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스타 끝장 인터뷰

[빅픽처] 윤종빈의 현미경 그리고 '공작'의 TMI

김지혜 기자 작성 2018.08.12 13:50 수정 2018.08.13 16:10 조회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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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빈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대북 사업가로 위장한 박석영(황정민)의 짝퉁 롤렉스 시계는 시침 '8', 분침 '2'에 멈춰 있다. 카메라는 여러 차례 시계 판을 클로즈업한다.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와 멈춰진 시간, 영화 '공작'(감독 윤종빈, 제작 영화사 월광·사나이 픽처스)을 만든 윤종빈 감독은 문학적 방식으로 분단 현실을 은유했다.

윤종빈 감독은 반골 기질이 있다. "옛날에는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 그렇지도 않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가 만든 영화에선 사회와 집단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그 안에 놓인 인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며 딜레마에 빠지고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군대 문제의 민낯을 정면으로 다뤄 신선한 충격을 안긴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2005), 물질이 최고의 욕망이 된 시대상을 호스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린 '비스티 보이즈'(2008), 아버지들의 세대인 1980년대를 갱스터 영화로 그린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19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한 스타일리시한 액션 활등 '군도:민란의 시대'(2014)에 이어 윤종빈 감독의 현미경은 남과 북을 오가던 북파 공작원에 꽂혔다.

차기작을 위해 국정원 취재를 하던 중 '흑금성 사건'을 접한 그는 '왜 한 번도 북파공작원을 다룬 영화는 시도되지 않았을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관련 자료를 팠고, 실존인물 박채서 씨를 찾았다.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 서구의 동서 냉전과는 또 다른 한반도 내 남북 냉전의 특수성이 배경이 되는 탓에 영화적 재미는 탄탄해 보였다. 윤종빈 감독은 영화 '공작'으로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공작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워왔다. 과연 무엇을 위해 싸워온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두 인물이 중심이 되는 심리전과 그들이 겪는 딜레마를 통해 풀기로 작정했다. '공작'의 모티브가 된 흑금성 사건은 윤종빈 감독의 선배이자 앞서 '베를린'으로 첩보 영화의 새 장을 열었던 류승완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였다. 100억 내외의 예산을 생각하며 영화화에 착수했지만, 시대극 특성상 녹록지 않았다. 북파 공작원을 다룬 영화에서 공작 활동의 주 무대가 되는 공간의 사실적 묘사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 시대와 공간의 재현으로 인해 '공작'의 제작비는 165억까지 치솟았다.

윤종빈 감독은 애초부터 액션이 등장하지 않은 첩보극을 만들 작정이었다. 스파이의 본질을 파고드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기에 액션이 등장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스파이의 본분은 목적을 위해 상대를 속이는 것이고, 육탄전이 등장하는 것은 곧 정체가 탄로 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파이 영화=액션물'로 학습된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소구점이 있겠냐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지만 윤종빈은 이야기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관객들은 영화가 전하는 진실과 메시지에 반응하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로 주목받고 있는 '공작'에 관한 크고 작은 궁금증을 윤종빈 감독에게 물었다. 만든 이가 전하는, 만든 이에 관한 TMI(Too Much Information)을 공개한다. 

*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가급적 영화를 보고 기사를 읽기를 권합니다. 

칸영화제

Q.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 상영판에 비해 4분가량 편집해 국내에 개봉시켰다. 그때 본 버전과 비교해 확실히 극에 속도감이 붙은 것 같다. 

A. 어디를 편집한 건지 잘 모르더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신을 덜어낸 건 없다. 대사만 조금 쳐냈다.

Q. 칸에 가기 전 모니터 시사 단계에서 편집된 두 장면이 있다고 들었다. 어떤 장면이며 왜 편집했는지 궁금하다. 

A. 정무택(주지훈)이 박석영(황정민)이 우리 쪽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위부 여성 요원 홍설(정소리)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가지라고 요구한다. 초대소에서 흑금성과 홍설을 한 방에 넣어두고 정무택이 도청을 하는데 흑금성이 그 상황을 모면하는 과정을 담은 5~6분 정도의 장면이다. 흑금성의 재기를 엿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아끼는 장면인데 이야기 흐름상 튄다는 의견이 많아서 뺐다. 또 흑금성의 북한 탈출 신에서 정무택의 액션 장면이 있었다. 이야기의 힘을 믿었고, 전하고자 한 바도 확실했기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잘랐다.  

