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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크린 현장

[시네마Y] "뼛속까지 영화인"…故 신성일의 58년 영화史

김지혜 기자 작성 2018.11.05 10:58 수정 2018.11.05 11:17 조회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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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남편은 뼛속까지 영화인이었다. 까무러칠 때까지 영화 생각뿐이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버텨서 오늘날까지 많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배우 엄앵란은 신성일의 빈소에서 남편의 81년 인생을 '뼛속까지 영화인'이라고 정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성일은 죽기 전까지도 영화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한국 영화 역사를 빛낸 좋은 배우였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신성일은 2013년 '야관문:욕망의 꽃'까지 524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특히 1966년 한 해에만 모두 89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신성일 사진변환

양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도 한국 영화의 발전과 번영에 기여했다. 신상옥, 유현목, 이만희, 김수용, 정진우 등 당대 최고 감독의 대표작에 출연하며 충무로 영화사의 중요 페이지를 장식했다. 또한 윤정희, 장미희 등 한국영화 1세대, 2세대 트로이카 여성 배우 모두와 호흡을 맞추며 명실상부 당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남성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신성일은 홀어머니 아래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러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끝에 대구의 명문인 경북중, 경북고에 진학했다. 

성인이 돼 서울로 올라온 신성일은 '한국 배우 전문학원'에 등록하면서 인생이 바뀐다. 1957년 故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신필름이 제작한 '로맨스 빠빠'(1960)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신성일이라는 가명(본명은 강신영)은 신상옥 감독이 '뉴 스타 넘버원'이라는 의미를 담아지어 준 이름이다. 

19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첫 주연을 맡았으며, 1964년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덤에 오른다. 길거리 삶을 사는 폭력배 서두수 역을 맡아 반항적이면서도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매력을 어필했다. 이 영화에서 인생의 반려자 엄앵란을 만나 세기의 결혼식도 올렸다. 

맨발
신성일

멜로 영화에서도 맹활약했다. '초우'(1966), '만추'(1966년), '안개'(1967년), '별들의 고향(1974) 등이 대표적이다.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만추'는 2010년 현빈, 탕웨이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신성일은 1960년대 초반 청춘 영화에 참여하며 스타로 발돋움한 후 문예영화를 통해 배우로 성장했고,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에서 중후한 중년의 얼굴을 만들어갔다. 또한 그는 멜로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사극, 액션, 사회 물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배우로서의 외연을 확장했다. 

신성일은 '한국의 제임스 딘'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단순히 잘생기기만 한 배우가 아니라 그만의 남성미와 아우라가 있었다. 특히 불안하지만 매력적인 청춘의 이미지를 외모와 연기로 여성 팬들의 독보적인 사랑을 받았다. 

신성일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 제작자로도 활약했다. 1971년 영화 '연애 교실'로 감독 데뷔했으며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년), '그건 너'(1974년)까지 총 4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89년에는 영화사 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지난 2013년에는 영화 '야관문:욕망의 꽃'으로 20년 만에 연기에 복귀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종섭 역을 맡아 젊은 간병인에게 생의 마지막 욕망과 꿈같은 사랑을 느끼는 연기를 펼쳤다. 

2017년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회고전 기자회견에 참석한 신성일은 "난 '딴따라'가 아닌 영화인으로 살아온 자부심이 있다"며 영화 인생을 자평했다.   

또한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에서는 "은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영화인"이라며 "올바른 한국 영화 정신을 지닌 영화인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한평생 영화인으로 살고, 영화인으로 죽기를 바랐던 그의 바람처럼 신성일은 관객, 동료, 후배들의 마음속에도 영원한 영화인으로 남을 것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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