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수)

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 '우상' 이수진 감독 "자유로운 해석 환영, 오독은 아쉬워"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3.27 16:24 수정 2019.03.28 09:01 조회 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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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우상'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으로부터 출발한다. 빛이 향하는 곳은 서울 광화문 광장의 한 동상이다.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족보 속 조상은 몰라도 이 동상의 존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수진 감독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우상의 전형'으로 꼽히는 위인의 목을 날리며 영화를 시작한다. '우상은 곧 허상'이라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오프닝이다. 적어도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하고 명확해 보였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나뉘고 있지만 적어도 만듦새만큼은 한 땀 한 땀 공들인 티가 난다. 이수진 감독은 결과물에 만족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10여 년 넘게 품어온 이야기를 마침내 완성한 것에 대한 감격일까 아니면 홀가분함일까. 영화를 둘러싼 평가에 담담하게 반응했다.

2014년 독립영화 '한공주'로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받았던 이수진 감독도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 첫 번째 결과물에 비해 두 번째 결과물이 흥행이나 완성도에 있어 부진한 것을 뜻하는 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5년 만에 내놓은 '우상'은 평단과 관객의 갸우뚱한 반응을 얻고 있다. 명백하게 '비판'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좋다', '싫다'의 반응보다는 '모르겠다'는 반응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우상'은 어려운 영화일까. 감독이 어렵게 풀었거나 관객이 어렵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봉 7일간 이 영화를 만난 관객은 15만 명에 머물러 있다. 다소 안타까운 성적이다.

"이 영화는 2007년 처음 구상을 했다. 초고를 완성한 것은 2008년쯤이다. 그때는 투자도 안 됐다. 그래서 '한공주'를 먼저 만들었다. 이후 조금 덜 무거운 영화를 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자꾸 '우상'이 생각이 나더라. 시나리오를 다듬기 시작했다. 2008년 버전과 비교하면 큰 변화가 생겼다. 세 인물의 비중이 비슷해지고 구조나 형식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좀 단순한 이야기였다면 '한공주' 이후에는 형식적으로 좀 더 탄탄한 이야기가 됐달까."

우상

이수진 감독은 앞서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사회에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는데 그 시작이 뭘까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면서 "한 인간이 이루고 싶어 하는 꿈이나 신념이 맹목적으로 변화하는 순간, 그것 또한 우상이 아닐까 생각했고 그것이 작품의 시작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인터뷰 자리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특정한 주제나 범위 안에서 논의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한국 사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너무 관객에게 어렵게 다가갈 것 같다. 우선은 장르 영화로 편하게 즐기시고 난 다음 영화에서 발견하거나 남긴 것들에 대해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관객들이 영화의 어떤 의미를 느껴주신다면 다행이지만 내 입으로 먼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영화에는 세 중심인물 명회(한석규), 중식(설경구), 련화(천우희)가 등장한다. 명회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차기 경남 도지사로 주목받고 있는 도의원이며, 중식은 지체 장애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다. 련화는 결혼을 통해 한국에 정착하고자 하는 중국 연변 출신의 여성이다. 세 인물은 권력, 핏줄, 생존이라는 각자의 우상을 쫓으며 얽히고설킨다.

우상

"중식은 이름에서도 캐릭터를 엿볼 수 있다. 저녁은 밥과 더불어 안주도 곁들인 수 있는 편안한 식사라면 점심은 때우는 느낌이 강하지 않나. 중식은 잠깐 때우듯 바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명회는 한명회의 영향도 있겠지만 정치인 같은 이름을 부여하고 싶었다. 련화는 호적을 사서 직접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과 다른 '연꽃'이라는 뜻의 예쁜 이름을 붙였을 것 같았다."

'우상'은 세 인물 각각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구조를 띤다.

이수진 감독은 "각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과 퇴장하는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찍었다. 그 장면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중식은 차 안 뒷모습으로 시작하고, 명회는 공항에서 첫 등장한다. 컷 구성도 중요했다. 명회의 경우 주차장에서 물을 빼는 장면에도 공을 들였다. 련화도 버스 정류장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첫 장면이 중요했다. 시작의 톤을 잘 잡아야 쭉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우상

'우상'이라는 제목이 세 인물 모두에게 부합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지적을 하자 이수진 감독은 "'제목이 왜 우상이냐', '주제의식이 뭐냐?'라는 질문도 많이들 하시는데 그건 영화를 본 관객이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다. 내가 말하기보다는 관객이 발견해주시기를 바란다"라고 답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이수진 감독은 영화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빛, 물, 비, 피, 낙엽, 동상 등 영화에는 무수한 상징이 등장한다. 닭의 목, 사람의 목, 동상의 목 등 영화에 여러 차례 나오는 '잘린 목'의 이미지도 인상적이다.

"나도 처음엔 신기했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서 보니 '왜 목일까' 싶더라. 나에게 각인된 어떤 이미지가 있었고 이 영화에 투영이 된 것 같다. 가장 확실하고 무서운 죽음이 목이 잘리는 것 아닐까. 왜 하필 이순신 동상이냐고 많이들 묻는다. 그 역시 어떤 이유가 있긴 하지만, 각자의 해석에 맡기도 싶다."