* 정소리는 '너의 목소리와 들려3'에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흑금성과 홍설의 삭제된 분량은 DVD 삽입을 고려 중이다.

Q. 리명운이 박석영(암호명 흑금성)을 처음 만나는 고려관 장면에서 등장한 '호연지기'(浩然之氣:도의에 근거를 두고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 마음)라는 표현이 다소 옛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북한에서 쓸 법한 표현이라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자성어 중 왜 하필 호연지기인가.

A. 박석영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 박채서 씨가 감옥에서 보내온 수기에 북한 사람들이 자신에 관해 설명할 때 '호연지기 넘치는 사람'이라고 했다더라. 그동안 우리나라 스파이들이 북에 가서 활동할 때 실패한 원인이 그들에게 다 맞춰줬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흑금성이 성공한 이유는 자신의 원칙과 전략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상대방 입장에서 볼 때는 막무가내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게 북측의 호감과 신뢰를 얻는데 오히려 큰 기반이 됐다고 하더라.

공작

Q. 영화는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의 최학성(조진웅)이 박석영(황정민)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과정부터 등장하는데 왜 그가 안기부의 선택을 받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왜 하필 그였을까.  

A. 박채서 씨는 비(非)육사 출신인데도 지휘관을 많이 했고 실적이 좋았다더라. 새로운 방식, 혹은 파격적인 방식으로 성과를 많이 냈다고. 그리고 일본어, 중국어를 비롯한 외국어도 능통해 안기부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모르는 고향 선배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는데 알고 보니 안기부에서 보낸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속인 것에 화가 나서 처음엔 거절했다고 하더라.

Q. 박석영이 북한에 들어가기까지의 스토리 텔링이 장황한 감이 있다. 이 부분을 상세하게 묘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A. 박석영이 북핵에 관한 첩보를 듣고 베이징에 가 리명운을 만나기까지의 스토리 텔링은 문제가 없는데 영화 후반부 대선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선 안기부 내부 문제를 짚고 가야 했다. 촬영, 편집에서의 전략은 대본을 본 사람이 아닌 안 본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유추가 안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인물들의 관계도 그렇고 다음 장면이 잘 예측이 안 돼야 몰입감을 높일 수 있으니까.  

Q. 리명운 역의 이성민이나 박석영 역의 황정민이 연기할 때 손끝 하나, 눈빛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토로하더라. 황정민은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서로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으면서도 테이블 아래 칼을 숨겨놓은 것처럼 연기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고 했다. 연기 디렉팅의 주안점은?

A. 돌이켜보니 내가 배우들에게 연기를 못하게 했더라. 황정민 선배에게는 관객들이 한 시간 반까지는 박석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화에서 박석영의 내면 변화가 처음으로 드러나는 게 중반 이후 남북 수뇌부 간 거래를 감지했을 때부터다. 이성민에게도 흑금성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는 연기를 해달라고 했다. 고려관에서 흑금성과 첫 대면 신을 찍을 때는 눈동자만 돌려도 "선배님 눈 돌아갔어요. 엔지(NG)입니다" 했으니까. 둘이 앉아서 대사만 치라고 하니 힘들었을 거다. 조진웅 배우는 정보 전달의 양이 너무 많고 감정도 넣어야 하니 힘들었을 거다. 배우들이 내게 내색은 안 했지만 어떤 날은 황정민, 어떤 날은 이성민, 어떤 날은 조진웅 한 번씩 돌아가면서 연기가 안 풀린다며 괴로워했던 것 같다. 

