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 데뷔 20년·48편의 영화로 이뤄낸 '라미란 성공기'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5.22 18:35 수정 2019.05.23 08:49 조회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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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란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라미란은 TV 속 모습과 다름없었다. 성격이 시원시원한 데다 위트 넘치는 입담까지 겸비해 편안한 이웃집 언니를 만난 것 같았다.

영화 '걸캅스'의 언론시사회와 기자간담회가 열렸던 지난 4월 30일, 라미란의 또 다른 모습을 봤다.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댄 라미란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제 나이 마흔다섯. 출연 영화 48편, 영화 데뷔 20년 만에 첫 주연을 맡게 됐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부담스럽고, 떨리고, 잘 해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감회가 남다르다. 그러나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 대한 어떤 평가도 달게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걸캅스

진심이 느껴지는 진중한 인사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걸캅스'는 라미란에게 이정표가 될 영화다. 데뷔 20년 만에 첫 주연을 맡아 엔딩 크레딧 최상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 편의 영화에서 크레딧 1번이 가지는 의미에는 책임감도 무겁게 포함돼있다. 라미란이 그 어떤 시사회보다 떨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게다가 충무로에서 기획조차 드문 여성 투톱 형사물이었다. 기획 단계부터 라미란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간 영화 동지이자 동갑내기 친구인 변봉현 필름모멘텀 대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몰랐던 배우 라미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걸캅스

◆ 코미디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액션도?

'걸캅스'는 가죽 자켓을 입은 강력반 형사 미영(라미란)이 범인을 쫓는 추격신 시퀀스로 포문을 연다. 카메라 워킹과 음악은 물론이고 라미란의 패션과 액션 연기까지 마치 90년대 홍콩 영화를 보는 듯한 복고풍 향기가 물씬 풍겼다. 양자경의 '예스마담'을 레퍼런스 삼은 경쾌한 액션 연기가 돋보였다.

촬영 날 유난히 더웠다는 기억을 떠올린 라미란은 "멋진 액션 후 범인을 검거할 때는 제가 뭐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 맛에 액션 연기를 하나 싶기도 했고요."라고 웃어 보였다.

걸캅스

충무로에서 여배우가 주연이 돼 영화를 이끄는 경우는 흔치 않다. 라미란은 "여배우 주연의 영화가 성적이 좋지 못하니 제작자가 과감한 도전을 위해 용기를 낸 거라 생각해요"라면서 "제작자가 의무감과 책임감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한 신뢰를 보여줬어요"라고 제작자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배역의 크기를 떠나 라미란은 현장에서 사실상 맏언니였다. 함께 호흡을 맞춘 이성경, 최수영은 영화의 경험이 많지 않은 신인 배우들이다 보니 라미란이 현장을 끌고 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에요. 저는 끌려가면 됐어요. 감독님(정다원)이 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젊은 감각을 가진 분이었어요. 힘을 오히려 많이 받았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현장이었던 것 같아요."

라미란

◆ "'걸캅스', 남성 비하 영화 아냐"

라미란이 연기한 '미영'은 결혼과 출산 이후 강력반에서 민원실로 부서를 옮겨 일을 한다.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워킹맘으로서의 현실적 선택이다. 라미란 역시 워킹맘이기에 미영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었으리라 생각됐다.

"저의 경우는 아이를 부모님이 다 키워주셔서 편하게 일한 편이에요. 게다가 직업이 다르고 처해진 환경도 달라 그들의 삶과 애환을 다는 모르겠더라고요. 이 인물이 과거의 자기의 모습을 꺼내는 것, 알을 깨고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워킹맘의 애환을 보여주려고 이 영화를 한 건 아니니까요. 알을 깨는 미영과 앞으로 나아가는 지혜(이성경), 자신의 진짜 능력을 깨닫는 장미(최수영) 등 성장 서사를 띠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라미란은 이번 영화를 하면서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저는 정치, 경제, 사회 뉴스에 무감각한 사람이었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하나씩 알아가고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동안에는 영화 속 사건과 같은 일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클럽만 안 가면 되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조금만 들여다봐도 그것만으로 해결되지도 않고, 원인도 거기에 있지 않다는 걸 알았을 텐데..."라고 전했다.

걸캅스

무엇보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성인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잘 알게 됐다고 했다. 라미란은 "영화에 '우리가 치자'라는 대사가 나와요. 사실 이들은 수사권도 없이 무식하게 뛰어드는 거잖아요. 걸캅스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누구도 형사가 아닌 상황인 거죠. 그렇지만 아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을 때 아는 언니가 도와주고 목소리를 내주는 느낌인 영화라 전 그게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개봉 전 '걸캅스'는 페미니즘 영화 혹은 남성 비하 영화라는 논란에 시달렸다. 라미란은 "남자들이 형사로 나오는 영화에서는 여성들이 그렇게 소비되는 경향이 있었어요. 제 남편으로 분한 윤상현 씨의 묘사가 조금 걱정스럽긴 했는데... 영화를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지철(윤상현)은 검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다가 사법시험에 연이어 불합격하면서 육아도 겸하게 된 거예요. 또 따지고 보면 상현이 육아를 전담하는 상황도 아니에요. 다행인 건 윤상현이라는 배우가 가진 사랑스러움 때문에 그 사람이 그렇게 한심해 보이진 않는다는 거예요. 영화에 욕이 지나치게 많다는 의견도 있는데 감독님도 시나리오를 쓸 때는 그렇게 욕이 많은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촬영한 것보다는 많이 걷어냈어요"라고 해명했다.

