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왜곡인가 극화인가?…'그린 북', 진실 혹은 거짓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1.16 13:35 수정 2019.01.18 16:02 조회 25,618
기사 인쇄하기
그린 북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그야말로 '손난로' 같은 영화다. 뭉근하게 달아오른 후 뜨거운 감동을 선사하고야 만다. 소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소소한 웃음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다. '그린 북'(감독 피터 패럴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린 북'은 하늘이 내린 천재 뮤지션이라는 극찬을 받은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와 백인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가 남부 투어를 함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 두 남자의 우정을 통해 1960년대 미국을 지배하고 있던 인종차별에 일침을 가하고 우정과 가족애의 메시지까지 전하는 수작이다.

영화의 제목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출간된 흑인 전용 여행 가이드북을 뜻한다. 흑인 여행자들이 이용 가능한 숙박 시설, 레스토랑, 주유소 등의 정보가 들어있는 책자다.

다인종 사회를 살고 있는 미국인에게 이 영화가 전한 울림은 적지 않았다. 다소 전형적인 설정과 흐름을 보여주지만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영화 중에서는 드물게 오락성이 높다. 이는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등 코미디 영화에서 발군의 역량을 발휘해온 피터 패럴리 감독의 내공과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의 근사한 연기 덕분 때문이다.

그린 북

오스카 레이스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6일 열린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그린 북'은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 시상식 전망을 밝혔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역작 '로마'가 멕시코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임을 고려하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린 북'의 수상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다.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 8일 개봉한 영화는 개봉 6일 만에 전국 1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다양성 영화 시장에서 훈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린 북'은 북미 개봉 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영화의 실존 인물인 돈 셜리의 유가족이 "사실을 왜곡했다"라고 항의하고 나선 것. '그린 북'의 각본은 또 다른 실존 인물인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가 썼다. 진정성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샀던 영화가 유가족의 반발을 얻자 많은 이들은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린 북'을 둘러싼 진실 혹은 거짓을 짚어봤다.

그린 북

◆ 돈 셜리는 누구?

도널드 월브리지 셜리(Donald Walbridge Shirley)는 1927년 1월 29일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에서 자메이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한때 출생지가 자메이카의 킹스턴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홍보 담당자의 실수였다.

영화에도 언급됐듯 셜리는 2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9살 때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가톨릭 대학에서 콘래드 베르니에와 테디어스 존스와 함께 공부했다. 또한 1945년 18세의 나이로 딘 딕슨, 보스턴 팝스와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플랫 단조를 연주했고, 1년 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했다.

흑인 피아니스트가 클래식 음악계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셜리는 피아노 연주를 그만두고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언어, 문학과 그림에도 상당한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다시 음악으로 돌아와 앨범 발매 및 연주 투어에 집중했다. 셜리는 오르간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첼로 협주곡, 세 개의 현악 사중주곡, 단막 오페라, 오르간, 피아노, 바이올린 연주곡, 소설 '피네간스 웨이크'(제임스 조이스 著)에 바탕을 둔 교향곡 등 다양한 작곡 활동을 펼쳤다. 1961년 발표한 싱글곡 '워터 보이'(Water Boy)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40위까지 올랐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 초반 미국 남부 지방 연주 투어를 했다. 이때 토니 발레롱가를 운전사 겸 보디가드로 기용했다. 영화에서는 남부 투어가 두 달 여정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1년 6개월에 걸쳐 이뤄졌다.

또한 돈 셜리는 50년 넘게 카네기 홀에서 살며 1년에 한 번씩 그곳의 무대에 올랐다. 

셜리는 1952년 한차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201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린 북

◆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는 실제로도 친했을까?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죽기 전인 2013년까지 이어졌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1960년 초반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이 50년 동안 이어졌다는 사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돈 셜리의 동생인 모리스 셜리는 "형과 토니는 친구가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토니의 전문성 부족으로 투어 2달 만에 해고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모리스의 아내 역시 "토니는 운전기사였을 뿐"이라고 못 박았다.

