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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인랑', 비주얼의 진화vs서사의 퇴보

최종편집 : 2018-07-24 00:12:03

조회 :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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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우린 늑대의 탈은 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늑대야"

오시이 마모루의 만화 '견랑전설'을 스크린에 옮긴 애니메이션 '인랑'(감독 오키우라 히로유키)은 이 대사 한마디로 함축할 수 있는 영화다. 세계 2차 대전 패전 후 혼돈의 일본이라는 설정 아래 권력 기관의 암투 속 희생당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인간은 왜 늑대가 됐으며, 늑대가 된 인간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의 뿌리 깊은 고뇌는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임에도 수많은 애니메이션 팬을 사로잡았다.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 '장르의 마술사'로 불린 김지운 감독이 '인랑'의 실사화에 나섰다. 1999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7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실사화에 마련된 제작비는 200억 원. SF 영화를 만들기에 풍족한 금액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원작의 철학과 메시지가 매력적이긴 해도 엄밀히 말해 상업적인 아이템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김지운 감독은 '인랑'에 대해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기관들 사이의 대결에서 액션을, 배신과 암투라는 설정에서 느와르를, 의도를 감춘 채 적을 교란하는 모습에서 스파이물의 매력을 느꼈다고 밝혔다.

장르의 혼합을 통해 '인랑'의 세계관을 스크린에 재현하겠다는 야심이 돋보이는 도전이었다. 그는 영화 '인랑'의 고사 자리에서 "모든 캐릭터가 섹시했으면 좋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제작보고회 자리에서는 "장르가 비주얼"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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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에서 영화적 배경은 이야기의 중요한 뿌리이자 캐릭터들이 갈등과 고뇌를 반복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인랑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혼돈의 시대'가 만든 '외로운 늑대'기 때문이다.

실사화 결정만큼이나 배경 설정은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각본에는 '명량', '군도:민란의 시대'를 쓴 전철홍 작가가 김지운 감독과 합을 맞췄고, 각색은 '밀정'에서 김지운 감독과 호흡을 맞춘바 있는 이지민 작가가 담당했다.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을 한국화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했다. 이념과 사상을 달리하는 집단 간의 대립이 갈등의 주요 축인 만큼 군부독재 정권과 민주화 열망을 품은 시민의 대립 같은 설정도 가능했을 터. 그러나 작가진은 1960년대의 일본을 2029년 남북통일을 준비 중인 한국으로 치환시켰다. 

김지운 감독은 "처음 시나리오를 준비할 때만 해도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통일은 그 자체로 SF였다. 그만큼 민족적 염원도 컸고, 그만큼 요원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통일을 준비 중인 시기의 혼돈기의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하면 한국에서 SF가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발상으로 '인랑'의 배경을 구축했다고 밝혔다.

2029년, 남북한 정부가 통일준비 5개년 계획을 선포한 후 강대국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고 민생은 악화된다. 통일에 반대하는 반정부 무장테러단체 섹트가 등장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설립된 대통령 직속의 경찰조직 특기대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에 입지가 줄어든 정보기간 공안부는 특기대를 말살할 음모를 꾸민다. 권력 기관간의 암투가 계속되는 사이 특기대 내 비밀 조직 '인랑'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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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의 비주얼은 합격점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30여 분까지는 원작의 이미지화에 많은 공을 들였고 준수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영화가 제시한 근미래의 서울은 원경으로 보면 보랏빛 아우라를 내는 메트로폴리탄이지만, 근경의 서울은 가난과 범죄에 허덕이는 잿빛 폐허다.

실사화된 '인랑'은 애니메이션이 보여주지 못한 시청각적 풍요로움을 선사한다. 강화복 수트를 입은 인랑이 붉은 눈빛을 드러내며 지하 수로에 등장하고, 섹트와 특기대는 총구을 겨두고 박진감 넘치게 싸운다. AK소총, M4 카빈 소총, MG 42 중기관총, M203 유탄 발사기, PGF3 로켓포 등 16가지 종류, 총 44점의 총기가 빚어낸 음향은 종전 한국 영화가 진전하지 못했던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섹트의 아지트이자 영화의 주요 공간으로 등장하는 지하 수로를 완벽히 재현해낸 세트를 비롯한 미술, 원작의 상징적 이미지인 특수 강화복 수트를 구현해낸 의상도 인상적이다. 또한 애니메이션 '인랑'의 메인 테마 곡인 미조구치 하지메의 '그레이스 오메가 프래그런스 레인 롱 데스티니'(Grace Omega Fragrance Rain Long Destiny)를 삽입한 것 또한 원작 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원대한 야심으로 빚어낸 화려한 비주얼은 분명한 진화다. 그러나 매력적인 세계관 구축에 실패한 서사가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섹트와 특기대, 공안부의 갈등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 점도 아쉽지만 임중경(강동원)과 이윤희(한효주)의 멜로가 가장 큰 패착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는 원작에도 존재하는 설정이다. 김지운 감독의 인랑의 죄의식보다는 사랑에 더 비중을 뒀다는게 차이다.  

