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퀸은 싸우며 성장했다…모두가 천재였던 4인방

김지혜 기자 작성 2018.12.07 08:25 수정 2018.12.07 17:26 조회 6,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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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우리는 부적응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부적응자들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프레디 머큐리는 엘튼 존의 매니저 존 리드와 만난 자리에서 '퀸'(Queen)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퀸의 활동상을 돌이켜보면 이 대사가 퀸과 퀸 음악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1973년부터 1991년까지 약 20년간 영국에는 두 명의 여왕이 있었다. 그리고 "난 스타가 아닌 전설이 될 거야"라는 프레디 머큐리의 선언은 예언이 됐다.

퀸은 당시로는 드물게 멤버 4인 모두가 학사 출신인 엘리트 록 밴드였다. 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일링 컬리지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명문 임페리얼 컬리지에서 천체물리학을 공부했으며, 드러머 로저 테일러는 호스피털 메디칼 컬리지에서 치의학을 전공했다. 베이시스트 존 디콘은 킹스 컬리지에서 전자 공학을 공부했다.

영화 속에서 '보헤미안 랩소디' 녹음을 위해 록필드 농장에 마련된 스튜디오에 모인 4인은 서로 작곡한 노래를 평가하며 작은 말다툼을 벌인다. 이때 존 디콘은 일갈한다. "대부분의 밴드는 망하는 게 아니라 찢어져"라고. 톱 밴드들은 앨범이 망하거나 인기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멤버 간 불화로 해체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보헤미안

퀸은 활동한 18년 간 무수한 히트곡을 냈지만, 인기의 부침도 있었다. 그러나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재능과 노력으로 극복해나갔다. 크고 작은 다툼도 있었지만 '퀸'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개인 활동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후 다시 원팀이 돼 무대에 올랐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으로 오프닝을 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라이브 에이드의 공연으로 막을 내리는 구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이들은 갈등 관계에 있다가 무대에 오르진 않았다.

사실 관계를 따지자면 당시 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선 시티(Sun City)에서 콘서트를 열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인종차별이 심한 휴양지에서 공연을 한 것에 대해 지탄받은 후 사과 성명까지 낸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에티오피아 난민을 돕는 '라이브 에이드'에 참여하는 것은 면죄부를 위한 의도적 행동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심 끝에 최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성공적으로 공연을 치러냈다.

퀸의 매니저, 프로듀서 등은 입을 모아 말했다. 멤버 모두 하나같이 자기주장이 강하고 개성이 뚜렷했다고. 그런 만큼 크고 작은 다툼도 적잖았다.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몇 차례 인터뷰에서 음반을 만들 때마다 멤버 간 음악적 견해로 대립각을 세웠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갈등이 10집 '핫 스페이스'(Hot space)를 둘러싼 이견차다. 다만 이들에게 싸움은 전쟁이 아닌 성장의 일환이었다.

무수한 명곡들도 의견 대립과 다툼 끝에 완성된 결과물이다. 작곡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한 명 일지라도 곡에 대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편곡에 가담하는 등 공동 작업도 적잖았다. 퀸은 한, 두 명의 멤버가 주도적으로 작곡을 담당한 여타 밴드들과 달리 네 멤버 모두 작곡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퀸

◆ 프레디 머큐리...멜로디 창조의 천재

프레디 머큐리는 '퀸의 모차르트' 같은 존재였다. 귀에 쏙쏙 박히는 멜로디를 천부적인 재능으로 만들어냈다. '킬러 퀸'(Killer Queen),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 '썸바디 투 러브'(Somebody To Love),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 '굿 올드 패션 러버 보이'(Good Old Fashioned Lover Boy), '돈 스탑 미 나우'(Don't Stop Me Now), '크레이지 리틀 띵 콜 러브'(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위 아 더 챔피언스'(We Are the Champions) 등 퀸 하면 떠오르는 주옥같은 명곡을 작곡했다.

