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 한석규의 가슴을 뛰게 한 '뉴 코리안 시네마'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4.10 18:02 수정 2019.04.11 09:56 조회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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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한석규는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1990년 방송사 성우로 입사해 연기자로 활동하며 시대를 투영한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한석규가 곧 한 시대의 영화 역사다. 특히 맹활약을 펼쳤던 1990년 대부터 2000년 대까지의 시기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창동, 허진호, 송능한 등 작가주의 감독이 등장했고, 다양한 장르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한석규는 늘 도전적이었다. 신인 감독과의 작업을 주저하지 않았고, 영화의 장르와 사이즈에 따른 모험에도 거침이 없었다.

영화 '우상'(감독 이수진)으로 3년 만에 인터뷰 자리에 선 한석규는 지난 30년 연기 생활을 회고하듯 인생을 채운 영화와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늘어놓았다.

우상

대부분의 인터뷰가 질문과 답 형식으로 이어지지만 이날 자리는 배우 한석규의 강연과 같았다. "이 시기에는 이 영화를, 이 감독과는 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식의 생생한 회상을 따라 '르네상스'로 불렸던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그 시기의 한국 영화를 '뉴 코리안 시네마'라고 명명했다.

누군가에겐 '옛날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분명 충무로 역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였다.

"전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배우의 길을 걸었어요. '뉴 코리안 시네마'를 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도 있었고요. 이수진 감독이 건넨 '우상' 시나리오를 보고 새로운 한국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편으론 '이거 완성이나 되겠나' 싶었어요. 영화로 만들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 때문이었죠. '이 사람 참 어렵게 작업을 하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시도들이 의도가 좋았어요. 또 사람이 겸손해요. '한공주'도 고생하면서 만들었지만 전작의 스포트라이트와 평가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적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우상'은 뺑소니 교통사고가 벌어지고 세 인물이 엮이면서 벌어지는 파국을 그린 영화. 2014년 독립영화 '한공주'로 주목 받았던 이수진 감독이 연출하고 한석규, 설경구, 천우희가 출연했다.

무엇보다 영화의 엔딩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감독이든 배우든 하나의 이미지에 꽂혀 영화를 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한석규에게는 '명회'의 연설 신(Scene)이 그랬다.

우상

"시나리오를 덮었을 때 독주를 마신 느낌이랄까요. 특히 엔딩이 강렬했어요. 그걸 관객에게 잘 전달하고 싶었어요. 신인 감독의 장점인데 자신의 전부를 걸고 치열하게 매달려요. 저도 신인 때 그랬거든요. 그래서 제가 신인 감독을 선호하나 봐요. 특히 새로운 한국 영화처럼 느껴졌다는 것, 전 '코리안 뉴 시네마'에 대한 자부심이 있거든요. 미국도 서부영화, 종교영화에 심취하다가 1960년대에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등장했잖아요.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1950년대 후반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이라는 말로 주제와 기술적인 혁신을 추구한 경향)가 있었고요. 한국 영화에는 하길종, 이만희 감독님들이 그런 작업을 하셨죠."

한석규는 '뉴 코리안 시네마'의 꿈을 품기 시작했던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영화 인생과 연기 인생에 큰 영향을 주고받은 최민식과의 추억을 소환하기도 했다.

"제가 83학번인데요. 1980년대 한국 영화를 (최)민식 형님이랑 많이 봤어요. 생각해보면 그땐 영화를 보면서 쌍욕도 많이 했어요. 젊은 놈이 할 수 있는 게 욕밖에 더 있겠어요? 비평을 한답시고, 혹평을 하는 거죠. 그때 꿈꿨던 마음은 '뭔가 새로운 걸 해야겠다' 이런 거였어요. 저도 그렇고, 동시대를 산 배우, 감독, 제작자도 그렇고 운도 좋게 한국 영화가 급변하는 시대에 일을 시작했어요. 영화는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데 그때 창투사 자본이 영화계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제작자와 연출자들이 완전히 바뀌었고 저와 같은 생각을 했던 분들과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하다가 어느 순간 지치기도 하고, 처음의 뜨거웠던 열정을 잃는 순간도 왔죠. '내가 왜 그랬지?' 반성을 하기도 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배우는 연기에 대한 본능과 감정,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갖고 태어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퇴화되기도 해요. 그래서 원재료를 잘 지키는 게 중요해요."

한석규

'우상'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이야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전도유망한 정치인의 모습부터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위기에 직면한 인물의 복잡한 내면까지 표현해야 했다. 그는 달뜬 연기를 가장 경계했다고 했다.

"제가 달뜬 연기를 무척 싫어해요. 목소리 톤을 낮추기도 하고, 표정도 무표정하게 해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과장돼 보이지 않을까를 고민했어요. 이수진 감독도 과한 표현을 끔찍이 싫어했어요."

