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독전' 향한 두 시선…영리한 리메이크vs개성 잃은 느와르

김지혜 기자 작성 2018.05.26 17:56 수정 2018.05.27 17:01 조회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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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한국에서 마약 전쟁이라니'

생각만으로는 와닿지 않았던 소재의 영화가 국내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져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마약 밀매 조직을 쫓는 형사와 그를 돕는 전직 조직원의 이야기 '독전'(감독 이해영, 제작 용필름)이 개봉 5일 만에 전국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독전'은 아시아를 지배하는 유령 마약 밀매 조직의 실체를 두고 펼쳐지는 독한 자들의 전쟁을 그린 범죄극. 조진웅, 류준열, 박해준, 차승원, 故 김주혁, 김성령 등 연기력과 매력까지 겸비한 배우들의 열연으로 섹시한 범죄물을 완성했다.

이 작품이 중국 영화 '마약전쟁'(2013)을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원작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돼 호평받았지만,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 없이 IPTV로 직행하며 크게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전'의 제작사 용필름은 소설과 영화 등 원작이 있는 영화 제작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왔다. '올드보이', '뷰티 인사이드', '럭키', '아가씨', '침묵' 등이 대표적이다. 

'마약전쟁'은 국내에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마니아층을 거느린 감독의 작품이다. 두기봉은 '흑사회' 시리즈', '익사일' 등의 영화로 홍콩 느와르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감독. '마약전쟁'은 두기봉 특유 하드보일드한 범죄물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리메이크 소식이 알려지면서 관심을 끈 것은 '마약'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한국 관객의 정서에 맞게 요리할 것인가였다. 영화를 연출한 이해영 감독은 원작의 독기를 덜어낸 대신 스타일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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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전'의 시작…우연히 찾아낸 진주

2013년, 용필름의 임승용 대표는 습관처럼 IMDB(인터넷 무비 데이타 베이스)사이트를 찾았다. '마약전쟁'이라는 강렬한 제목의 영화에 시선이 꽂혔다. 중화권의 성공에 힘입어 미국 개봉을 앞두고 있던 터였다. 위가휘가 시나리오를 쓰고 두기봉이 연출한 느와르라는 점에 주목한 임 대표는 영화사에 연락해 스크리너를 요청했다.

흥미로운 소재를 뚝심 있는 연출로 풀어낸 영화에 반한 임 대표는 판권을 구매하고 영화 제작에 나섰다. 기획 개발 단계를 거치며 감독을 찾던 그는 이해영 감독에게 연출 제안을 했다. '천하장나 마돈나', '페스티발',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 등 드라마 장르에서 역량을 발휘해온 이해영 감독과 범죄 느와르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였다.

임승용 대표는 "스타일리시한 느와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연출은 느와르를 만들어본 적 없는 감독에게 맡기고 싶었다. 색다른 범죄물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작에서 보여준 이해영 감독의 미장센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스타일리시하고 매끈한 범죄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최적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시나리오는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등 박찬욱 감독과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정서경 작가가 썼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한국 관객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마약이라는 소재를 요리하는 것부터 사회악을 가차 없이 응징하는 원작을 변주하면서 '독전'만의 정서를 만들어야 했다. 여러 차례의 각색고 끝에 영화의 밑그림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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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관객의 취향을 정조준한 리메이크

리메이크(Remake), 말 그대로 새롭게 다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원작에 기대도 되고 기대지 않아도 된다. 창작자가 설정한 방향에 따라 이야기가 빠지거나 더해질 수도 있다.

'독전'은 한국 관객의 취향을 정조준한 리메이크다. 마약 밀매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경찰이 전 조직원과 공조한다는 원작의 주요 설정을 가져오되 중반 이후 '독전'만의 스토리 라인을 구성했다. 얼음 욕조 입수 및 수화 소통 등 창의적이고 몰입력 높은 원작의 주요 장면은 그대로 살렸다.  

