아 씨께 감사드린다. 공식 상영은 끝났지만 내가 사랑하는 '불한당' 당원들이 단관 행사 계속 이어가고 있다. 끝까지 사랑해줘서 감사하다. 팬 여러분 사랑한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설경구

또한 "나이 먹을수록 꺼낼 카드가 없는데 작품마다 새로운 카드를 꺼내기 위해 노력하겠다. 15년 만에 이 무대에 섰다. 이전까지 한 번도 폼을 못잡았다. 3초만 폼 잡고 내려가겠다."고 말하며 무대 위에서 환희의 포즈를 취했다. 평소와 달리 들뜬 그 모습에서 내면을 뚫고 나온 기쁨이 알알이 느껴졌다. 

설경구는 수상 직후 미국 시카코에 머물고 있던 변성현 감독에게 연락해 수상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변성현 감독은 대종상에 '불한당'이 무려 10개 부문이나 후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참석을 고사했다. 행여나 영화에 불똥이 튀거나 배우, 스태프들에게 피해가 갈까 우려해서였다. 아침이라 자고 있던 감독은 설경구와 스태프들에게 연락을 받고 함께 기뻐했다. 배우와 스태프들의 수상을 누구보다 원했기 때문이었다. 

'불한당'은 설경구에게 아픈 자식과 같은 영화로 남는 듯했지만, 배우 인생의 2막을 열어준 복덩이 같은 작품이 됐다. 게다가 휴면 상태다시피 했던 팬카페 회원 수는 3만 명을 돌파했고, 공식 석상에 참석할 때마다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설경구는 팬들과의 스킨십이 많은 배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팬과의 소통을 즐기는 친화적인 배우가 됐다. 진심과 진심이 통한 경우다.

다시 핀 꽃에는 벌도 날아들었다. 지난 9월 개봉한 '살인자의 기억법'이 전국 265만 관객을 동원하며 지긋지긋한 '흥행 부진'에서도 벗어났다.

무엇보다 설경구 연기 인생 2막이 열렸다. 그가 보여줄 새로운 얼굴과 무기가 기대되지 않는가. 다음 영화는 오달수, 천우희, 문소리와 함께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와 한석규, 천우희와 호흡을 맞출 '우상'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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