한석규는 이번 영화에서 설경구, 천우희와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특히 천우희에 대해서는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역량이 뛰어난 후배라고 칭찬했다.

"천우희라는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대본만 봐도 한숨이 나왔을 텐데... 본인도 한계를 느꼈다고 했는데 아마 진솔한 표현이었을 거예요. 자칫하면 밑천이 다 드러날 수 있는 역할이거든요. 게다가 감독은 '진짜 중국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연변 말을 주문했어요. 게다가 6개월 동안 눈썹을 다 밀고 연기를 했잖아요. 그런데도 우희는 거리낌 없이 도전을 했어요. 말이 후배지 동지예요. 백 년 후 우리를 언급할 때 2000년대에 활동했던 배우 카테고리에 나란히 들어갈 거예요. 한국 영화계에 아주 괜찮은 배우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천문

한석규는 최근 최민식과 영화 '천문'의 촬영을 마쳤다. 영화 '쉬리' 이후 20년 만에 한 작품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오랜 우정은 익히 알려진 바. 사석에서 만나는 것과 촬영장에서 만나는 것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좋더라고요. 존중을 넘어 존경하는 선배예요. '쉬리'가 98년이었나. 그때 이후 오랜만에 연기를 같이 하는데 참 좋았어요. 그 사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어요? 별 얘기 아닌데도 웃고 떠들게 되더라고요. 아마 그걸 지켜보는 사람도 재밌었을 거예요. 만담 하듯이 노니까. '연배도 비슷해 보이는데 한석규는 왜 저렇게 최민식에게 깍듯할까' 싶었을 거예요. 민식 형님은 제게 영향을 많이 준 선배예요. 생각해보면 대학 때는 매도 많이 맞았죠.(웃음) 연극한 것까지 따지면 15편 정도 같이 했을 거예요. 저와 성향이 완전히 다른데 그래서 더 재밌어요. 우리는 같은 일에도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이에요. 연기로 치면 같은 액션에 전혀 다른 리액션을 하는 배우들인 거죠. 그런 두 사람이 연기를 하니까 재밌을 수밖에요."

좋아하고 잘 맞는 연기 파트너를 언급하는 가운데 김혜수의 이야기도 나왔다. 한석규는 "'이층의 악당'때 (김)혜수에게도 고마워요. 호흡이 참 좋았거든요. 그때 혜수가 많이 지쳐있었어요. 그런데 같이 연기를 하면서 '좋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연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동료들이 참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우상

한석규는 '우상'을 연출한 이수진 감독을 보며 과거 자신과 호흡을 맞췄던 젊고 뜨거운 감독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작품과 감독에게 대해 "쉽지 않은 영화죠. 퍼즐 같은 면이 있지만 잘난 척하거나 건방진 마음으로 한 게 아니에요. 창작자로서의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입니다."라고 옹호했다.

"13년 전 한국에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왜 이럴까'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하더라고요. 감독이 대한민국을 보면서 느낀 생각과 반응이 '우상'에 투영됐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한국 영화를 보여줄 괜찮은 연출가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빨리 세 번째 작품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볼 때 창작자는 창작욕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가 있어요. 그래서 그 순간을 놓치면 안 돼요."

그러면서 남다른 시선과 젊은 감각으로 자신을 매료시켰던 두 감독을 언급했다.

이층의 악당

"2010년 손재곤 감독과 '이층의 악당'이라는 영화를 했어요. 이제까지 제 영화를 보면서 웃었던 작품은 '이층의 악당' 뿐이에요. 한 3년 전에 TV에서 하는 걸 다시 봤는데도 너무 재밌더라고요. 제가 볼 때 손재곤 감독은 '한국의 빌리 와일더'예요. 스크루블 코미디(Screwball Comedy : 빈부, 신분 격차가 큰 두 남녀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완성하는 장르), 블랙 코미디에 남다른 감각이 있어요. 오래전부터 손재곤 감독에게 (다음 작품) '빨리 좀 합시다'라고 재촉해왔는데, 준비를 한다는 이야긴 6~7년 전부터 들었어요. 그런데 그 영화('해치지 않아')를 이제 찍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구타유발자'를 함께 했던 원신연 감독도 '세븐데이즈' 이후 '용의자'를 찍는데 6년이나 걸렸어요. '살인자의 기억법'에 이어 최근엔 '전투'를 찍었다더라고요. 능력있는 감독인데 이 친구가 제가 '넘버3' 찍을 때 스턴트맨을 했다더라고요. 당연히 영화 전공을 했을 줄 알았는데 희한하죠. 좋은 감독이 창작욕이 왕성할 때 많은 작품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수진 감독도 차기작을 빨리 선보였으면 해요."

인터뷰 말미에는 턱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보일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참여한 영화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또한 그가 영화에 대해 가진 애정과 열정을 뜨겁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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