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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어느 가족'·'더 스퀘어', 칸의 이유있는 선택

최종편집 : 2018-07-28 21:09:40

조회 :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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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인 칸영화제는 한국 영화와도 오랜 인연을 자랑한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이 '춘향뎐'으로 감독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게 심사위원 대상을, 2007년 '밀양'에서 열연한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각본상을 안기며 한국 영화와 배우에 대한 애정을 표해왔다.

칸영화제는 영화 변방으로 여겼던 여러 나라의 작품을 유럽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신인 감독의 발굴에도 앞장 서왔다.

그러나 최근 경쟁 부문의 라인업과 수상 결과에 대해 의문을 표한 사람들도 적잖았다. 실제로 2년간 황금종려상 수상작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라거나 '안전하고 무난한 선택'이라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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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제 7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스웨덴 루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에게 돌아갔다. '러브리스', '120BPM' 등이 유력한 그랑프리 후보였지만 칸은 추가 경쟁작으로 마지막에 이름을 올렸던 '더 스퀘어'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영화제 기간 타 영화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기에 '이변'이라는 반응도 적잖았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이 노렸던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에게 돌아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2004년 '아무도 모른다'로 남우주연상, 2013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심사위원상을 받은데 이어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북미와 유럽 거장의 신작이 상대적으로 적은 상황에서 '무난한 선택'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흥미롭게도 두 편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동시기 국내 극장가에 상륙한다. 보는 이에 따라 만족도의 크기는 다를 수 있겠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칸의 선택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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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가족', 서늘한 시선으로 묻는 가족의 정의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간 여러 편의 가족 영화를 만들며 웃음과 눈물을 선사해왔다. 그의 가족 영화는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기도 했고 일본 사회의 폐부를 꼬집기도 했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 영화의 집대성 같은 작품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버려진 아이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애의 회복,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가족의 조건 혹은 좋은 부모의 정의 등의 소재와 주제가 '어느 가족'에 모두 투영돼있다. 그러나 자기 복제와 반복이 아닌 세계관의 확장과 심화에 가깝다. 이 영화는 가족 영화와 성장 드라마를 넘어 일본 사회의 어둠을 엿볼 수 있는 사회 비판극의 성격도 띠고 있다.

'어느 가족'은 할머니 연금과 도둑질로 연명하는 한 가족이 빈집에 홀로 남겨진 소녀를 가족으로 맞아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원제인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은 우리말로 해석하면 '좀도둑 가족'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영화에는 두 가족이 등장한다. 젊은 부부와 여자아이로 이뤄진 중산층 핵가족과 할머니와 아들 부부, 딸, 손자로 구성된 빈민층 대가족. 멀리서 본다면 어느 가족이 더 행복해 보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각자의 사연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은 한 가족 내의 갈등과 상처를 알아차리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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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에는 진짜 가족과 유사 가족이 모두 등장한다. 영화는 유사 가족을 중심으로 진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인물들의 성격이나 꼬인 관계로 봤을 때 절대 가족으로 어우러질 수 없는 이상한 구성이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은 크고 작은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또 한 명의 타인을 받아들이면서 가족의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도둑질이라는 비도덕적 행위가 경제 생활의 근간이 되는 것을 제외하면 이 가족의 일상은 평범해 보인다. 아버지 행세를 하는 오사무(릴리 프랭키)는 아들뻘인 쇼타(죠 카이리)에게 기술(도둑질)을 가르치고, 엄마 역할을 하는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밖에서 데려온 아이 유리(사사키 미유)를 따뜻하게 보살핀다.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는 하나뿐인 손녀 아키(마츠오카 마유)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가 돼준다.

아버지와 달리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쇼타는 키가 자라는 만큼 도덕 관념도 자란다. 특히 동생 유리가 생기면서 도둑질이 옳지 못한 행위라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한다. 그럼에도 섣불리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은 버려진 자신을 구출시켜준 사람이라는 정서적 밀착감 때문이다.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은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살아왔다. 누가 뭐래도 이들은 서로를 구원하고, 구원받았던 것이다. 

만비키 가족은 한 구성원의 변화로 인해 큰 격랑을 만난다. 예상치 못했던 비극을 감내하기도 전에 이들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의 감정은 복합적일 수 밖에 없다. 중반까지 따스한 가족 드라마인줄 알았던 영화는 냉혹한 사회 드라마로 돌변하는 듯 하다.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유사 가족이 진짜 가족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유보하게 하는 싸늘한 시선을 보여준다.  