대표곡 '보헤미안 랩소디'는 오늘날 퀸을 있게 한 대표곡으로 하드록과 오페라, 아카펠라를 오가는 드라마틱한 형식과 다채로운 멜로디 구성을 자랑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이 곡에 대해 "세 곡으로 만들려던 걸 한 곡으로 합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록에 오페라를 결합한 실험적인 시도는 당대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대중은 시대를 앞서 나갔던 프레디의 천재성에 열광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발매 당시 영국 차트에서 9주간 1위에 올랐으며 영국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로 기록됐다. 프레디 머큐리 사후 재발매돼 다시 한번 영국 싱글 차트에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보헤미안

퀸의 첫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인 '크레이지 리틀 띵 콜 러브'(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프레디 머큐리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향을 받아 만든 곡이다. 당시 퀸은 독일 뮌헨에서 새 앨범을 준비 중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이 노래를 목욕하면서 10분 만에 만들었다.

프로듀서 레인홀드 맥은 "프레디 머큐리가 멜로디를 만든 후 전화로 빨리 녹음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면서 "브라이언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해. 걔 오면 시간 더 걸려"라고 독촉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프레디 머큐리에게 브라이언 메이는 음악적 시어머니였던 것이다. 의견 교환은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지만, 과정은 스트레스가 되기도 됐다.

이 노래는 피아노로만 작곡을 했던 프레디 머큐리가 유일하게 기타를 사용한 곡이다. 그러나 기타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지 않았기에 3~4개의 단순한 코드로 구성돼있다. 단순한 게 가장 중독성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결과기도 하다.

보헤미안

◆ 브라이언 메이, 퀸의 대들보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팀 내에서 대들보 같은 역할을 했다. 나이는 프레디 머큐리보다 한 살 어렸지만, 맏형 역할을 하며 보이지 않게 팀을 이끌었다. 퀸 결성 당시 그는 임페리얼 컬리지에서 천체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 활동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퀸에 매진했다.

브라이언 메이의 '레드 스페셜'은 그와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수제 기타로 지금까지도 사용 중이다.

기타 연주 실력만큼이나 작곡 실력도 출중했다. '나우 아임 히어'(Now I'm Here), '타이 유어 마더 다운'(Tie your mother down), '서티 나인'(39), '팻 바텀 걸스'(Fat Bottomed Girls),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 '해머 투 폴'(Hammer To Fall), '더 쇼 머스트 고 온'(The Show Must Go On), '투 머치 러브 윌 킬 유'(Too Much Love Will Kill You) 등의 히트곡을 만들었다.

이 중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위 윌 록 유' 탄생기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극화돼 등장한다. 이 노래의 비화에 대해 브라이언 메이는 인터뷰에서 "영국 투어 중 공연장에 들어찬 관객들이 '킬러 퀸'을 떼창 하는 모습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록 밴드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공연은 없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는 You'll never walk alone'(영국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응원가)를 불러주더라. 집에 와 잠들기 전에 '관객들에게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생각했다. 사람들로 꽉 찬 공연장에서 관객들은 발을 구르거나 박수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게 다니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위 윌 록 유'를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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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과 관객이 하나 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브라이언 메이는 멤버들이 발을 굴리고 손뼉 치는 소리를 오버 더빙한 뒤 딜레이 이펙트를 넣어 수 천명이 만들어낸 듯한 효과를 얻었다. 그렇게 완성된 '위 윌 록 유'는 실제 공연장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수천, 수만 관객의 발소리와 손뼉 소리가 합쳐진 소리는 녹음된 음악이 선사하는 쾌감을 넘어선 감동을 선사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 사후 학업을 재개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영국 리버풀 소재 존 무어스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퀸에 대한 열정을 버리진 않았다. '아메리칸 아이돌' 출신의 아담 램버트를 보컬로 영입해 로저 테일러와 함께 퀸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퀸의 히트곡으로 구성된 '위 윌 록 유'라는 뮤지컬을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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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저 테일러, '라디오 가가'로 제2의 전성기를

퀸의 미남 드러머 로저 테일러도 만만찮은 작곡 실력을 자랑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는 '아임 인 러브 위드 마이 카'(I'm in love with my car)를 두고 멤버들이 놀리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노래는 미국 매체 '얼티밋 클래식 록'(Ultimate Classic Rock)이 선정한 로저 테일러의 베스트곡으로 꼽혔다.