공작

Q. 반면, 정무택 역할의 주지훈의 연기는 자유로워 보인다. 두 사람과 캐릭터가 다르기도 하고 연기 스타일도 차이가 있다. 캐릭터와 연기 톤이 다소 튄다는 느낌도 있지만,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자연스러운 유머를 발산해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A. 원래 정무택 역할도 나이가 좀 있는 중년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했다. 그런데 국수란 피디가 "아이 지겨워. 또 아재야. 아재아재 바라아재다"라고 반대를 하더라. 그래서 정무택을 금수저에 철없고 막무가내인 어린 인물로 설정하고 배우를 찾았다. 황정민, 이성민에 꿀리지 않을 젊을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주지훈이 생각났다. 시나리오를 보내고 며칠 후 만났는데 대뜸 "(정무택은) 그림입니까?"라고 묻더라. 그래서 "이게 왜 그림이야? 캐릭터 좋은 거야. 넌 육류 사이에 있는 채소야. 편안하게 연기하면 돼"라고 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주지훈에게는 특별한 디렉팅 없이 자유롭게 연기하도록 뒀다. 그런데 김정일을 만나는 신부터 연기를 절더라. 황정민, 이성민 씨 분량을 먼저 찍고 주지훈 분량을 찍는데 김정일의 눈을 똑바로 보고 연기를 하는 거다. 이성민 선배가 "김정일 눈을 쳐다보면 어떡해!"라고 하니까 "쳐다보면 안 돼요? 눈을 보고 대사를 쳐야지 그럼 어딜 보고 해요?"라더라. 그건 말을 안해줘도 알 줄 알았는데 다들 지적을 하니까 깜짝 놀라더라. 그때부터 황당하더니 연기를 절기 시작하더라.(웃음) 

Q. 롤렉스 시계 설정이 재밌다. 처음엔 PPL인가 싶기도 했다. 박석영과 리명운이 서로에게 줄 선물로 시계와 넥타이핀을 선택한 이유는?

A. 실제로 박채서 씨가 보위부 사람들에게 짝퉁 롤렉스 시계를 선물하며 환심을 샀다. 북한 사람들이 롤렉스를 엄청 좋아한다더라. 리명운이 박석영에게 주는 선물은 뭐로 하지 고민하다가 넥타이핀이 떠올랐다. 뭔가 리명운이 속한 체제와 그 틀을 잡아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Q. '멈춰진 시간'에 관한 의미는 관객들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 8시 10분일까? 

A.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를 맞추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 알아봐 줄 때 나로서도 기분이 좋다. 다만 시침과 분침은 8과 2으로 맞춘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촬영할 때 제작진이 시계를 몇 시로 맞출까요? 라고 묻길래 8시 10분이 느낌이 있어 보여서 주문했다.  

Q. 정무택(주지훈)과 김명수(김홍파)의 댄스 장면은 유머를 위해 일부러 넣은 건가? 그 안무는 누가 만든건지도 궁금하다. 

A. 시나리오에도 있었다. 극의 분위기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안 찍으려고 했는데 주지훈 배우가 "일단 찍으시죠" 하더라. 그 동작들은 실제로 북한 군인들이 추는 춤이다. 북한에 대해 자문해준 전문가에게 따로 배워 연습했다. 그 신은 편집할 때 빼자는 의견도 많았는데 재밌어서 넣었다. 내가 원래 생뚱맞은 걸 좋아한다. 

공작

Q. '공작'은 제작비를 어디에 썼는지가 결과물에 보인다. 모든 요소에 공들인 태가 난다. 특히 프로덕션 디자인이 인상적인데 남북 소재의 영화 중 북한 재현의 완성도가 가장 높다.

A. 평안북도 초대소 장면은 충북 괴산의 중원대학교, 영변 장마당은 동해, 김정일 별장은 안성 디마세트장에서 찍었다. 그 외 삽입된 북한 장면들은 북한에 들어가서 촬영할 수 있는 해외팀의 소스를 구매해 활용했다. CG, 합성 등을 더해 최대한 완성도를 높였다.

Q. 김정일 등장 장면에 함께 나온 말티즈가 눈길을 끌었다. 독재자와 강아지라는 조합이 재밌으면서도, 배를 곯는 북한 사람들과 잘 관리된 반려견의 대비가 묘한 감정을 전하더라. 고증에 기반한 설정인가?

A. 그렇다. 김정일은 실제로 별장마다 여러 마리의 애완견을 키웠다더라. 탈북 시인 장진성 씨의 책 '친애하는 지도자에게'의 묘사를 참고했다. 김정일 첫 등장 신은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다. 말티즈 순종을 데려와 털 관리를 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 그 비용만 해도 2,500만 원 정도 들었다. 내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 제작비가 2,000만 원이었는 데...(웃음) 국수란 피디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했지만 독재자의 강아지가 상징하는 바가 있어 해야 할 것 같았다.

