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수다] '돈' 박누리 감독 "시대 안에서 인물을 그리고 싶다"

최종편집 : 2019-04-17 11:08:26

조회수 : 241

[스브수다] '돈' 박누리 감독 "시대 안에서 인물을 그리고 싶다"
이미지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박누리 감독은 인생의 1/3을 영화 현장에서 보냈다. 영화 '돈'의 일현(류준열)에게 병아리 시절이 있었듯, 박누리 감독도 막내 스태프로 불리던 시절을 거쳐 한 편의 영화를 책임지는 선장의 자리에 올랐다. 부도덕할지라도 빠른 길로 우회했던 일현과 달리 박누리 감독은 느리더라도 정도(正道)를 밟아 지금의 기회를 잡았다.

첫 번째 연출작인 '돈'(감독 박누리, 제작 사나이픽처스·월광)은 지난 3월 20일 개봉해 현재까지 전국 331만 명의 관객과 만났다. 비수기 영화 시장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이다.

박누리 감독에게도 의미 있는 성적표지만 첫 번째 주연작에서 300만 명이 넘는 관객의 지지를 얻은 류준열에게도 이 영화의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이미지류준열은 '돈'에 대해 "영화의 재미를 알게 해 준 작품"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만큼 현장의 분위기는 뜨겁고 파이팅이 넘쳤다.

박누리 감독은 '신세계', '남자가 사랑할 때', '아수라', '무뢰한', '공작' 등 이른바 '남자 영화의 명가'로 불리는 사나이 픽처스와 충무로의 젊은 거장 윤종빈 감독의 제작사 월광이 선택한 첫 번째 여성 연출자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충무로 도제 시스템 아래 탄생한 감독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막내 스태프, 스크립터, 조감독('부당거래', '베를린', '남자가 사랑할 때')을 거쳐 감독의 자리에 오른 박누리는 전통적 방식으로 영화를 배웠고, 그 배움을 현장에 적용해냈다. 주목할만한 신인 감독의 등장이다.

이미지Q. '돈'이라는 작품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A. '남자가 사랑할 때' 조감독을 끝내고 연출 데뷔작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사나이 픽처스의 한재덕 대표가 동명의 소설책(정현도 作)을 주셨다. '주식 얘긴데 좀 어렵지 않을까' 하면서 읽었는데 첫 장을 펴자마자 한 번에 끝까지 읽었다. 증권가 이야기지만 재미도 있으면서 새롭게 느껴졌다. 인상적이었던 건 소설의 첫 줄이었다. "숫자 0이 열 개면 얼만지 아나?"라는 문장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세고 있더라. 100억이라는 게 바로 인지가 안됐다. 동시에 '나는 얼마 짜리 인간인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문장에 꽂혀 읽기 시작했다.

Q. 일현의 흥망성쇠가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것도 큰 매력이었을 것 같다.

A. 그렇다. 평범하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친구가 큰돈을 벌 기회를 갖게 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지 않나. 나도 평범한 사람이다 보니 '그 순간이 되면 그렇게 될까' 궁금했다. 나는 겁도 많고 의심도 많아서 노력 없이 돈을 벌 기회가 온다 해도 못 잡을 것 같더라. 한편으론 다음 달 통장에 들어올 돈이 없다고 하면 그런 기회를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렇게 양 극단의 선택에 공감이 간다면 관객도 영화를 보면서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한 대표께 시나리오로 써보고 싶다고 했다.

이미지

Q. 영화는 원작과 같은 점, 다른 점이 모두 존재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 어떤 점을 취사선택했나?

A. 원작에서 '익현'이었던 이름을 '일현'으로 바꾼 건 제작자인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캐릭터 '최익현'(최민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 외에 번호표, 사냥개는 직관적 이름이 재밌어서 소설 그대로 썼다. 세 인물의 구성이나 설정도 최대한 살렸다. 주인공 일현이 이들을 만나면서 변해가는 줄기도 마찬가지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현의 상황에는 살을 좀 붙였다. 원작과 비교하면 영화는 결말에 큰 차이가 있다. 일현이 유혹에 넘어가면서 범죄와 연관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본성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결말을 선택했다.

