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영화 핫 리뷰

[빅픽처] '공작', 시대의 공기를 품은 웰메이드 첩보극

김지혜 기자 작성 2018.08.01 11:53 수정 2018.08.01 16:55 조회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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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탓에 남북 소재는 그간 수많은 한국 영화에서 소비돼왔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급변하는 정세에 따라 현재 진행형으로 업데이트되는 흥미로운 뉴스기 때문이다. 사회와 영화의 밀접성 면에서도 시의성과 호기심을 확보한 스테디 소재다. 새롭지 않은 소재를 새롭게 만드는 건 이야기의 힘과 형식의 변주에 있을 것이다.

50년이 넘는 분단 역사에서 남과 북의 물밑 첩보전은 치열하게 전개됐을 터. 남으로 내려온 스파이를 다룬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북으로 간 스파이를 그린 영화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는 8일 개봉하는 '공작'(감독 윤종빈, 제작 월광·사나이 픽처스)은 한 북파 공작원의 10여 년에 이르는 첩보 활동을 통해 분단의 비극은 물론 전쟁의 공포심마저 정쟁에 이용하는 남북의 정치 역학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팩션을 완성했다. 

윤종빈 감독이 만든 남북 영화라면 일단, 궁금하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군도:민란의 시대'(2014)등에서 보여준 사회와 집단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과 통찰력, 그리고 미시를 통해 거시를 풍자하는 날카로운 메스는 수많은 관객을 매료시켜왔다. 그는 '비스티 보이즈'(2008)와 같은 흥행 실패작을 통해서도 그만의 개성과 재미를 관객에게 선사해온 흥미로운 이야기꾼이다.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드는 인물인 윤종빈 감독이 고개를 돌린 것은 '흑금성 사건'으로 불린 북풍 공작 사건이다.

공작

1993년,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된다. 정보사 소령 출신으로 안기부에 스카우트된 박석영(황정민)은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캐기 위해 북의 고위층 내부로 잠입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조진웅)과 대통령 외에는 가족조차도 그의 실체를 모르는 가운데 대북 사업가로 위장해 베이징 주재 북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에게 접근한다. 수년에 걸친 공작 끝에 리명운과 두터운 관계를 형성하고 그를 통해서 북한 권력층의 신뢰를 얻는 데까지 성공한다.     

그러나 1997년, 남한의 대선 직전 흑금성은 남과 북의 수뇌부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감지한다. 조국을 위해 굳은 신념으로 모든 것을 걸고 공작을 수행했던 그는 갈등에 휩싸인다.

윤종빈 감독은 안기부에 관련된 영화를 준비하던 중 흑금성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고 실제 주인공인 박채서 씨를 찾았다. 당시 수감 중이었던 박채서 씨로부터 당시의 이야기를 적은 수기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권성휘 작가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공작

윤종빈 감독은 정공법에 가까운 연출로 품격있고 우아한 스파이물을 만들었다. 첩보극에서 필수 공식처럼 여겨지던 액션을 배제한 채 이야기의 힘과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만으로도 재미를 끌어올리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가진 힘 즉 서사의 밀도에 섬세한 연출의 묘를 더해 시대와 역사의 비극을 넓고 깊게 구현해냈다.

'공작'은 북한과 중국을 넘나들며 활약하는 박석영의 활약상을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북한 침투 후부터가 본격적인 첩보 활동의 시작이라고 봤을 때 대북 사업가로 위장하는 과정이 다소 길고 느리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 흐름은 고요하게 요동치는 인물의 심리를 파악하며 따라가다 보면 이후 펼쳐지는 공작 활동의 긴장감이 배가 되고, 인물이 느끼는 딜레마에 깊이 몰입하게 될 것이다.

중반 이후부터는 북풍 공작 사건의 내막이 드러난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한 이 사건은 정치권에서 분단이라는 비극을 어떻게 이용했는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국가에 충성해온 스파이가 느끼는 혼돈과 딜레마도 개인의 고뇌를 넘어서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이는 피아 식별, 선악 구분과 같은 단순하고 편협한 시각에서 남북문제를 바라봤던 이들에게 관점의 변화와 시야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어줄 것으로 보인다.

