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백인 잔치' 아카데미가 변했다…올해의 진풍경은?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2.25 16:52 수정 2019.02.25 17:26 조회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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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백인들의 잔치' 혹은 '그들만의 축제'라는 오명을 썼던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환골탈태(換骨奪胎)의 노력을 보였다.

2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피터 패럴리 감독의 영화 '그린북'이 작품상을 받으며 막을 내렸다.

넷플릭스 제작의 영화 '로마'가 최다 부문(10개) 후보에 지명되고 상업영화라 할 수 있는 '블랙 팬서'가 7개 부문, '보헤미안 랩소디'가 총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돼 눈길을 끌었지만 실화를 기반으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 '그린북'에 최고의 영예를 안겼다.

작품성에서 우위를 있는 것으로 보였던 '로마'의 수상이 유력시되는 분위기였지만 작품상을 '그린북'에 안겨 보수 성향의 '아카데미스러운 선택'이었다는 비판적 시선도 적지 않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편집상, 음향편집상·음향효과상까지 시상식 최다인 4관왕에 오르며 실속을 차렸고, '블랙 팬서'는 미술상과 의상상, 음악상을 받으며 '마블의 아카데미 입성'이라는 화제성을 넘어서는 성취를 거뒀다.

개최 전부터 유독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상식이었다. 아카데미에 대한 미국 내 대중의 관심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가운데 열린 시상식인 만큼 변화와 진화에 대한 시도와 노력이 엿보였다.

그린 북

◆ 아카데미의 새 흐름…'검은 돌풍'과 '마블' 그리고 '넷플릭스'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결과에서 새로운 흐름은 흑인과 마블 그리고 넷플릭스가 주도했다.

2015년과 2016년 시상식에서 남녀 주·조연상 후보 20명을 백인들로 채워 '화이트 오스카'(OscarsSoWhite) 논란의 정점에 섰던 아카데미는 최근 3년간 지속적으로 흑인 영화인의 후보 지명과 수상 비중을 늘리며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아카데미 수상작(자)을 결정하는 약 6,000명의 아카데미 위원 중 유색인종의 비율은 예년만 해도 10%대에 머물렀지만 올해는 38%까지 증가했으며, 여성도 49%까지 증가했다.

최초의 흑인 히어로를 내세운 '블랙 팬서'는 지난해 개봉한 마블 영화 중 가장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 결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도 해내지 못한 히어로 영화 첫 작품상 노미네이트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비록 작품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백인들이 독식했던 의상상과 미술상, 음악상을 거머쥐며 의미 있는 결과를 냈다.

블랙팬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흑인 거장 스파이크 리도 건재를 과시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주목받은 '블랙클랜스맨'으로 각색상을 받았다. 영화로 미국 내 인종차별에 반기를 들어온 '흑인 사회파' 감독답게 수상 소감에서도 노예제 고통 속에서 성취한 흑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2020년 대선을 통해 인류애를 회복하자고 독려했다.

또 연기 부문에 할당된 4개의 트로피 중 절반을 흑인 수상자가 차지했다. 2017년 '문라이트'로 흑인 무슬림 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마허샬라 알리가 '그린북'으로 두 번째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으며,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에서 열연한 레지나 킹이 여우조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층 높아진 넷플릭스 작품의 영향력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로마'는 작품상을 비롯한 총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3개 상을 수상했으며, '피리어드 엔드 오브 센텐스'는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넷플릭스는 '로마'의 아카데미 입성을 위해 온라인과 극장에 동시 개봉했으며, 아카데미 캠페인 홍보비로만 3천만 달러(한화 약 336억 원)를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극장 개봉을 전제하지 않은 넷플릭스 제작의 영화가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할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으나 보수 성향을 다 버리지 못한 아카데미는 감독상을 주는 것으로 개방의 폭을 보여줬다.

로마

◆ "쓰리 아미고!" 美 아카데미 지배한 멕시코 '영화 천재들'

"그라시아스! 그라시아스!"(Gracias: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스페인어)

올해에도 어김없이 스페인어 수상 소감이 나왔다. '쓰리 아미고' (Three Amigos: '세 친구들'이라는 의미의 스페인말로 할리우드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멕시코 출신 세 절친 감독을 일컫는 말)'의 맏형 격인 알폰소 쿠아론의 입을 통해서다.

2014년 시상식에서 '버드맨'으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지난해 시상식에서 '셰이프 오프 워터'로 작품상, 감독상을 받은 기예르모 델 토로에 이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감독상과 촬영상을 받았다.

알폰소 쿠아론은 2013년 SF 영화 '그래비티'로 감독상을 받은 데 이어 6년 만에 멕시코 언어로 만든 자전적 드라마로 두 번째 감독상 트로피를 받았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직접 카메라까지 들어 아카데미 91년 역사상 처음으로 감독이 촬영상을 받는 새 역사를 쓰기도 했다. 이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시상자로 나서 절친의 이름을 호명하는 흥미로운 순간을 연출했다.