영화를 끌고 가는 주요 캐릭터(락, 원호)는 변주됐고, 서브 캐릭터(오연옥, 브라이언) 몇몇은 창조됐다. 류준열의 연기한 '락'의 경우 가장 크게 달라졌다. 원작의 차이(고천락)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직과 조직원에 대한 배신도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마약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이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견지하면서 인물의 밑바닥까지 그렸다. 두기봉은 피도 눈물도 없는 서사를 통해 사회악인 마약을 강조하고, 공권력을 통한 범죄의 응징이라는 명쾌한 주제의식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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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 관객의 정서를 고려했을 때 주인공이 마약에 취해있다거나 배신과 뒤통수를 일삼으며 끝내 시궁창에 빠지는 캐릭터로 묘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

'마약전쟁'이 신념과 생존의 대결이었다면, '독전'은 신념과 정체성,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다. 이해영 감독은 락(류준열)과 원호(조진웅)의 캐릭터에 입체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락에게는 원작에 없던 사연을 부여해 드라마를 만들고, 원호는 형사로서의 신념과 투지를 강조하며 관객이 그나마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리딩 캐릭터로 설계했다.

한국 관객은 스릴러 장르에서 '인물 찾기'를 즐긴다. '독전'은 '이 선생'이라는 마약 조직의 보스를 베일에 쌓인 인물로 그려 중반까지는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과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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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기는 빼고 스타일은 살리고…개성 잃은 느와르

'마약전쟁'은 두기봉 감독이 중국 시장을 겨냥하고 만든 느와르 영화였다. 중국 본토의 형사 장(손홍뢰)이 차이(고천락)을 이용해 홍콩 마약 밀매 조직을 일망타진한다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홍콩의 정치 지형과 마약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중국 사회에 끼친 영향 같은 거시적인 의미도 내포했다.

한국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원작이 가진 정치·사회적 함의는 자연스레 휘발됐다. '마약'을 둘러싼 경찰과 조직 간의 쫓고 쫓기는 범죄물로 단순화됐다. 마약 제조 과정과 흡입 장면 등의 수위와 빈도도 조절됐다. 

'독전'은 캐스팅의 밀도가 높다. 조진웅, 류준열, 차승원, 박해준, 김주혁, 김성령 등은 안정적인 연기력은 물론 저마다의 개성이 또렷한 배우들이다. 조합 자체가 흥미롭다. 그러나 배우들이 한데 어우러져 강약의 조화를 이룬다기보다는 각각의 개인기가 한껏 분출되는 모양새다.

시종일관 강 대 강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형국이라 강렬하고 팽팽하다. 특히 캐릭터와 연기 방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진하림 역의 김주혁과 농아남매로 분한 김동영, 이주영은 등장 시마다 시선을 잡아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캐릭터의 등장과 과열된 에너지의 충돌 탓에 영화의 양축인 두 캐릭터 락과 원호가 흐릿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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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락과 원호의 입체성을 부각하는 이야기와 감정의 설계가 촘촘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이는 곧 인물이 행동하는 동력이 되어야 할 개연성의 결여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엔딩에서 다시 한번 두드러진다. 감독은 여러 해석이 가능한 열린 결말을 제시하고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돌렸지만, 여운이 금세 휘발되는 것은 인물의 행동과 감정에 관객이 발을 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가 신념과 집착 뒤에 남은 허무라고는 하지만, 설계가 촘촘하지 못한 이야기가 주는 공허함이 크다.    

'독전'의 두드러지는 장점은 스타일이다. 현란한 카메라 워크와 공간별 테마가 돋보이는 조명, 유려한 편집, 극의 분위기를 강조하는 음악 등 근래 나온 한국 영화 중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다.  

매력적인 소재를 한국 관객의 취향에 맞춰 변주한 '독전'은 예상대로 관객의 입맛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고두고 생각날 이 영화만의 개성이나 야심은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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