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우물 안 개구리였다"…배우 정일우의 값진 성장

강선애 기자 작성 2019.05.20 15:46 수정 2019.05.20 16:23 조회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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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우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배우 정일우를 처음 인터뷰했던 건 지난 2011년이었다. 당시 정일우는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인기에 취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거기서 한 발자국 내려와 냉혹한 현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하던 스물다섯의 청년이었다. 스물다섯이 그다지 많은 나이는 아닌데, 자신을 돌아볼 줄 알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의 움직임에서 '건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정일우와 마주했다. 젊은 영조, 연잉군 이금 역할로 SBS 드라마 '해치'를 무사히 끝내고 만난 정일우는 스물다섯 그때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었다. 그 사이 군에도 다녀오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쌓아 올린 값진 경험을 바탕으로 '진짜 어른'으로 거듭났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왠지 고마웠다. 세월의 덧없는 흐름 앞에 야속하게 나이만 더 먹은 게 아니라서.

정일우는 지난해 말 소집해제를 하자마자 '해치'로 안방극장에 복귀했다. 오랜만의 드라마였지만, 그에게서 공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일우는 무수리의 천한 피를 받았다고 무시받던 왕의 아들이 타고난 왕재를 바탕으로 스스로 성장해 진짜 백성을 생각하는 성군이 되어가는 모습을 때론 유쾌하게, 때론 진지하게 연기해내 안방극장에 재미와 감동을 선사했다. 노년의 영조가 익숙한 우리 눈 앞에 가슴 뜨거웠던 청년 영조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극을 이끄는 타이틀 롤이라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촬영 분량도 많았고, 어려운 한자어가 줄줄이 가득한 대사를 외워야만 했다. 쏟아지는 빗속 촬영도 수차례, 가족을 잃는 감정 소모가 많은 연기도 여러 번 소화했다.

힘들게 찍은 만큼 정일우는 이번 역할이 "데뷔 이후로 가장 힘든 캐릭터"였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 같다"며, 스스로의 생각의 정리를 위해 곧 어딘가로 떠나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평소 걷는 걸 좋아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는 정일우. 그는 진짜 떠났다. 정일우는 최근 SNS를 통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근황을 알렸다. 그가 내딛는 걸음걸음에는, 영조 이금을 떠나보내는 작별의 의미가 서려있을 것이다.

정일우

Q. '해치'를 무사히 잘 끝낸 소감부터 듣고 싶어요.
정일우: 군 복무 이후 복귀작으로 '해치'란 좋은 작품을 선택하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는데 잘 마무리해서 뿌듯해요. 좋은 작가님과 감독님, 좋은 배우분들과 같이 작품 해서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Q. 군 복무 이후 첫 작품으로 이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정일우: 가장 큰 이유는 김이영 작가님의 작품이란 점이었어요. 그리고 잘 다뤄지지 않았던 젊은 영조를 그린다는 것에 끌렸어요. 영조가 굉장히 어려운 캐릭터였고 연기하기 쉽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작가님이 열심히 도와주셨어요. 글쓰기에도 바쁘셨을 텐데, 작가님이 열정을 갖고 도와주셨기 때문에 이번 작품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같이 연기했던 선후배분들, 그중에서도 이경영 선배와 정문성 형의 열정과 연기력이 저한테 큰 자극제가 됐어요. 덕분에 같이 시너지가 나지 않았나 싶어요.

Q. 흔히 영조하면 흰 수염에 노년의 얼굴을 떠올리는데, '해치'는 젊은 영조를 다룬다는 게 신선하긴 했어요. 연기하면서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요?

정일우: 영조는 천출의 피를 갖고 태어나 누구보다 백성을 이해하고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영조를 연기하며 중점을 둔 건,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하자는 거였죠. 얼굴 표정이나 눈으로 하는 연기보단, 마음으로 연기하려 노력했어요. 그런 부분들이 아무래도 과거의 제 연기 스타일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정일우

Q. 본인이 과거에는 주로 표정이나 눈으로 하는 연기를 했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정일우: 아무래도 과거엔 그랬죠. 그땐 표정이나 눈빛에 제 감정이 표현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데뷔작이 시트콤이다 보니, 표정이 저도 모르게 과하게 나올 때가 있었어요. 이번엔 그런 부분에서 많이 내려두고 연기하려 했어요. 그렇게 연기를 하다 보니 시청자나 주변 지인들이 좀 더 진정성 있게 와 닿았다는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연기가 는 거 같다는 칭찬을 받아 기뻤죠.

Q. 젊은 영조 역할을 믿고 맡겨준, 작가님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정일우: 작가님은 절 볼 때마다 너무 어려운 캐릭터를 줘서 미안하다고, 고생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러다 드라마가 끝나고 종방연에서는 "너무 멋있게 영조를 그려줘 고맙다"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셨어요. 작가님께는 제가 감사해야죠. 제게 멋진 우주를 만들어 주셨잖아요.