Q.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 묘사도 인상적이었다. 자칫 신파로 흐를 수도 있는 장면이었지만, 사실적 묘사를 하는데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A. 나는 그 장면이 조금 아쉽다. 실제 영상을 보면 현실은 더 참혹했다. 어린 애들의 몸엔 뼈밖에 안 남고 얼굴은 사람 몰골이 아니더라. 그런데 그런 보조 출연자를 구할 수 없었을뿐더러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었다. 우리로서는 표현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공작

Q. 영화 음악도 극의 무드를 형성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박석영이 김정일의 별장으로 향할 때 'Dies Irae'를 쓴 것이 인상적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의 테마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A. 음악은 우리끼리 조스 짐머라 부르는 조영욱 감독님이 담당했다. '공작'을 위해 220곡 정도 작곡을 하셨다. 그걸 내가 일일이 들어본 후 좋은 것만 추렸다. 3~4가지 테마로 위주로 가자고 제안 드렸고, 장면에 맞춰 꼼꼼하게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Dies Irae'는 조영욱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종교 음악(미사곡)이다. 영화에서는 '샤이닝'이 처음으로 샘플링해 쓰면서 유명해졌다. 

Q.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사의 경우, 육성이 아닌 것 같았다. 성대모사 목소리를 넣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A. 그렇다. 개그맨 노정렬 씨가 성대모사 한 것을 입혔다. 육성을 쓸까 했는데 (과거 자료가)발음이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 편이라 부득이하게 목소리를 따로 녹음했다.

Q. 개봉을 앞두고 제일기획에 다니는 지인으로부터 "'공작'에 우리 회사 이야기가 어떻게 묘사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실제 그 광고를 제작한 인물은 제일기획 출신이 아니지 않나?

A. 그렇다. 애니콜 광고는 제일기획이 만든 게 맞는데 박성웅 씨가 연기한 한창주의 실존 인물인 박기영 씨는 대홍기획 출신이다. 

공작

Q. 윤종빈의 영화 중 '공작'의 엔딩이 가장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파가 아닌 뭉근한 기운이 감동과 여운을 더 오래 지속시킨달까.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엔딩을 향해서 달려온 셈인데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 

A. 엔딩부터 써놓고 시작한 영화다. 멀찌감치 서서 마주 보고 있는 박석영과 리명운의 모습은 남북 분단 현실을 상징한다. 그 장면을 찍을 때 한반도기를 쓸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했는데 평창올림픽때 사용하면서 많이 알려지기도 해서 그냥 썼다. 

Q. 두 사람이 상해 광고 촬영장에서 재회하기까지 영화적 생략이 들어간 건데 실제로 리처장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A. 실제로는 광고 사업 검열을 담당했던 보위부 사람들은 다 죽었다. 흑금성이 스파이라는 걸 못 알아챘으니까. 김정일이 흑금성을 죽이라는 지시까지 내렸다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정리가 됐다고 들었다. 리처장도 조사를 받았는데,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맞췄기에 살려줬다더라. 

Q. 그렇다면 흑금성은?

A. 영화적으로 많이 생략됐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햇볕정책이 시행되고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박채서 씨는 대북사업가로서 순수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래서 남북 광고가 노무현 정권 때 성사가 됐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의 방해도 많았다더라. 광고는 상하이에서 찍었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박채서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공작

Q. 박채서 씨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분분하다. 이 영화가 흑금성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과 북한을 미화했다는 일부 시선도 존재하는데 감독으로서의 견해가 궁금하다.

A. 어떤 미화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박채서 씨는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안기부라는 정부 기관, 정치인의 추악한 거래 현장을 목격했고 상부에 보고했는데 묵인했다. 이때 군에 소속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조직을 배신할 것인가 진실을 외면할 것인가 두 가지였고 이 사람은 어떤 선택을 했다. 가치 판단에 따라서 이 선택이 옳은가 아닌가를 말할 수 있는데 난 이걸 신념이라고 봤다. 그는 김대중이 당선되면 한 자리를 받는 거래를 한 게 아니라 신념에 따른 선택을 한 거다. 그걸 영화에 표현했다. 리명운의 경우도 광고 사업을 통해 북한을 개방시키고 피폐한 국민에게 쌀을 주겠다는 신념으로 한 행동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난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신념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스파이 활동을 사법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불법인데. 이 사람이 했던 모든 행동은 법적으로 따지고 보면 다 사기다. 공작이라는 것 자체가 국익을 위한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이다. 그것을 과연 법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느냐. 그 부분에 있어서 난 이 사람이 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Q. 사회나 집단의 폐부를 찌르는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왔다. 반골 기질도 있는 것 같은데 성장 환경의 영향도 있을까? 