노부요는 자신을 도덕적으로 질타하는 조사관에게 “낳았다고 엄마는 아니죠”, “버린 사람은 따로 있다구요”라고 일갈한다. 그 당당한 표정과 목소리를 손가락질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진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 가족을 인정하지 않고 법의 잣대로 처벌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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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인 가족의 정의는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을 뜻한다. 그렇다면 정서적인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잠드는 모습도 가족의 풍경일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 가족이 부모의 사망을 숨기고 연금을 부정 수급한 실제 사건(2016)에서 모티브를 얻어 '어느 가족'을 만들었다. 영화에서 그는 가족의 개념에 대해 섣불리 정의 내리진 않는다. 사회화의 요람으로서의 가족과 울타리로서의 가족의 의미가 충돌하는 순간을 통해 관객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법과 질서, 사회적 규범의 수호는 사회를 옳바르게 지탱하는 힘이다. 하지만 사회적 법망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개인의 행복은 법이나 제도가 해결해줄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어느 가족'은 1997년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이후 무려 21년 만에 일본에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그러나 아베 신조 총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 축전조차 보내지 않았다. 이 영화에 투영된일본 사회의 그늘이 못내 불편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불편하다고 외면할 것이라 아니라 찬찬히 둘러봐야 할 21세기 어느 가족의 풍경임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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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스퀘어', 검은 유머로 푼 인간의 위선과 양면성 

예술가는 삶과 인간에 관한 폭넓은 시선과 포용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쫓는 이들은 남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의 가치도 발견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예술의 특수성이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도 자연스레 이입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하지만 '반드시'라는 건 없다. 인간의 위선과 양면성을 꼬집은 블랙코미디 '더 스퀘어'를 보면 그 생각은 더욱 명료해진다.

'더 스퀘어'는 스웨덴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이 더 스퀘어라는 전시를 앞두고 고충을 겪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크리스티안은 출근길에 타인을 도와주다 핸드폰과 지갑을 소매치기 당한다. 위치 추적기를 통해 핸드폰이 빈민가의 한 아파트에 있음을 알게된다.

미술관 동료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물건을 돌려달라는 협박성 편지를 쓴다. 그리고 해당 아파트 전 세대의 우편함에 꽂아두고 나온다. 며칠 후 기적처럼 분실물이 돌아오고, 평온을 찾는다. 그러나 수 십 명의 주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고간 편지는 부메랑이 돼 곤란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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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은 잘못을 깨닫지만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정치적 옳바름'을 이야기해왔지만 행동은 다르게 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또한 자신이 궁지에 몰렸을때 약자를 향한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도덕적 우월의식까지 드러낸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은 더 큰 화를 야기하며 상대에게나 스스로에게도 내상을 입힌다. 

미술관에서도 위기에 처한다. 새 전시 홍보를 위해 고용한 전문가들이 난민 아이를 선정적으로 이용한 영상을 만들어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는다. 이 영상물은 케빈 카터의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독수리가 굶주려 죽어가는 한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을 떠올리게 할 만큼 충격적이다. 상업성과 화제성 획득을 목적으로 비인륜적 영상을 만든 행위는 크리스티안이 개인의 이익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보여준 행동과 다를 바 없다.

또 하나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크리스티안이 참석한 만찬에 등장한 행위 예술가와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올레그의 이상 행동을 예술로 여기며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파격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자 과도한 폭력성으로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르주아 엘리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양면성을 꼬집은 장면이다. 

이 영화는 지식인의 위선과 양면성을 꼬집으면서 복지국가 스웨덴의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직장에 간난 아이와 함께 출근하는 남자 사원이 있는가 하면, 업무하는 공간인 사무실에는 강아지도 돌아다닌다. 반면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술관 밖에서는 돈을 구걸하는 거리의 난민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빈부격차와 신분에 따른 차별은 복지 강국이라도 예외가 없다. 

영화는 난민 에피소드를 극에 녹여내기도 하고, 주인공의 주변 풍경으로 비추기도 한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대비를 보여주기 설정이지만, 중산층과 빈민의 대비는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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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미술관과 큐레이터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해 예술이 가진 양면성과 딜레마를 스토리텔링에 녹아냈다는 점이다.

영화는 여러차례 전시의 캐치 프레이즈인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나눠 갖는다"를 강조하면서 그것에 위배되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 과정을 통해 영화의 풍자적 성격이 강조되고, 인물의 위선적 행동은 독특한 리듬의 위트를 불러일으킨다.  

'더 스퀘어'는 2015년 '포스 마쥬어:화이트 베케이션'으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3년 만에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역작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나약함을 꼬집은 전작에 이어 또 한번 인간의 위선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냈다. 영화의 제목인 더 스퀘어는 감독이 실제 북유럽을 돌면서 진행한 예술 프로젝트 이름이다. 

칸이 이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안긴 것은 드라마틱한 스토리 텔링이나 실험적 형식을 통한 명확한 주제 의식을 보여준 작품을 지지해온 것과는 조금 다른 선택처럼 보인다. 어쩌면 칸은 이 영화가 보여준 예술의 정의와 양면성에 매료됐고, 비판적 시각에도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