최근 6년 사이 '쓰리 아미고'는 다섯 차례나 아카데미 감독상을 나눠 가지며 멕시코의 거장을 넘어 미국 최고의 영화 시상식까지 석권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장벽을 쌓겠다고 선언했지만 영화 천재들의 할리우드 활약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라미

◆ '남자 신데렐라' 탄생…오마 샤리프를 넘은 라미 말렉

아카데미 최고의 영예는 작품상이지만 가장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는 남녀주연상 배우에게 쏟아진다. 매년 여우주연상 부문에서 신데렐라가 탄생하곤 했지만 올해는 '남자 신데렐라'가 탄생했다. 바로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미 말렉이다.

영국 밴드 퀸의 일대기를 다룬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라미 말렉은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했다. 보컬 레슨과 피아노 레슨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글램룩 의상에 의치까지 끼고 연기해 내·외면을 '프레디 머큐리 화'했다. 촬영 중 브라이언 싱어 감독과 불화를 겪기도 했지만 흔들림 없이 연기한 끝에 "프레디 머큐리의 환생"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보헤미안

이날 라미 말렉이 트로피를 놓고 경합을 벌인 배우는 '바이스'의 크리스찬 베일, '그린북'의 비고 모텐슨, '앳 이터너티스 게이트'의 윌렘 대포, '스타 이즈 본'의 브래들리 쿠퍼였다. 연기력과 경력에 있어 비교가 안 되는 대선배였다. 그러나 명배우도 운이 따라야만 받는다는 오스카 트로피를 첫 후보 지명 만에 거머쥐며 이집트계 배우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이는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배우 오마 샤리프로 일궈내지 못한 성취다. 그 역시 수상 소감에서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말하며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영화 촬영 후 사랑에 빠진 루시 보인턴을 호명하며 "이 영화의 중심이고 제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라고 공개적인 애정 표현을 하기도 했다.

이집트계 미국 배우인 라미 말렉은 2004년 미국 TV 드라마 '길모어 걸스'로 데뷔했으며, 2006년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2012년 '브레이킹 던 part2'을 통해 주목받았다. 2016년 미국 TV 드라마 '미스터 로봇'에서 마약 중독자를 연기해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보헤미안 랩소디'다.

◆ 30년 만에 사회자 공석…스페셜 시상자 어땠나

올해 시상식은 어느 해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해 시상식이 역대 최저 시청률을 기록하자 주관사인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대표적인 것이 인기 영화상 신설과 비인기상 시상 시 광고 전환 등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안은 관객과 배우, 감독 미국촬영감독협회의 반발 끝에 무산됐다.

시상식 한 달여를 앞두고 큰 암초를 만나기도 했다. 일찌감치 코미디언 케빈 하트를 사회자로 낙점했지만 과거 SNS에 남긴 성 소수자(LGBTQ) 비하 발언이 물의를 일으키자 중도 하차했다. 여러 대체 사회자를 섭외했으나 대부분 부담을 느껴 고사했다. 결국 아카데미는 1989년 이후 30년 만에 사회자 없는 시상식을 열었다.

아카데미는 진행자 없는 시상식을 열되 시상에 나설 스페셜 시상자들을 초청했다. 줄리아 로버츠, 브리 라슨, 사무엘 잭슨, 하비에르 바르뎀, 다니얼 크레이그, 크리스 에반스, 마야 루돌프, 티나 페이, 샤를리즈 테론, 양자경, 아콰피나 등이었다. 백인과 흑인, 동양계, 스패니쉬계 등 인종과 국적을 다양화한 구성이었다.

아카데미

첫 시상에 나선 세 여성 코미디언 티나 페이, 마야 루돌프, 에이미 포울러는 "올해 시상식에는 진행자가 없습니다. 인기 영화상도 없고요. 멕시코는 장벽을 위한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아, 그리고 시상 중 광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단 시상 이후에 광고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라고 AMPAS에 대한 일침을 날려 웃음을 자아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로 스페인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하비에르 바르뎀은 외국어 영화상 부문 시상에 나서 스페인어로 시상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작품상 8편을 소개하는 중요 임무는 테니스 스타 세레나 윌리엄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셰프 호세 안드레스와 같은 외부인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들만의 잔치'라는 부담을 떨치고 다양성을 보여주고자 한 시도였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각종 암초를 딛고 무난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시상식 초반, 비인기 부문 수상자들의 소감 시간에 너무 빨리 음악을 틀어 흐름을 끊는다던가 퀸의 특별 오프닝 공연을 비롯해 주제가상 공연 시간을 너무 짧게 배치해 완곡을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겼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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