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그 많던 '김기덕의 뮤즈'는 어디로 갔을까

김지혜 기자 작성 2018.03.11 13:44 수정 2021.04.21 11:04 조회 6,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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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세계적인 영화 거장은 자신의 대표작 제목처럼 '나쁜 남자'가 됐다. 권력을 이용해 약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미투 운동'의 본질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될만한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여배우들이 잇따라 "촬영 전,후 성폭력을 당했다"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미국의 영화 매체 '할리우드 리포터'는 김기덕 감독의 성폭력 의혹에 대해 "가장 충격적인 미투"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의혹이다. 혐의에 대해 여배우들과 김기덕 감독이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만큼 진위에 대한 다툼의 여지는 남아있다.

김기덕 감독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아주 오랫동안 품어온 물음표가 떠올랐다. 작품마다 떠들썩하게 주목받았으나, 그 이후 사라진 여배우들에 관한 것이다. 왜 김기덕의 뮤즈들은 하나같이 생명력이 짧았을까. 그 오래된 궁금증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김기덕

◆ '김기덕의 뮤즈', 생명력은 짧았다

'뮤즈'(Muse)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다른 기능을 해왔다. 대부분 가학의 대상이었다. 상처받고 넘어진 남성을 보듬는 모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데뷔작 '악어'부터 '야생동물 보호구역', '해안선', '파란대문', '섬', '수취인 불명', '나쁜 남자' 등 대부분의 초기작에 출연했던 여배우들은 신인이거나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었다. 개봉 당시에는 주목받았으나, 현재는 연기 활동을 중단했거나 소식이 뜸하다.

이 작품들은 '김기덕 월드'를 공고히 해주는 탑이 됐다. 하지만 영화에 투신한 여배우들도 이 작품과 이 작품 속 캐릭터를 사랑할지는 의문이다. 남성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 남성에 의해 창녀가 되는 여자, 남자들에게 육체와 쾌락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 등 쉽게 이해하기도, 연기하기도 어려운 캐릭터였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영혼을 다쳤다"는 모 여배우의 과거 인터뷰가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그 선택은 연기에 대한 열정과 영화에 대한 의미를 우선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초기부터 여성 묘사와 폭력성, 선정성으로 인해 여성 단체들의 끊임없는 항의와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해외에서 작품이 인정받으면서 평가와 대접이 달라졌고, 비판도 힘을 잃어갔다. 더불어 편수를 더해가면서 세고 거칠기만 한 것이 아니라 메시지와 표현이 구체화되고 섬세해지며 놀라운 발전을 이뤄나갔다. 

조재현 김기덕

지난 6일 방송된 'PD 수첩'에는 김기덕의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들이 촬영 도중 당했던 일을 폭로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지금은 배우 일을 하지 않는다는 C씨의 주장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감독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촬영 전 성폭행을 당할 뻔 했다고 폭로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촬영장 환경과 그곳의 리더가 되어야 할 감독과 주연 배우의 행동이었다.

"당시 배우와 스태프 대부분 숙소 생활을 했다. 김기덕 감독과 조재현 그리고 조재현의 매니저까지도 매일 밤 제 방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너무 공포스러웠다"면서 "촬영 중에는 매일 몸이 힘들었다. 그들은 그것(성관계)에만 혈안이 돼 있었고 나는 겁탈 당하지 않기 위해 몸싸움을 해야 했다."고 눈물을 흘렸다. C씨는 김기덕 감독, 조재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날 방송에 대해 김기덕 감독은 "성관계를 한 적은 있지만 영화감독이라는 지위로 개인적 욕구를 채운 적은 없다. 강제로 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입장을 밝혔다. C씨가 밝힌 촬영 여건과 당시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개별 사안으로 봐야 한다. 몇몇 배우의 공통된 주장이 있고, 스태프들의 증언이 있다고 해도 김기덕 감독의 모든 촬영장 여건이 이처럼 위험했다고 단정짓는 것은 섣부르다.  

피에타

◆ 김기덕에게 배우는 뭘까…숨 쉬는 오브제? 가학의 대상?

충무로 배우들 사이에서는 "김기덕의 영화에서 살아 남으려면 배우 스스로 정신을 바짝차리고 연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기덕은 저예산으로 다작을 해왔다. 대부분 1~2주 내외의 짧은 기간 안에 영화 한 편을 완성한다. 심지어 '실제상황'(2000)은 200시간 만에 영화를 찍는 실험적 시도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이같은 작업 방식은 저예산 영화의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배우에게는 힘들 수 밖에 없는 여건이다.

김기덕의 영화에 출연했던 한 배우는 "대부분 한두 테이크 만에 오케이를 외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누가봐도 연기가 이상한데 "괜찮아요. 잘했어요"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배우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최대한 준비를 하고 현장에 갔지만, 경험이 많지 않은 배우에겐 카메라 앞에 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완성된 영화가 연기적으로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고 전했다.