A. 아버지가 경찰 간부시긴 했는데 어릴 때는 정치 성향이 딱히 없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답답함이나 조직 생활의 갑갑함 같은 건 학창시절부터 느꼈다. 남중, 남고, 군대 등을 거치면서 서열 문화에 지치기도 했고. 아무래도 권위적이고 폭력적이니까. 학교나 군대에 적응 못 하고 반항하는 스타일이긴 했다.

Q. 어떻게 영화감독이 됐는가? 스스로 영화광은 아니었다고 얘기해왔는데.

A. 조직 생활, 사회생활은 못 할 성격이라는 건 일찌감치 알았던 것 같다. 군대에서 수능을 다시 봐서 의대를 가려고 했다. 수학 정석을 폈는데 '다시 이 짓을 하는 건 진짜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 영화를 업으로 삼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실 엄청난 씨네키드는 아녔다. 뭐 남들 '황비홍' 볼 때 '샤이닝', 'LA컨피덴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같은 걸 보기는 했는데...고등학교때까지 타란티노 영화도 몰랐다. 대학(중앙대학교 영화학과)에 가보니 나보다 영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더라.  

윤종빈

Q. 그간 매 작품 동어 반복 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해왔다. 어떤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나?

A. 그냥 그 순간에 끌리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DNA가 끌리는.

Q. 어떤 사회나 환경에 처한, 그러나 자기 진심이 있는 남자가 나오는 건 윤종빈 영화들의 공통점 같다.

A. 영화 만드는 걸 연애에 비유하는데 이유를 알고 빠지지 않잖아요. '내 이상형은 이런 거야'라고 말하지만 정작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매번 다르다. 내가 의외로 싫증을 잘 내는 편이다. 그래서 힘들다. 처음에 잘 꽂혔다가 찍을 때 되면 '아 재미없어'라는 생각이 들고 그 상태로 촬영에 들어간다. 대본 작업 막바지에 들어가면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이고 '내가 이 재미없는 걸 왜 한다고 했지'라고 후회하다가 배우 캐스팅이 시작되고, 프리 프로덕션하고, 콘티를 짜기 시작하면 또 재밌어진다. 촬영에 들어가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던 게 이미지로 구현되니까 신난다. 그러다가 촬영 중반에 접어들면 '지겹다....언제 끝나지?'하고 괴로워한다. 편집도 처음 시작할 때는 재밌는데 계속하다 보면 괴로워진다. 영화를 찍는 건 이 과정의 반복인 것 같다.(웃음)

Q. 영화를 함께한 이들이 치밀함, 예민함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더라. 그게 감독 윤종빈의 무기가 된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A. 아니다. 나 되게 허술하다.

Q. 이번 영화는 어떤 반응을 들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나?

A. 칸영화제에서 나왔던 외신 반응 "말은 총보다 강력하다."(미국 스크린 인터내셔널). 그걸 컨셉으로 잡은 영환데 알아주니까 좋더라.

윤종빈

Q.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다른 감독과는 차별점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는지.

A. 글쎄. 그걸 내 입으로 말한다는 게...기존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틀에 짜인 영화를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여기 박고 저기 박는 생고생을 한다. 유사복제품을 만들고 싶진 않다. 맛집 가는 걸 좋아하는데 식당을 고를 때 프렌차이즈는 제외한다. 식당이 작더라도 요리사가 재료부터 공정까지 한 땀 한 땀 직접 하는 데를 좋아한다.

Q. 최근 '팬텀 스레드'(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를 재밌게 봤다고 하지 않았나. 오트쿠튀르 의상을 만드는 디자이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마음과 감독의 마음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A. 그렇다.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잘하려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관성을 어기는 영화를 만들려면 다르게 갈 수밖에 없으니까.

