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영화 핫 리뷰

[빅픽처] 할리우드는 왜 아시안 막장극에 빠졌을까

김지혜 기자 작성 2018.10.27 10:42 수정 2018.10.28 15:49 조회 2,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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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1995년 런던, 폭우가 쏟아지는 밤 최고급 호텔 로비로 한 아시아 여성과 그녀의 아이들이 들어온다. 여성은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는 백인 지배인에게 펜트하우스를 예약했다며 키(KEY)를 달라고 한다. 이 남성은 예약자 리스트를 확인하지도 않고 방이 없다고 문전박대한다.

모욕감을 안고 호텔을 나선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난다. 이번에는 호텔 사장을 부른다. 버선발로 달려 나온 반백 머리의 사장은 "엘레노어 영"이라는 상대의 소개에 90도로 고개를 조아린다. 그리고는 직원들에게 영 집안이 우리 호텔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호텔에서 쫓겨났던 여성이 그사이 호텔을 사버린 것이다. 앞선 실수를 아찔해 하고 있는 지배인에게 여성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를 던진다. 

"넌 지옥이나 찾아봐" 

영화 '크레이치 리치 아시안'을 여는 프롤로그는 백인 우월주의와 아시안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정리하는 반격으로 아시안의 부와 가문의 전통을 내세운다. 우리네 현실에서도 "사장 나오라 그래!"를 외치는 진상 고객의 난동은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지만, 이 시퀀스는 강렬하고 통쾌한 반전을 선사하며 영화 시작부터 몰입도를 높인다.  

크레이지

홀대하는 이의 시선과 홀대받는 이의 반격 모두 낯설지 않다. 유럽과 북미를 여행하다 보면 아시안에 대한 선입견을 마주할 때가 많다. 그들에게 중국과 일본, 한국이라는 아시아 3국에 대한 이미지는 조금 다르게 형성돼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중국일 것이다. 존재감과 캐릭터 면에서 그렇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아시안이 만든 중국계 슈퍼 리치에 관한 이야기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워너브라더스)가 제작한 영화의 출연진이 100% 아시안 캐스팅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1993년 '조이 럭 클럽' 이후 25년 만이다. 

이 작품은 할리우드 흥행 역사를 새롭게 썼다. 지난 8월 개봉해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2억 2,663만 달러(한화 약 2,543억 원)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이는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 중 최고 흥행이었다. 자국과 해외의 폭발적인 흥행으로 이 영화는 제작비(3,000만 달러)의 7배가 넘는 수익을 거둬들였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2013년 싱가포르 태생의 미국 작가 케빈 콴이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뉴욕에서 경제학 교수로 활동하는 중국계 미국인 여주인공이 남자친구의 초대로 그의 고향 싱가포르를 방문하며 일어난 일을 그린 영화다. 

크레이지

엄밀히 말해 신데렐라 스토리로 점철된 환타지 영화다. 여기에 온갖 막장 요소가 가미됐다. 다만 이 신데렐라는 홀어머니 아래 자란 이민자라는 환경적 어려움을 딛고 최연소 교수 타이틀을 단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며, 왕자도 집안이 일군 부과 명예를 개인의 것과 분리하는 개념남이다.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우아한 어머니,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완강한 할머니는 빌런으로 설정돼있다. "얼마면 내 아들에게서 떨어지겠니?"와 같은 천박한 대사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한국의 아침 드라마 속 갈등 구조와 비슷하다. 때문에 할리우드에서의 기록적 흥행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중화사상과 셀프 디스를 활용한 유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하며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중국계 아시안 거부들의 자부심이 영화 전반에 넘치도록 흐른다.

영화는 이들을 바라보는 외부의 곱지 않은 시선도 거침없이 끌어들여 웃음의 재료로 삼는다. 자아도취와 셀프디스의 하모니가 뻔하게 보일 수 있는 영화를 조금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다. 슈퍼 리치의 풍요로운 삶은 우리네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가득하며, 돈이면 뭐든지 된다는 그들의 삶의 태도를 조소하며 즐길 수 있는 재미도 선사한다. 

유사한 성공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2002년 개봉해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다. 500만 달러(한화 약 57억 원)로 만든 저예산 작품이었으나 세계적으로 3억 6천만 달러(한화 4,113억 원) 이상의 흥행 수입을 거두며 성공했다. 이 영화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흥행은 닮은 면이 있다. 두 영화 모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녀가 결혼 과정에서 집안과 문화가 부딪히며 겪는 좌충우돌기를 그렸다.  

크레이지

미국은 영국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이 이룬 나라이며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다문화 사회다. 이 영화는 크게든 작게든 다문화 이슈를 오락적으로 다루면서 생각할 거리도 남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선사하는 블랙 유머는 굳이 의미나 메시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웃고 떠들기에도 타율이 꽤 높다. 기획적으로 영리하고, 연출적으로도 재기 넘친다.

영화를 연출한 존 추 감독은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바로 이병헌의 할리우드 진출작 '지.아이.조2'(2013)의 연출을 맡아 2013년 한국 취재진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나우 유 씨 미2'(2016)를 성공으로 이끌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문턱 높은 할리우드에서 숱한 도전 끝에 흥행 감독 타이틀을 단 존 추 감독이 차기작으로 선택한 영화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잘 만들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중국인 아버지와 대만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중국계 미국인이다. '스텝 업 3D'(2010)를 통해 영상미와 음악을 조련하는데 센스를 보여준 존 추는 이번 영화에 자신의 장기를 아낌없이 발휘했다. 마치 한 편의 패션쇼나 뮤지컬처럼 거부들의 세계를 화려하고 현란하게 그려냈다.    

익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들이 어우러진 아시안 배우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엘레노어 영 역할은 한국 관객에게도 익숙한 양자경이 맡았다.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액션 스타 양자경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연기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레이첼 역할의 콘스탄스 우는 대만계 미국인으로 사랑스러우면서도 당찬 매력으로 씩씩한 신데렐라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말레이시아계 영국인인 헨리 골딩은 이번 작품이 첫 영화이지만, 흠잡을 데 없는 재벌 3세의 모습으로 여심을 흔든다. 

크레이지

한국계 배우들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계 미국인 켄 정과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 배우 아콰피나는 코믹한 캐릭터를 능숙하게 소화하며 영화의 웃음을 책임졌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한 편으로 황색 돌풍을 일으킨 이들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견고한 유리천장(Glass Ceiling)과 대나무천장(Bamboo Ceiling)으로 가로막혔던 할리우드와 미국 관객들의 편견을 깨고 자신의 역량과 매력을 120%씩 발휘했다. 향후 이들이 미국 영화계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궁금해진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영화의 첫 장면에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했다. 자부심에 취한 호기로운 경고가 영화를 보고 나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올까? 참신함이나 깊이를 논하기엔 아쉬움이 남는 영화지만 엄청나게 요란하고 흥겨운 오락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잠자는 사자 중국을 깨우지 마라. 만약 그 사자가 잠에서 깨어나는 날에는 전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China is a sleeping giant. Let her sleep, for when she wakes she will move the world”) -나폴레옹-

존 추 감독은 케빈 콴이 쓴 3부작 중 2번째 이야기 '차이나 리치 걸프렌드'의 영화화도 확정했다. 속편의 주 무대는 중국 본토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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