영화란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 작업이기에 '배우의 영화', '감독의 영화'를 나누는 것은 우습지만 김기덕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감독의 영화'였다. 배우들의 연기가 생동감 있고, 입체적으로 보이기보다는 감독의 특징적인 영화 세계 안에서 충실하게 행위를 펼치는 오브제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김기덕

해외 영화제 수상의 영광도 감독에게만 집중됐다. 배우들은 그 영화가 대표작이 돼 다음 기회를 얻고, 활동을 확장하는 발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브제로서의 이미지는 강렬했으나, 배우로서의 향기는 짙게 남지 못했다. 그렇게 김기덕의 뮤즈들은 잊혀지고 사라졌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톱스타의 출연은 상황도 결과도 달랐다. '해안선'의 장동건이나 '비몽'의 이나영의 경우 연기 변신 면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시도로 기록됐다.

또한 유명세와 상관없이 연기에 대한 욕심과 역량, 경력이 비례하는 배우들은 김기덕의 연출 방식에서도 제 연기를 펼쳤다. 대표적인 배우는 조민수다. 한국 영화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황금사자상)를 수상하며 김기덕 감독의 대표작이 된 '피에타'에서 조민수는 죄와 복수, 구원과 자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자이자 엄마로 분해 해외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조민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여자를 밑바닥으로 몰아세우는 김기덕 감독의 화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출연을 고사했다. 그러나 미팅 자리에서 과도한 묘사를 수정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신을 간략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바꿨다"고 밝혔다. 조민수는 촬영 중에도 끊임없이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나 연기에 대한 이견도 제시하며 감독과 싸웠다. 그 결과 김기덕의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인 배우였다면 권리를 요구하고, 또 그 요구가 수렴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기덕

◆ '김기덕의 페르소나' 조재현, 환희의 과거vs오욕의 현재

반면 페르소나(Persona: 감독의 분신을 뜻하는 말)의 생명력은 길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김기덕 감독과 함께 성폭행 의혹을 받고 있는 조재현이다. 데뷔작 '악어'(1996)부터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 '섬'(2000), '수취인 불명'(2001), '나쁜 남자'(2001)까지 내리 5편을 작업하며 감독 김기덕의 시작과 성장을 함께 했다.

김기덕 감독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1년 평균 2편 이상의 작품을 만들고, 국제 영화제를 공략하면서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족과 사회에서 버려지고 핍박받아 폭력적 방식으로 여성을 착취하면서 그 안에서 죄와 구원을 반복하는
남성 캐릭터는 조재현의 연기에 의해 구체화됐고, 입체성도 획득했다. 

드라마 '피아노'가 방영되고, 영화 '나쁜 남자'가 개봉한 2001~2002년은 조재현의 최고 전성기였다. 2001년 방송국에서는 드라마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고, 2002년 백상예술대상에서는 영화부문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나쁜 남자' 이후 김기덕 감독과 조재현의 공동 작업은 뜸했다. 충무로에는 두 사람의 불화설이 돌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둘은 2013년 '뫼비우스'로 12년 만에 재회했다. 이 작품은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로 한국영화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황금사자상)를 받은 이후 선보인 첫 번째 작품이었다.

뫼비우스

소재와 묘사에 대한 충격은 어느 작품보다 강했다. 남편의 불륜에 분노한 아내는 복수로 아들의 성기를 절단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속죄가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파격적인 내용과 수위로 인해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 결국, 편집 끝에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아 국내 개봉했다. 당시 김기덕 감독이 밝힌 영화의 작위(作意)는 이렇다. 

"가족, 욕망, 성기는 애초에 하나일 것이다. 내가 아버지고, 어머니가 나고 어머니가 아버지다. 애초 인간은 욕망으로 태어나고 욕망으로 나를 복제한다. 그렇게 우린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이고 결국 내가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사랑한다."

감독의 세계관은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그 세계관은 필모그래피 전반을 아우를 수도 있고, 개별 작품마다 다르게 투영될 수도 있다. 영화적 세계관이 감독 개인의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작품과 김기덕 감독이 사적인 자리에서 여배우들에게 했다는 이야기는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 독특한 가치관과 연출 방식으로 인해 여배우들은 고통받았다. 촬영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중들은 정확히 알 수 없고, 연이은 주장 속에서 추측만 할뿐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현상과 결과가 있다. 왜 젊고 재능있었던 여배우들이 현장을 떠나거나 연기를 그만뒀을까. 그 이유에 대한 찜찜한 추측은 멈추기 힘들다. 더불어 영화계, 언론조차 이런 이상한 현상을 알고서도 문화 권력이 된 감독과 작품을 추앙하는데만 급급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각 영화 포스터, PD 수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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