유가족들은 영화 속에서 돈 셜리가 동생과 연을 끊고 사는 설정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가족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흑인 사회와도 거리를 두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돈과 토니의 우정이 실제보다 부풀어졌을 가능성은 있다. 반대로 돈 셜리의 성격상 조용하게 토니와의 친분관계를 이어갔을 가능성도 적잖다. 실제로 돈의 가까운 지인들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우정을 유지했다고 제작진에게 전했다. 가족 관계라 할지라도 친구 모두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가족은 '그린 북'의 영화화가 아들 닉 발레롱가 주도로 이뤄진 것이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인의 시선에서 본 흑인이라는 점, 백인은 구원자고 흑인은 수혜자로 읽힐 수 있는 요소들도 지적했다.

그린

닉 발레롱가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녹음테이프와 편지 등을 근거로 '그린 북'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1980년대 돈 셜리를 찾아가 영화화 허락을 구했다. 처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던 돈 셜리는 "내가 죽은 후에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닉 발레롱가의 주장일 뿐 영화화를 허락받았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유가족의 완전한 동의 없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그린 북'의 큰 흠집이다. 의도와 결과가 좋았다 해도 과정의 미숙함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일지라도 극화와 각색은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 속 대부분의 일이 사실("everything in the film is true.")이라고 주장한 닉 발레롱가의 발언도 유가족의 분노를 샀다.

피터 패럴리 감독은 영화화 과정에서 돈의 유가족과 연락이 잘 닿지 않아 돈의 측근과 접촉했다고 밝혔다. 패럴리 감독은 "내가 얻은 최악의 비난은 '흑인을 이용해 돈을 버는 백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돈벌이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투어가 토니의 시선을 바꿔놓은 것은 사실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토니는 인종차별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토니는 대대로 이탈리아인이 사는 동네에서 그들만의 세계와 문화를 구축하며 살았다. 그렇지만 토니는 셜리와의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인종에 대한 선입견도 허물었다.

그린

◆ 마허샬라 알리는 피아노도 잘 쳐? 핸드싱크의 비밀

돈 셜리로 분한 마허샬라 알리는 완벽한 연기로 영화의 품격을 높였다.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8개 국어에 능해 '박사'로 불리기까지 했던 돈 셜리의 기품있는 내·외면을 성실한 연기로 표현해냈다. 2017년 영화 '문라이트'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은 받은 마허샬라 알리는 '그린 북'으로 또 한 번 오스카 트로피에 도전한다.

토니 역의 비고 모텐슨이 닉 발레롱가의 가족과 어울리며 연기에 적극 반영한 것과 달리 마허샬라 알리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품격있는 흑인 아티스트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마허샬라 알리는 돈 셜리의 내외면을 훌륭하게 연기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 연기도 수준급으로 해냈다. 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전문가(크리스 보워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영화에서 연주하는 곡들을 마스터 한 뒤 촬영에 임했다.

그러나 클로즈업에 등장하는 손은 마허샬라의 손이 아니다. 크리스 보워스의 것이다. 크리스 보워스는 촉망받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이번 영화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그린

◆ 하정우도 울고 갈 '치킨 먹방'은 옥에 티?

'그린 북'은 보고 나면 먹고 싶어지는 영화다. 도무지 친해지지 않을 것 같은 흑인 피아니스트와 백인 운전사는 음식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연다.

켄터키에 도착한 토니 발레롱가는 "켄터키에 왔으면 치킨을 먹어야지"라면서 운전 중 맨손으로 치킨을 먹는다. '바삭바삭' 씹는 소리를 내며 먹방을 해대는 토니의 모습에 돈은 두 손을 들고 만다. 맨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교양 있는 피아니스트는 끝내 두 손 가득 기름을 묻히고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뜯고야 만다. 두 사람이 영화 안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나누며 마음을 여는 따뜻한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옥에 티다. 두 사람이 남부 투어에 나선 것은 1960년대 초.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은 1972년에 처음 소개됐다.

돈 셜리의 유가족은 영화 속 치킨 먹방에도 딴지를 걸었다. 남부 투어 전에도 치킨을 즐겨 먹었다는 것. 이 정도는 영화적 재미를 위해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ebada@sbs.co.kr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