Q. 소집 해제하고 첫 작품이었잖아요. 오랜만에 돌아온 촬영장인데, 어려운 캐릭터를 맡아 더 힘들었겠어요.

정일우: 2년 6개월 만에 촬영장에 복귀한 건데, 대체복무를 언제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어요. 거의 매일 지방 촬영을 가고, 영조가 만나는 인물이 너무 많은데 대사마저 너무 어렵고. 하루하루가 정말 전쟁 같아, 아침마다 전쟁터에 나간다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무사히 잘 끝나 정말 다행이지요.

정일우

Q. 드라마 촬영장이 전쟁터 같았다는 비유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느껴지네요.
정일우: 육체적인 걸 떠나 심적으로도 이번에는 유난히 힘들었어요. 극 중에 아버지, 동생, 형 등 주위 사람들을 다 떠나보내고 영조 혼자 남는데, 그걸 연기하는 입장에서 많이 힘겨웠어요. 게다가 후반부 촬영할 때는 제가 오랫동안 키운 강아지가 갑작스레 죽었어요. 가족 한 명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면서 촬영했는데, 그런 여러 가지 감정적으로 소모가 많았던 작품이라, 유난히 힘들었고, 데뷔 이후로 가장 힘든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Q. 이번 작품이 30대가 된 후 첫 작품이기도 하잖아요. 20대 때와 비교해 달라진 마음가짐이 있나요?
정일우: 20대 땐 굉장히 조급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어요. '배우를 계속할 수 있을까', '대중한테 잊히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들을 했었죠. 제가 대체복무를 하며 요양원에서 치매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2년간 했는데, 그러면서 제가 굳이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현재만 즐겨도 시간이 모자란데, 생기지도 않은 일을 사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는 유연한 생각을 갖게 됐어요.

Q. 2년간의 복무가 '인간 정일우'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거 같네요.

정일우: 연예계 쪽 일을 안 하는 분들과 만나 계속 이야기하고 생활하면서, '내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를 느꼈어요.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저 스스로를 많이 열게 됐어요. 촬영장에서도 스태프들과 편하게 이야기하고, 같이 술 한잔 기울이면서 대화도 나누고, 그런 여유가 생겼죠. 스태프들이 "배우가 이래도 돼?"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예전에는 촬영하기에 바빠 정신이 없었는데, 이젠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촬영하고, 그러다 보니 편해져서 제 연기도 더 잘 나온 거 같아요. 배우란 직업이 배우일 뿐이지, 더 대우받아야 할 존재는 아니에요. 배우 혼자 잘한다고 잘 되는 게 아니라, 스태프들과 잘 어울릴 줄 알아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정일우

Q. 그래도 '해치'가 오랜만에 대중에게 선보이는 복귀작이라,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있었을 텐데. 촬영은 힘들었어도 마음에는 여유가 있었던 거 같네요.
정일우: 전 그런 부담은 전혀 없었어요. 30대를 시작하는 첫 작품이라 개인적으로 의미는 있었어도, 군 복무 이후 첫 작품이라고 해서 잘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었어요. 그런 거에 일희일비하려 하지 않아요. 그저 좋은 작품, 완성도 있는 작품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지, 성공하고 말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Q. 배우로서 슬럼프 같은 것도 없는 건가요?
정일우: 슬럼프는 많이 겪어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도 왔어요. 뭔가를 새롭게 창조하는 건 뚝딱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안 힘들면 말이 안 되죠. 정말 힘들고 아파야, 비로소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걸 어떻게 극복해나가느냐가 중요하죠. 이번 작품은 유독 그랬고요. 로맨틱 코미디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장르도 아니었고, 캐릭터 자체가 성장통을 겪는 캐릭터라, 그런 점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Q. 데뷔 14년 차인데 큰 사건사고 없이 순탄하게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거 같아요.

정일우: 사건사고를 만들고 싶은 배우가 어디 있겠어요.(웃음) 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범주 내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배우라고 해서 막 숨어 다닐 생각은 없어요. 다만 배우라는 영향력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조심할 건 조심하고 감수해야 할 부분은 감내해야겠죠. 대중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제 작품을 통해서 힐링할 수도 있고, 선한 영향력이 그분들 삶에 도움도 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고 그렇게 활동하고 싶어요.

정일우

Q. 쉴 때는 뭐하나요?
정일우: 걷는 걸 좋아해요. 요즘에 핫한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전 이미 두 번 다녀왔어요. 전 걸으면서 마음을 다잡아요. 걸으면 힐링이 되고 마음의 정리가 되는 거 같아요. 이번 작품도 끝났으니 걸으러 갔다 올 예정이에요. 아직 어디로 걸으러 갈지는 못 정했지만요.(정일우는 이 인터뷰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

Q. '해치'만으로 2019년의 1/3이 지나왔어요. 남은 시간, 목표가 있다면요?
정일우: 해외 작품 들어오는 게 있어서 해외 활동과 국내 활동을 병행할 거 같아요. 아시아 투어도 있어서 오랜만에 팬들과 시간도 보낼 거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올해 꼭 해보고 싶은 건 오로라를 보러 가는 거예요. 그거까지 한다면, 올 한 해 알차게 보내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백승철 기자]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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