라미란

◆ 라미란이 꼽은 '나의 대표작'

라미란은 데뷔 20년 동안 총 48편의 영화를 찍었다. 1년에 두 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말이다. 지치지 않고 연기 활동을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묻자 "재밌잖아요. 이런 직업이 어딨어요? 다른 사람의 삶을 경험해 보고, 관객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고... 일만 주시면 평생 하고 싶죠.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미소 지었다.

조, 단역에서 출발해 주연의 자리에 오른 그녀에게 48편의 작품이 주는 의미는 각각 다를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표작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를 언급하고 싶어요. 영화계에 발을 딛게 해 준 작품이니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로 무대에서 뮤지컬, 연극을 쭉 해오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집에서 육아만 하다 보니 '내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에 시달리고 있어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을 때 생각지 못하게 인연이 닿아 오디션을 보러 갔어요. 영화 오디션은 처음이라 떨면서도 왠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후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소리 질렀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촬영은 4회 차 밖에 안 했는데 개봉 후 '씨네21' 인터뷰도 하고 생각지 못한 주목을 받았어요. 그때는 다른 걸 다 떠나 일하러 밖에 나오니까 살 것 같았어요. 영화는 늘 하고 싶었던 분야라 더욱 좋았죠."

출산 이후 경력 단절 상태였던 라미란에게 어떻게 영화 오디션의 기회가 온 걸까. 라미란은 "스물대여섯 살 때 프로필 사진을 찍어서 영화사에 돌린 적 있었어요. TV는 잘 생기고 예쁜 친구들만 나오지만 영화는 다양한 사람이 나오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죠. 당시에는 연락이 하나도 안 왔어요. 근데 그 프로필이 몇 년 간 돌고 돌아 '친절한 금자씨' 영화사에 들어갔고, 뒤늦게 연락이 왔어요!"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라미란

두 번째 작품으로는 이석훈 감독의 '댄싱퀸'(2012)을 꼽았다. 많은 관객이 '배우 라미란'의 존재를 알게 된 400만 흥행작이다.

"단역을 계속 해오다가 처음으로 오디션을 안 보고 출연한 작품이에요. 제작자인 윤제균 감독님이 '헬로우 코스트'를 보고 캐스팅해주셨어요. 캐스팅 소식을 듣고 "저 오디션도 안 봤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감독님을 봬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할 정도로 얼떨떨했어요. 분량도 많았고 저라는 배우를 알리게 해 준 소중한 영화예요."

이준익 감독의 '소원'(2013) 역시 라미란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수상(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올해의 영상화 여우조연상)의 기쁨을 알게 해 준 영화기 때문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연기로 상이란 걸 받았어요. 게다가 이 영화를 제작한 필름모멘텀의 변봉현 대표를 만나 그 인연이 지금의 '걸캅스'까지 이어졌어요. 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배우로서 제 스스로 한계를 많이 느꼈던 작품이기도 했어요. 매 촬영마다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고요. 지금도 생각하면 짠한 작품입니다."

라미란

◆ '제2의 라미란'을 꿈꾸는 이에게…"버텨라, 적어도 10년은"

라미란은 강원도 정선 출신이다. 초등학교 때는 부끄러움이 많아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배우의 꿈을 키운 계기는 단순했다.

"어릴 때 옆동네 탄광촌에 출렁다리라는 곳을 갔어요. 그곳에서 한 꼬마애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호응을 해주고 있는 거예요. '저게 뭐지?' 싶더라고요. 저도 아이들을 모아서 마루 위에서 작은 공연을 했죠. 너무 재밌더라고요. 중학교 때는 성격이 외향적으로 바뀌어서 축제 때 꽁트를 만들어 무대에 올리곤 했어요. 그때도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가수가 될까? 화가가 될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문득 이 모든 것을 종합할 수 있는 게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을 연극과(서울예대)로 갔어요. 대학 때만 해도 TV나 영화 같은 매체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저는 제 얼굴을 아니까요. 그때만 해도 예쁘고 잘 생긴 사람만 티비에 나오는 줄 알았거든요."

라미란

20년 간 연기 열정 하나만 생각하고 달려온 스스로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칭찬이나 격려가 아니었다.

"지금 아냐. 지금 아니니까 조금만 더, 이제 시작이야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경력을 천천히 쌓아왔지만 견고한지는 모르겠어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모습의 배우로 남을 것인가가 결정되는 시기니까요. '네가?', '안 어울리는데?'라고 하셔도 해봐야 알잖아요. 욕을 먹더라도 여러 길을 개척하고, 끊임없이 도전할 겁니다."

이런 파이팅의 근원은 무엇일까. 라미란은 "제게 경쟁력이 뭐냐고 물으면 전 '외모'라고 말해요. 정말 흔하디 흔한 얼굴이지만 이게 라미란의 힘이에요. 평범하지만 어디 갖다 놔도 어울리고 도드라지지 않아요. 그게 장점 아닐까요. 그래서 외모로 승부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라고 웃어 보였다.

라미란

'제2의 라미란'을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조언을 해 달라고 하자 라미란은 "적어도 10년 이상은 버텨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일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게 중요해요. 그걸 안 하면 아무것도 아녜요. 연기 활동을 해야지 배우예요. 버틸 수 있을 만큼은 버텨야 해요. 그것조차 즐길 수 있다면 더욱 좋고요."라고 말했다.

연기를 하면서 지켜온 자신만의 철칙도 소개했다. 바로 '연기하지 않기'였다. 라미란은 "저도 모르게 뭔가를 하려고 할 때가 있어요. 최대한 힘을 빼고 그냥 그 사람으로 거기에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저거 라미란인데'하면 안 되는데... 사실 어떤 인물이든 제 모습이 가장 많이 보여요. 뭘 안 하려고 하니까요."라고 말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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