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영화 스크린 현장

[시네마Y] '흑인' 스파이크 리는 왜 '그린북' 작품상에 분노했나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2.26 15:17 수정 2019.02.26 16:56 조회 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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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리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스파이크 리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환희와 분노 극단의 두 감정을 드러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스파이크 리는 '블랙클랜스맨'으로 각색상을 수상했다. 데뷔 33년 만에 받은 첫 번째 오스카 트로피였다.

각색상 시상자로 나선 이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흑인 배우이자 스파이크 리의 대표작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에도 출연한 바 있는 사무엘 L. 잭슨이었다. 잭슨은 봉투에 쓰인 반가운 이름을 신나게 호명했고 스파이크 리는 요란스럽게 기쁨을 표시하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폴짝 뛰어올라 사무엘 잭슨에게 안겼다.

이날 보라색 수트를 입고 '사랑'(LOVE)과 '증오'(HATE)가 새겨진 반지를 착용한 스파이크 리는 "이 나라를 만든 사람들, 원주민을 모두 죽인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며 "곧 2020년 대선이 찾아온다. 우리 모두 역사의 옳은 편에 서자. 사랑 대 증오 사이에서 도덕적 선택을 하자. 옳은 일을 하자(Do the Right Thing). 내가 이 말을 해야 했다는 걸 여러분도 알 것이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혀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린 북

그러나 스파이크 리의 환희는 불과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분노로 바뀌었다. 작품상 수상작에 '그린북'이 호명되자 손을 내저으며 돌비 극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 '블랙클랜스맨'의 제작자이자 '겟아웃'을 연출한 조던 필 감독의 만류로 인해 자리를 뜨지는 않았지만 작품 수상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를 등지고 앉아있었다.

시상식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스파이크 리는 이 행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마치 내(프로농구 팀 '뉴욕 닉스'의 골수팬)가 가든(뉴욕 닉스의 홈구장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지칭)에 가서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았는데 심판이 말도 안 되는 판정을 내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라고 답했다.

작품상 후보에 오른 '블랙클랜스맨'이 '그린북'에 밀려서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그린북'의 작품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그린북'도 '블랙클랜스맨'과 마찬가지로 미국 내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영화다. 다만 스파이크 리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다른 영화일 뿐이다.

'그린북'은 1962년 미국,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와 허풍과 주먹이 전부인 그의 새로운 운전사이자 매니저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가 미국 남부로 콘서트 투어를 다니며 기대하지 않았던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피터 패럴리 감독이 연출하고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가 주연했다.

그린 북

분명 이 영화는 재미에 감동까지 갖춘 수작이다. 게다가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실화 기반의 이야기다. 영화 속 사실상의 화자인 백인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는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 박사와의 공연 투어를 하며 인종차별주의적인 시선을 거둔다. 셜리 박사는 세상의 차별에 마음의 문을 닫았지만, 토니를 만나고 서서히 변화한다.

이 영화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중에는 철저히 백인의 관점에서 만든, 백인이 좋아할 만한 흑인 인권 영화라는 지적이 있다. 또한 셜리 박사의 유족이 제기한 실화 왜곡 논란, 각본가 닉 발레롱가의 무슬림 혐오 트윗, 감독 피터 패럴리가 과거 여배우(카메론 디아즈)에게 한 부적절한 행동 등은 인권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진정성에 적잖은 금을 내기도 했다.

특정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스파이크 리가 비교적 균형적 관점에서 인권 영화를 만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탐탁지 않다고 해서 '그린북'의 영화적 가치까지 폄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 영화 매체 버라이어티는 스파이크 리의 반응을 두고 "백인 구원자 서사를 지속시켰다는 영화에 대한 비판과 궤를 같이 하는 행동"이라고 전했다.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 출신인 스파이크 리는 한 평생 영화로 흑인의 인권을 이야기해왔다. 1986년 '그녀는 그것을 좋아해'로 데뷔해 '똑바로 살아라', '모베터 블루스', '정글 피버', '맬컴 X' 등을 만들며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흑인 영화인의 설자리는 좁았다. 스파이크 리가 1990년 만든 '똑바로 살아라'는 그해 나온 가장 우수한 영화였지만 작품상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 아카데미 작품상은 백인 노인 여성과 흑인 운전기사의 교감을 다룬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차지였다.

스파이크

시대가 바뀌어도 아카데미의 보수성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스파이크 리는 지난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명예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불참했다. 아카데미가 2년 연속 남녀 연기 부문의 후보 40명을 백인으로만 채웠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SNS에 "우리(흑인)는 연기를 못하는가? 비록 안전하지도, 정치적이지도, 대중의 지지를 얻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해야 할 때가 있다"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명언을 인용한 글을 올렸다.

이어 "진정한 전투지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아닌,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TV, 케이블 네트워크에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아카데미는 백인 잔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며 아카데미 시상식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3년이 흘렀다. 아카데미는 외부의 비판 어린 시각을 수용한 듯 변화의 제스추어를 보여주고 있다. 흑인 배우들의 후보 지명과 수상, 다인종 영화인의 시상 참여 확대,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영화에 대한 선호를 보인다고 해서 시상식이 진정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의도가 엿보이는 변화는 엇박자를 내기 마련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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