Q. 영화를 위해 주식에 입문했다고 들었다.

A. 연출을 해야 하니까 관련 책도 읽고 공부도 많이 했다. 난생처음 주식 계좌를 만들어 쌈짓돈으로 투자를 해보기도 하고. '주식이 노력을 안 하고 얻는 돈이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다. 주식 브로커를 취재하면서 이들은 하루에 1초도 안 남기고 치열하게 산다는 것도 알게 됐다. 공부를 하면서 딜레마에 빠졌던 건 주식에 대해 알게 되면 될수록 설명하게 되는 것이었다. 주식 다큐멘터리 영화도 아닌데 설명이 많아지는 건 아니다 싶었다. 주식 이론을 몰라도 관객들은 일현이 겪는 일을 따라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보다는 일련의 상황을 겪는 일현의 반응을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 마우스를 누르기 전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 등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미지Q. 푸른빛을 살린 도시 영화의 질감과 증권가의 하루를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감각적 편집, 황상준 음악감독의 유려한 음악 등이 돋보였다. 오피스 드라마의 현실감과 세련미를 살리기 위한 노력들이 궁금하다.

A. 영상의 톤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여의도에 있는 증권가, 빌딩 숲을 세련되게 표현하고 싶었다. 여의도라는 공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증권가를 오가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 않나. 큰 공간 안에 있는 작은 인간들이지만 하나하나에 따뜻한 공기를 담고 싶었다. 동명증권 사무실은 무교동의 빈 사무실을 빌려 오픈 세트로 지었다. 15층에 위치한 사무실이었고 창밖 풍경도 실제 빌딩 숲이 보이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Q. 일현을 연기한 류준열의 내·외적 변화가 영화로도, 연기로도 잘 표현됐다. 류준열도 촬영을 하면서 자신이 얼굴이 바뀐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 연기 디렉팅에 있어 어떤 점을 강조했나?

A. 류준열과 작품을 함께 하기로 했을 때 일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실한 청년이고 삶을 열심히 사는 친구다. 꾸밈이 없고, 큰 욕심도 없다. 영화는 일현의 변화를 3~4년에 걸쳐 보여준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입 사원부터 타락한 주식 브로커의 모습까지 보여줘야 했으니 영화도 신(Scene) 순서대로 찍고자 했다. 일현은 돈을 벌면서 점점 변하는데 그 모습을 배우가 잘 파악했고 결대로 잘 보여줬다. 다만 중후반부 일현이 욕망에 사로잡혀 주변 사람들에게 경우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모습이 나온다. 류준열이 생각보다 화를 못 내더라. 살면서 누군가를 그렇게 미워하고 짜증 내 본 적이 없더라고 하더라. 자신이 화가 나고 스트레스받도록 도와 달라길래 극한으로 몰았다. 내가 괴롭히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본인이 감정을 끌어모아서 연기하더라. 특히 일현이 부모님에게 화내는 장면을 어려워했는데 그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내 경험을 말해줬다. 경험을 나누며 상황을 공감하도록 했다. 세심한 디테일들은 배우 스스로 잘 표현해줬다.

이미지

Q. '번호표'는 자칫 전형적인 악역에 머물 수 있었는데 유지태의 연기가 캐릭터의 진부함을 상쇄해준 것 같다.

A. 류준열과 유지태의 조합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유지태 선배랑 작업하면서 의지를 많이 했다. 20년 넘게 현장에 있었고 많은 작품을 경험했고 연출 경험도 있는 배우이기 때문에 내가 신인으로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다. 영화계의 동지이자 선배 같은 느낌으로 편하게 대해주시더라. 놀랐던 건 남다른 준비성이었다. 처음 만나서 "대사 한 번 읽어볼까요?" 했는데 대본 전체를 다 외워 오셨더라. 순간 내가 작아진 느낌이었다. 일현이 번호표를 봤을 때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Q. '사냥개'(한지철)를 연기한 조우진도 준비를 많이 해오는 배우 아닌가? 이번 작품에서는 아이디어도 많이 냈다고 들었다.

