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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황정민과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보여준 연기의 본류

최종편집 : 2019-04-03 14:30:55

조회 :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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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삶을 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토록 잔인한 운명과 맞닥뜨린 이가 있을까. 비극의 나락에 떨어진 한 인간의 몸부림을 보며 함께 고통을 체험하는 듯했다. 그 이름은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연출 서재형)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해 그 사이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아 버려졌지만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명성을 떨친 소포클레스의 작품으로 진실을 쫓는 인간의 열망과 가혹한 진실 앞에서 행하는 자기 단죄의 숭고한 비극을 담아낸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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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로 분한 황정민을 보며 연기의 본류(本流)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깊고도 넓은 감정의 파고 속에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알고 싶소. 나는 나를."

눈먼 예언가 테레시아스만이 진실을 알고 있고, 눈 뜬 모든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편안한 거짓으로 살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이라도 마주하고 싶다는 오이디푸스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대사였다.

2019년의 '오이디푸스'는 신이 정해준 운명을 주체적 자세로 맞는다. 비록 피할 수도 바꿀 수도 없지만 고통에 침전해 있지 만은 않는다. "결정과 선택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라면 가자. 이 길로!"를 외치며 자신의 의지로 걸어 나가는 엔딩을 보여준다.

"나는 살았고 그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라는 오이디푸스의 유명한 절규가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지 않는 것은 이런 해석 차가 주는 묘미 덕분이다.

코러스 장은 오이디푸스의 마지막에 대해 "오이디푸스를 보라, 저 뒷모습을 본 자라면 명심하라. 누구든 삶의 끝에 이르기 전에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사람으로 태어난 자신을 행복하다고 믿지 말라. 그 인생의 갈림길에서..."라고 말한다.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비극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도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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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황정민의 연기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경험과 내공과 연륜이 빚어낸 단단한 열연이었다.

황정민은 서울예대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대학로 공연의 산실인 학전에서 활동했다. 2000년대 초반 영화계로 넘어와 '국민배우'의 칭호를 얻기까지 약 20년을 스크린에 투신했다. 영화배우로 정상의 자리에 섰지만 오랫동안 무대 연기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밝혀왔다.

지난해 연극 '리처드 3'세로 연극 무대에 복귀한 이래 '오이디푸스'로 다시 무대에 섰다. "1년에 한 번은 무대에 오르겠다"는 약속을 지킨 행보였다.

대타 출연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소속사에서 한솥밥을 먹는 후배 박정민이 출연키로 돼있던 작품. 영화 촬영이 지연돼 연극 합류가 불투명해지자 황정민은 두 손을 걷었다. 오이디푸스라는 좋은 고전을 관객에게 폭넓게 소개해주고 싶다는 바람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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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와 마찬가지로 원캐스트였다. 지난 1월 29일 막을 올린 공연은 2월 24일까지 이어진 서울 공연을 마치고 지방 투어를 진행 중이다. 전주, 광주, 여수, 울산 등 약 한 달 간의 추가 공연을 통해 보다 많은 관객과 만나고 있다.

왜 지금 다시 연극인가. 황정민의 선택이 처음엔 그저 놀라웠다면, 90분의 비극을 체험하고 난 후에는 그 선택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연극은 카메라의 기교에 기댈 수도, 편집으로 연기의 단점을 지울 수도 없다. 목소리와 육체와 정신으로 캐릭터를 표현하고 무대 위에 서서 무대 밖 관객과 소통하는 외롭고도 뜨거운 전쟁이다. 연기를 액팅(Acting)이라 하는 이유는 바로 육신의 퍼포먼스기 때문이다. 연극은 연기의 본류와 만나는 가장 순수한 방법이기도 하다.

황정민은 관객을 2,500년 전 문학의 세계로 안내해준 가이드이기도 했다. 낡은 이야기가 아닌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명작임을 가장 고전적인 극의 형태로 느끼게 해 줬다.

무대로의 회귀는 배우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됐다. 황정민은 지난해 '리처드 3세'를 끝낸 이후 "어릴 때처럼 대본을 분석하면서 '연기의 근본에 다가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했다. 공연을 마치고 나서는 속이 하얀 백지가 됐다. 완전히 리프레시가 된 것 같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초심'을 되새김과 동시에 '정화'를 이뤄낸 황정민은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감독 홍원찬)와 '인질'(감독 필감성)로 다시 스크린에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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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민과 마찬가지로 연극을 통해 뿌리로 회귀한 배우가 있다. 바로 영국 출신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다.

BBC 드라마 '셜록'(2011)으로 스타덤에 오른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할리우드로 넘어가 '스타트렉 다크니스'(2013), '호빗:스마우그의 폐허'(2013), '노예 12년'(2013), '이미테이션 게임'(2014), '닥터 스트레인지'(2016), '어벤져스:인피니티 워'(2018)를 찍으며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역시 대학에서 드라마 예술과 고전 연극을 전공한 정통파다. 생애 첫 연극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연기 경력의 시작점에 있었던 작품도 셰익스피어 프로덕션의 연극 '사랑의 헛수고' (2001), '한여름 밤의 꿈' (2001)와 '로미오와 줄리엣'(2002)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다 보면 주요한 기점에 두 편의 연극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2011년 '프랑켄슈타인'과 2015년 '햄릿'이다. 이 시기는 그가 막 자국 내에서 입지를 굳힌 후이고, 마블 솔로 무비('닥터 스트레인지') 타이틀롤 데뷔를 앞둔 시점이었다.

최근 NT LIVE를 통해 컴버배치가 내셔널 시어터에서 공연한 연극 '프랑켄슈타인'(연출 대니 보일)을 관람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이 창조한 괴물의 이야기를 그린 메리 셸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과학자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시체로 만든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괴기스러운 형상에 경악해 도망치고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나타난 괴물은 창조주에 대한 증오심으로 복수를 꾀한다. 컴버배치는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로 분해 130분간 열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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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실험실에서 태어난 괴물로부터 출발한다. 아이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무대 위에서 연신 비틀거리고 허우적거린다. 약 20여분에 이르는 이 긴 오프닝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오로지 몸의 언어로만 표현해냈다. 기괴하면서도 처연하다는 감정을 안기는 놀라운 퍼포먼스였다.

'프랑켄슈타인'은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모든 무기를 다 볼 수 있다. 발음, 발성법부터 감정 조율, 몸의 쓰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탄탄한 기본기와 연기의 기술 그리고 캐릭터를 해석해내는 직관적, 분석적 감각까지 읽힌다.

배우란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다. 행위를 통해 반응을 주고받고, 감정 조율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두 배우의 무대 연기에는 그 정수가 담겨있었다.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