우상

영화의 엔딩에 등장하는 명회의 연설신은 '우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한석규는 히틀러의 연설신에서 영감을 받아 연기했다고 밝혔다.

"영화를 본 한 선배가 전화가 와서 '명회는 그다음에 어떻게 됐을까요?'라고 묻더라. 나는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요?'라고 답했다. 도민들을 앞에 두고 강연하는 장면에서는 명회도 명회지만 내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의 마음으로 보게 되더라. 나는 그동안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지지 않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석규 선배에게 여러 레퍼런스 영상과 자료를 드렸고, 어떤 것을 참조해도 좋지만 방언처럼 들리는 그 말에 리듬감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히틀러 설정은 한석규 선배의 아이디어였다. 말을 이용해 가장 안 좋게 사람들을 현혹시킨 인물이라 그게 투영되면 좋지 않을까라고 제안하셨다. 여러 버전으로 연설신을 준비했고, 지금의 버전이 채택됐다. 잘 들어보면 독일어 단어가 몇 개 나오기도 한다. 한석규 선배가 준비한 말은 언어가 아닌 언어였는데 테이크마다 같은 말로 연설을 하셔야 했다. 뒤에서 찍는 앵글과 앞에서 찍는 앵글이 같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마지막에 촬영된 장면이고 그날은 이 한 신만 내내 찍었다."

'우상'은 촬영 기간 우여곡절이 많았던 영화다. 당초 예상했던 4개월 촬영 기간이 날씨 등의 이유로 2개월가량 늘어났고, 제작비도 증액됐다. 최종적으로 투입된 제작비는 98억원, CGV 아트하우스가 제작한 영화 중 가장 큰 규모의 영화가 됐다. 이를 두고 영화계엔 이런저런 말도 많았지만 감독은 뚝심으로 영화를 밀고 나갔다. 그런 감독을 지지해준 건 배우들이었다.

우상

앞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석규는 "어렵게 작업을 해서 이 영화가 완성이나 될까 싶기도 했다. 어느 날 이수진 감독이 '제가 영화를 만들면서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라는 토로를 하는데 마음이 아팠다. 내가 본 이 사람은 안주하지 않는, 도전적인 감독이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치열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오랜 공백을 두지 않고 차기작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라며 감독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드러냈다.

이수진 감독도 한석규와의 첫 작업에 대해 "큰 힘이 됐다. 한국 영화계의 어른이시다. 경력도 오래되셨고 그만큼 내공도 깊다. 영화를 함께 하면서 좋았던 것은 마치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매 장면 공을 들여 임했다는 것이다. 그게 영화적으로도 잘 표현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만족스러워했다.

'한공주'에 이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천우희에 대해서는 "좀 더 노력해지고 유연해졌달까. 오랜만에 같이 작업을 했지만 이 친구가 많이 성장했구나. 정말로 좋은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구나를 느꼈다. 한국 영화에 보석 같은 배우가 아닌가 싶다"라고 극찬했다.

우상

'우상'의 러닝타임은 2시간 20분이다. 상업 영화로서는 다소 긴 상영 시간이지만 이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했다. 이수진 감독은 "러닝타임을 줄여서 영화가 더 좋아졌다면 줄였을 것 같다. 지금 버전도 종전보다는 많이 줄인 버전이다. 러닝타임은 길지만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볼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지금의 시간을 고수했다. 이건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닌 투자배급사와의 논의 끝에 결정된 것이다. 그들도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긴 영화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했다."

명회를 보면서 이수진 감독은 성악설을 믿는 사람일까라는 사람도 들었다. 이에 대해 이수진 감독은 "인간에게 하나의 면만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를 비춰봐도 내 마음에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누구나 한치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회는 선에서 시작했다가 악으로 간다. 영화 속에서 그가 트라우마로 인해 판타지를 보는 장면도 있는데 그건 그 인물에게 양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수진

이수진 감독은 인터뷰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속 메타포에 대해 말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보는 이에 관점과 시선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해주길 바란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나 '우상'은 불친절한 전개에 무수한 상징이 넘쳐나 오독(誤讀)할 수 있는 여지도 많다.

"물론 오독은 상처가 되기도 한다. 너무 동떨어진 해석을 해서 그게 특정인에 대한 모욕이 된다면 특히 그렇다. 그런 것이 아닌 '다른 해석'이라면 괜찮다. 영화는 내가 만들었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몫이다. 다양한 해석이 나올수록 영화의 흥미가 되고,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누구와 닮아있을까',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등을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생각한 틀에 갇히면 심각한 오류가 생길 수 있으니 편안하게 영화를 보였으면 한다."

'한공주'에 이어 '우상'까지 깊이와 넓이에 있어 남다른 모습을 보여준 이수진 감독에게 궁극적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물었다. 그의 답에서 영화적 지향을 엿볼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영화가 짧게 소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개봉하고 나서 잊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한다. 영화라는 건 상영이 끝나도 오래 지속되는 속성도 있지 않나. 그러기 위해서 영화를 더욱 집요하고 치열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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