이 밖에 'News of the world'(1977) 앨범의 '쉬어 하트 어택'(Sheer Heart Attack)', 'A Kind of Magic'(1986) 앨범의 동명 넘버 '어 카이드 오브 매직'(A Kind of Magic)', 'Innuendo'(1991) 앨범의 '디즈 아 더 데이즈 오브 아워 리브스'(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 등을 만들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로저 테일러가 만든 최고의 히트곡은 'The Work'(1984) 앨범에 수록된 '라디오 가가'(Radio GaGa)다. 이 노래는 싱글로 발매돼 영국 차트 2위까지 올랐으며, 19개 국가에서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퀸은 앞선 앨범 'Hot Space'(1982)가 평단은 물론 팬들의 외면을 받으며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라디오 가가'는 약 4년 만에 탄생한 메가 히트곡이었다.

보헤미안

이 노래는 MTV의 등장으로 외면받고 있는 라디오에 대한 추억과 향수, 애정을 담았다. 제목은 로저 테일러가 어린 아들의 옹알이에서 착안해 지은 것이다. 팝 가수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이름도 이 노래에서 따왔다. '라디오 가가'는 '위 윌 록 유', '위 아 더 챔피언스' 등과 함께 관객의 호응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곡이다.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두 번째 곡으로 등장해 객석의 떼창과 율동을 이끌어냈다.

로저 테일러는 빼어난 실력의 드러머일 뿐만 아니라 노래 실력도 상당했다. 매력적인 탁성에 고음도 잘 뽑아내 퀸의 백 보컬 역할도 충실히 했다. 특히 프레디 머큐리의 성대가 건강으로 안 좋을 때마다 빛을 발했다. 시너지를 낼 때와 약점을 보완해야 할 때를 직감적으로 아는 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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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디콘이 만든 퀸의 히트곡...미국을 사로잡다

팀의 막내인 베이시스트 존 디콘은 과묵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유어 마이 베스트 프렌드'(You're my best friend), '스프레드 유어 윙스'(Spread Your Wings),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Another One Bites the Dust),'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I Want to Break Free)등을 만들었지만 멤버들 중 작곡 참여도는 가장 낮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곡은 홈런을 날렸다.

대표곡이 'The Game(1980) 앨범에 수록된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Another One Bites The Dust)다. 베이스 리프가 중독성을 발휘하는 디스코 곡으로 퀸에게 '크레이지 리틀 띵 콜 러브'(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에 이어 빌보드 차트 두 번째 1위를 선사한 히트곡이다. 이 노래는 앨범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싱글로 발매할 계획이 없었다. 로저 테일러는 종전 퀸의 음악 컬러와 너무 다르다며 앨범 수록도 반대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먼저 들은 마이클 잭슨은 프레디 머큐리에게 "이 곡을 싱글로 발매하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이에요"라고 말하며 싱글 발매를 권유했다. 멤버들이 마음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3주간 1위에 올랐고, 핫 100에 장장 31주간이나 머물렀다. 미국에서의 인기는 흑인 팬들이 주도했으며, 이 싱글은 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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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놈 흙으로 돌아갔네'라는 제목, 갱들의 암투를 다룬 듯한 가사 탓에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이 노래는 '위 윌 록 유', '위 아 더 챔피언스' 다음으로 스포츠 경기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 특히 권투 경기에서 상대 선수를 KO 시켰을 때 흐르는 곡으로 유명하다.

퀸과 데이비드 보위가 만들고 불러 영국 차트 1위에 오른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 역시 존 디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노래다.

스위스 몽트뢰에서 신보를 준비하던 퀸의 스튜디오에 데이비드 보위가 찾아왔다. 연주를 하면서 어울리다가 공동 작업에 대한 뜻이 모아졌다. 그때 존 디콘이 "딩딩디기링 딩딩"이라는 베이스 리프를 즉흥적으로 떠올렸다. 이후 피자를 먹으러 간 사이 디콘이 베이스 리프를 까먹는 참사가 발생했지만, 로저 테일러의 기억력으로 '언더 프레셔'는 탄생할 수 있었다.

존 디콘은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후 "프레디를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It is impossible to replace Freddie.)라고 말하며 활동을 중단했다. 1992년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 1993년 로저 테일러가 기획한 자선 콘서트에 이어 1997년 엘튼 존과 함께한 '더 쇼 머스트 고 온'(The Show Must Go On) 무대를 끝으로 은퇴했다. 

ebada@sbs.co.kr

<* 참고 자료: BBC 다큐멘터리 'Queen Days Of Our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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