Q. 그런 생각을 존중한다. 다만 오락영화의 보편적 눈높이와 재미라는 것도 있지 않나. 최근 잘된 상업 영화들은 그런 것을 잘 조준한 결과기도 하다. 본인의 생각과 영화계 흐름 사이에서 고민도 많을 것 같다. 

A. 요즘엔 프렌차이즈가 아닌 맛집도 월드타워, 백화점에 입점하는 세상이다. 관객들도 수준이 높기 때문에 꼭 박리다매가 아니라 고급 음식도 찾는다. 분명 그 수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를 개봉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서 보는 건 10~20대고, 그들의 입맛이 프렌차이즈에 길들어져 있는 편이지만 다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 주변에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극장을 안 가는 이유가 볼 영화가 없어서 혹은 뻔해서라고 한다. '범죄와의 전쟁'의 테마곡('풍문으로 들었소')을 불러 친해진 가수 장기하 씨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가 "음악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하더라. 그때 내가 "기하 씨,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어릴 때 영화보다 음악을 더 좋아했거든. 요즘엔 음악을 잘 안 듣는 이유는 내 기호에 맞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영화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많이 보는 성인들 기준으로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없기 때문에 극장에 안 가는 거다. 관객들의 기준을 획일화해서 만들 게 아니라 관객의 취향을 폭넓게 보고 그것을 충족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곡성'의 경우도 만들 때는 반대가 많았고 난관에 부딪혔지만 상업적으로도 잘되지 않았나. 이런 시도들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종빈

Q. 이런 기준으로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반면, 그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녹록지는 않을 것 같다. 

A. 그렇다. 만들기도 전에 진이 빠진달까. 매번 투자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왜 그런 이야기를 이런 큰 예산으로 만드냐', '제작비를 좀 줄여라'라는 말을 듣는다. 이제껏 영화를 만들면서 손해를 끼친 적도 딱히 없는데...그렇게 말하면 "텐트폴(성수기용 대작) 영화는 손해 안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그해 투자배급사에 많은 돈을 벌어줘야 하는 건데"라고 한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닌데...매번 그렇게 싸우면서 영화를 만든다. 

Q. 영화감독인 동시에 제작사 월광의 대표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빨리 제작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A.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검사외전'(2015)이 첫 번째 제작 영화인데, 이일형 감독을 원래 다른 제작사에 소개시켜 줬다. 그런데 잘 안됐다. 진행이 안되다 보니 중간에 껴서 미안하더라. 공동 제작자인 한재덕 대표도 있어서 '검사외전', '보안관'은 (대학)후배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했다. 곧 제작에 들어가는 '클로젯'(하정우 주연)도 대학 후배의 영화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스태프로 활약했던 김광빈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영화 '돈'(류준열 주연)의 경우는 원작 소설의 판권은 내가 샀지만, '공작' 촬영과 겹쳐서 한재덕 대표가 신경을 더 많이 썼다. 박누리 감독도 한 대표가 추천했고.

Q. 감독 윤종빈의 영화 인생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을 3명만 꼽는다면.

A. 하정우, 한재덕, 정현주. (하)정우 형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최고의 파트너다. 한재덕 대표(제작사 사나이 픽처스)는 내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나서 '함께 영화를 하고 싶다'고 얘기해주신 게 인연이 돼 지금까지 왔다. 현장에서 많은 도움을 주시고, 많이 배웠다. 정현주 대표(전 쇼박스 투자제작본부장, 현 신생 투자배급사 에이스 메이커 무비웍스 대표)는 '범죄와의 전쟁'이 쇼박스에서 다 까이고 표류하고 있을 때 '이거 안 하면 회사 그만두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까지 싸워준 끝에 영화가 세상에 나올 수 있어 늘 고맙게 생각하는 존재다. 

Q. 하정우는 전작 4편에서 모두 주연으로 활약해왔는데 이번에는 동시기에 경쟁자로 만나게 됐다. 이 풍경을 외부에서는 흥미롭게 바라보는데 정작 본인들은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다.

A. 처음엔 좀 이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한다. 경쟁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두 영화 다 잘됐으면 좋겠다. 내 입장에서는 '공작'이 배우와 제작진들이 너무 고생하고 힘들게 만든 영화라 스코어로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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