"야만의 시대에서도 사랑은 가능할까?"라는 물음은 다소 고루하게 느껴진다. 멜로가 대중성 획득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같은 카드를 빼 들었을 때는 설득력을 강화해야 했다. 임중경과 이윤희의 사랑은 너무 빠르고 깊게 진행된다. 더욱이 관객이 따라가거나 빠져들기에는 성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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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 이후 멜로에 편중한 전개 탓에 영화가 뻔하고 루즈해지는 것도 흠이지만, 엔딩의 선택 또한 실망스럽다. 원작에서의 "그리고 늑대는 빨간 망토 소녀를 잡아먹었다"는 내레이션이 주는 서늘한 충격과 먹먹한 슬픔을 대신한 선택은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선택은 감독의 몫이다. 원작과 같은 노선을 취할 필요는 없다. 애니메이션의 비극적 결말은 영화의 주제와 귀결되는 절묘한 엔딩이었다. 그러나 김지운 감독이 선택한 결말이 이야기의 전개와 맞아떨어지는가는 의문스럽다. 

남북통일에 관한 배경적 묘사는 초반 이후 등장하지 않다가 엔딩에 이르러 갑자기 재등장한다. 서사와 감정은 쌓일 때 파급력이 커진다. 그러나 '인랑'은 그것을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개연성 없이 분위기만 취하려 했을 때 챙기는 패착이 여실 없이 드러난 엔딩이다. 

물론 계속해서 원작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너무 가혹한 잣대처럼 여겨질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애니메이션 '인랑'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재했던 역사적 혼돈에서 따온 설정과 묵시록적 무드는 인물의 고뇌와 아픔을 공감하게 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반면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구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세계관 구축과 분위기 형성에는 실패했다. 이는 인간의 탈을 쓴 늑대가 관객의 마음을 빼앗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음에도 말이다. 

연기적으로는 특기대 훈련소장 장진태 역의 정우성과 공안부 차장 한상우 역의 김무열이 돋보인다. 정우성은 오프닝에서 내레이션으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제시하고,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는 한발 뒤로 빠진다. 많지 않은 분량에도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한층 성숙된 연기를 선보였다. 김무열은 캐릭터 자체는 전형적인 악역이지만, 안정감 있는 연기를 펼쳤다. 

영화의 중심축인 임중경 역할의 강동원은 본인에게 부여된 다양한 임무를 기대 이상으로 소화해냈다. 다만 인간과 늑대 사이의 딜레마를 선명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다. 이는 배우의 역량보다는 시나리오의 흐릿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큰 아쉬움은 이 영화가 강동원의 비주얼적 강점을 최대치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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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역의 한효주는 배역의 무게감을 견디지 못한 느낌이다. 그간의 작품에서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여왔지만 '인랑'에서는 인물의 고뇌를 깊이 있게 표현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요한 장면에서는 대사 전달력에 아쉬움을 드러내며 몰입감을 떨어뜨린다. 

원작에 없는 캐릭터인 섹트 대원 구미경 역의 한예리와 특기대 핵심대원 김철진 역의 최민호는 임팩트를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역할 자체가 서사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족에 가까운 새 캐릭터의 창조 대신 임중경과 이윤희의 드라마 구축에 좀 더 많은 할애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인랑'은 취사선택을 잘못한 실사 영화로 보인다. 김지운 감독은 비주얼 아티스트로서의 역량은 빼어나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은 약간의 물음표를 남겨왔다. '인랑'에서도 그 약점을 노출했다. 비주얼적 전진보다, 서사의 퇴보가 더 크게 다가온다. 7월 2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38분.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