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스타 끝장 인터뷰

'버닝' 스티븐 연, 벤의 미스터리를 흡수하다(인터뷰)

김지혜 기자 작성 2018.05.29 13:13 수정 2018.05.29 17:48 조회 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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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스티븐 연은 인터뷰 중 애써 참아온 눈물을 보였다. 누구도 그를 공격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스스로 욱일기 논란에 대해 언급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사죄의 말에는 '무지'에 대한 자책이 있었다. 그저 "죄송합니다"라는 형식적 사과가 아닌 실수의 본질을 바로 잡는 반성의 말이었다. 

한국 이름 연상엽, 5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1년 후 미국에 정착했다. 그렇게 30년을 코리안 아메리칸(Korean-American)으로 살았다.

이 배우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서양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애매한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성장 배경은 스티븐 연에게 누구도 쉽사리 소화해내지 못한 정서를 표현해내는 달란트를 줬다.

영화 '버닝'의 벤은 스티븐 연에게 최적화된 캐릭터였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해 온몸 가득 자유로움이 밴,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만 때때로 개인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모습은 학습하지 않아도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여기에 '미스터리'(Mystery)가 필요했다. '벤'이라는 거대한 물음표를 완성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스티븐 연은 그간 어떤 작품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다층적인 매력을 이 영화에서 분출했다. 내면적으로 캐릭터가 가진 미스터리를 흡수한 결과였다.   

버닝

이날 인터뷰는 대부분 한국말로 진행됐다. 본인에게 좀 더 수월한 언어인 영어를 썼더라면 자신의 생각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은 어눌하고 투박하더라도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국내 취재진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려 했다. 

"이창동 감독이 저를 불렀을 때, 처음엔 함께 작업할 수 있으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는 한국말을 못 하니까요. 감독을 만나러 갈 때 '출연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준비했었어요. 물론 이창동 감독이 부르면 하는 게 맞지만 행여 제가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를 망칠까 봐요."

영화 '버닝'은 스티븐 연이 처음으로 출연한 한국 영화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옥자'는 미국 자본과 스튜디오에 의해 제작된 미국 영화였다.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죠. 저도 언제까지 교포 역할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건 재미없죠. '옥자'는 미국과 한국이 함께 프로덕션을 했으니 제게 자연스러웠는데 이번엔 '내가 할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고 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이 영화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버닝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벤은 해미(전종서)가 아프리카 여행을 갔다가 만나 함께 귀국한 인물. 부유한 데다 친절하고, 사려 깊다. 종수(유아인)는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자인 벤을 '개츠비'라고 칭한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연적 관계가 아니다.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한편 이상한 친밀감도 감지된다. 종수는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다른 벤에게 적의와 동경이라는 극과 극의 감정을 느낀다.

벤은 소설을 쓴다는 종수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가 말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도 읽는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은 두 달에 한 번씩 헛간을 태우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해미에게도 말하지 않은 은밀한 비밀을 종수에게만은 털어놓은 것이다. 

"벤은 세상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사람이 죽어도, 사고가 나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죠. 세상과 진짜로 소통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아요. 너무 많죠. 아주 쉽게 살아서, 거의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요. 그래서 벤의 미묘한 캐릭터를 찾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벤의 어떤 면을 언제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해선 감독과 서로 이야기하며 매 신 선택해나갔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작업한 것 같아요."

스티븐 연은 한국말이 서툴다. 읽는 것은 특히나 어렵다. '버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느낀 어려움은 한국어를 읽고 이해하고 외우는 과정이었다.

"제 시나리오는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버전이 있었어요. 읽으면서 이해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어요. 녹음하고 듣고 외우는 과정이 연속이었죠. 힘들었지만 노력했어요. 벤이라는 캐릭터 안에서 놀기 위해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다가가려고 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종수와의 대화 신을 꼽았다.

버닝

"떨(대마초 흡입)신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카페 신이 기억이 남아요. 벤과 종수가 카페를 나와서 헤어질 때 벤이 종수에게 "그거 알아요? 해미가 종수 씨 특별하게 생각한 거?"라는 대사를 칠 때 정말 테이크를 많이 갔어요. 계속 반복해서 연기 하다가 진이 빠질 때쯤 오케이 사인을 받았을 때는 햇빛이 머리를 비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니까요."

'버닝'이 만들어내는 미스터리는 벤의 미스터리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은 헛간을 태운다는 벤의 비밀스러운 취미가 품은 서늘한 궁금증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친절한 벤은 과연 살인마일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은 영화 후반 종수의 행동이 품은 거대한 미스터리로 이어진다. 

"재미있었던 것은 벤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거죠. 절대 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다 진심이에요. 그는 늘 누군가를 찾고 있어요. '버닝'은 다층적인 영화입니다. 저도 영화를 두 번 보면서 새로운 벤을 발견했어요."

스티븐 연은 벤을 향한 관객의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도 흥미로워했다. 그는 " 특히 종수, 해미는 상대적으로 다가가기 쉽지만 벤은 이해하기 어려워요. '넌 다 가지고 있는데 내가 왜 널 이해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이창동 감독은 '이들도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감독님의 천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나이가 있으신데도 여전히 세상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으시죠. 벤, 종수, 해미는 물론 '버닝'에 관한 해석의 여지를 폭넓게 관객에게 열어두신 것이라고 봐요."라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한국계 미국인인 스티븐 연에게 끼친 영향은 컸다. 그는 이창동의 영화를 보면서 한국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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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제게 가장 많이 한 말 중 하나가 '넌 한국에 대해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모른다'는 거였어요. 그게 정확한 말이었어요. 미국에 살고 한국인들과 자주 어울리면서도 한국에 대해 완전한 느낌을 얻진 못했거든요. 그런데 '시'의 주인공인 할머니(미자)가 침대에서 손자에게 말하는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한국과 내가 정서적으로 연결돼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이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나 '박하사탕'을 보면서도 '이게 한국이구나', '이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구나' 생각을 했고요."

청춘에 관한 영화를 찍고, 무엇보다 지금 청춘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스티븐 연에게 '청춘'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유스'(Youth)에 대한 정의는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점점 같아지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조금 무서워요. 사는 데에 특정한 방법이나 규칙이 없으니까요. 나름의 룰이 있겠지만 뭐가 진짜인지는 모르죠. 그런 면에서 젊은이들은 다 외로운 것 같아요. 그걸 넘어서면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겨내길 바라요. 국적을 떠나, 외로움 속에 우리가 다 함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어느 나라의 청년들이든 다 겁을 먹을 때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모두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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