그간 남북 소재의 영화가 단편적인 호기심으로 북을 바라보고 순진한 상상력에 기인한 깊이 없는 감동을 끌어냈다면 '공작'은 사실적인 이야기에 현실과 닿아있는 결말을 제시한다. 

공작

흑금성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박채서는 보기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2010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 돼 6년간의 옥살이를 한 그에 대한 사법적 평가는 끝났지만 시대의 평가는 아직 물음표로 남아있다. 그런 점에서 흑금성이라는 시대와 상황이 낳은 스파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공작'은 1990년대라는 시대와 북한이라는 미지의 공간을 시각적으로도 탁월하게 구현해냈다. 애초 해외 촬영지로 중국을 계획했으나, 한한령 여파에 대만으로 방향을 틀었던 제작진은 차선의 여건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뽑아냈다. 박석영과 리명운이 첫 만남을 가지는 고려관, 박석영과 김정일의 독대가 이뤄진 김정일의 별장, 공작전을 지시하는 주요 공간인 안기부 안가 등은 시대와 공간의 리얼리티가 제대로 구현된 수준 높은 세트다.      

여기에 인물의 내면을 조용히 따라가는 듯한 음악도 영화의 품격을 높인다. 역시 조영욱(음악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술, 음악뿐만 아니라 촬영, 조명 등 모든 기술적 요소가 허투루 한 것이 없다. 이를 통해 '공작'은 한국 첩보극들이 간과했던 냉전의 '무드'(mood)를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총과 주먹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극적 긴장감을 책임지는 건 입과 눈이다. 박석영 역할의 황정민과 리명운 역할의 이성민은 영화 내내 말로써 서로를 시험하고, 교란하며, 속내를 예측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미묘한 갈등과 대립의 썰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의 감정 변화를 가장 먼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주고받는 눈빛이다. 서로 다른 위치와 역할 속에서 보이지 않게 감정을 교환하고, 그 감정의 변화는 서로를 응시하는 눈빛에서 읽힌다. 영화는 그 순간들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공작

박석영과 리명운이 첫 만남을 가지는 고려관 장면부터 정체 발각 위기의 식사 장면, 호텔 방 대화 신은 연극판에서부터 다져진 황정민, 이성민의 연기 내공을 만끽할 수 있는 매혹적인 협연이다.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은 선과 악을 넘어선 단단한 신념으로 무장한 인물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타일로 외적 변신을 감행했고, 매력적인 연기는 분장을 뚫고 나올 정도로 깊이가 있다. 

박석영 역할의 황정민 역시 노련한 연기로 윤종빈 감독이 설계한 '한국형 스파이'의 모습을 직조했다. 모노톤으로 색을 입히고 레이어까지 쳤달까. "첩보원은 액션 히어로가 아니라 '심리전의 대가',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라는 감독의 말처럼 황정민만이 할 수 있는 다채로운 연기로 흑금성의 활약과 내적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북한 국가안정보위부 과장 정무택 역의 주지훈도 엄청난 내공의 배우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색깔로 야누스적인 매력을 뽐낸다.  

윤종빈 감독은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부터 '공작'에 이르는 5편의 연출작에서 단 한 번도 동어 반복을 하지 않았다. 매 작품 새로운 소재와 연출로 관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고, 영화적 쾌감을 안겼다.

'공작'을 통해 감행한 도전과 모험의 가치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안전한 흥행 공식을 이입하지 않고, 컨셉과 지향점이 확실한 윤종빈 표 스파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허튼 유머와 과시성 기교 없이 콜드 느와르를 구현하고자 한 영화적 뚝심은 속도와 자극으로 점철된 현 충무로 상업영화의 흐름 안에서 오롯이 빛난다. 그야말로 웰메이드(well­made)다. 

8월 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상영 시간 137분.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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