A. 전부터 팬이었다. 어떤 작품을 해도 매번 새롭게 연기하니까. 한지철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인물이다. 취재를 해보니 금감원 공무원이 정의를 위해 형사처럼 수사하고 추적하는 경우는 없다고 하더라. 한지철은 자기 정의를 믿는 인물이다. 자신의 월급으로는 아이 영어 유치원도 못 보내는데 불법 주식 브로커가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획득하는 게 싫은 거다. 그래서 잡고 싶은 거고. 대본 상의 설정이 살아있는 인물처럼 보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조우진 씨가 첫 미팅 후 한지철이 집요함을 발휘하는 게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면서 이혼당한 인물에 아이도 잘 만나지 못하는 기러기 아빠 설정을 제안했다. 관객들이 봤을 때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인물이 되도록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이미지Q. 막내 스태프로 출발해 감독의 자리까지 올랐다. 현장에서 시작해 성장한 경험은 실전에서도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A. 연출이 처음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 배우, 스태프들이 잘 채워주셨다. 현장이 전반적으로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건 사나이 픽처스에 조감독일 때부터 몸담고 있다 보니 소통이 원활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연출부 막내를 했던 것부터 따지면 영화를 한지는 15년 정도 됐다. 현장에서 기술을 배운 것도 있지만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배운 건 태도다. '내가 준비가 돼야 더 좋은 장면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현장 경험이 많은 건 독이 될 수도 있다. 현장을 원활하게 하기도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까지 신경 쓰게 되기도 한다. 그것도 내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이번 영화는 프로덕션에서 잘 진행해주셔서 감독으로서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Q. 제작자인 윤종빈 감독이 칭찬을 많이 하더라. 특히 성실함에 대한 극찬이 많았다.

A. 제작자이기 전에 선배 감독이시다. 자신이 데뷔할 때 겪었던 경험이나 했던 생각들을 많이 얘기해주셨다. 신인 감독이 타파해나가야 할 현실적인 조언도 큰 도움이 됐다. "나도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 여러 작품을 하게 된 거야"라는 말이 의지가 많이 됐다.

이미지Q. 언제, 어떤 계기로 영화감독의 꿈을 품게 됐나?

A. 영화를 좋아했던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다. 감독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때부터 했던 것 같다. 생각은 있었지만 길을 잘 몰랐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건 아니었지만 비슷한 전공을 선택했고 영화 동아리에서 단편 영화를 만들면서 꿈을 구체화시켰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보급기에 검색으로 현장 스태프 일을 찾기도 했다. 한겨레 영화학교 단편 영화 스태프 모집 공고였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다고 하더라. 그땐 필름이 너무 만져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상업 영화 스태프를 한건 '서울이 보이냐'(2008)라는 영화였다.

Q. 박누리의 '인생 영화'가 궁금하다.

A. '첨밀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 좋아한 영화가 쭈욱 가는 것 같다. 두 영화는 장르는 다르지만 한 시대를 두고 인물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이야기라는 건 같다. 좋아하는 감독은 마틴 스콜세지, 데이빗 핀처다. 또 제가 작업을 해나갈 수 있게 현실적 도움을 주신 윤종빈 감독과 조감독일 때 모셨던 감독님들도 존경한다.

Q.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박누리 감독의 영화들이 궁금하다.

A. 소재나 장르에 국한되고 싶지 않다. 꼭 필요한, 뒤처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시대 안에서 해야 하는 이야기, 시대와 같이 갈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인물에서부터 출발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인물일 수도 있고, 평범하거나 못난 인물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공감을 선사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