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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수다]"조금 느리더라도 부끄럼 없이"…전여빈, 강한 내공의 비밀

최종편집 : 2019-10-14 11:39:17

조회 :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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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긴 시간 동안 성실하게 갈아온 칼은 단 한 번의 스침에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만큼 날카롭다. 오랜 시간의 노력이 깃들어 날이 선 칼은 원샷원킬, 힘들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배우 전여빈은 2017년 영화 '죄 많은 소녀'로 단번에 충무로가 주목하는 신예로 떠올랐다. 만 28세, 남들보다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단 한 작품으로 배우 인생의 꽃길이 시작됐다. 개성 있는 마스크와 분위기, 내공 있는 연기력에 극찬이 이어졌고 업계에선 그녀를 향한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 기세를 몰아 전여빈은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극본 이병헌 김영영, 연출 이병헌 김혜영)에서 주인공 이은정 역으로 안방극장에도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다.

전여빈의 등장은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이란 뜻의 신조어)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성실히 연기 공부를 하며 기초를 다졌고, 영화·연극판에 스태프로 참여하며 견문을 넓혔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후 단편영화부터 시작해 각종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기 감각을 익혔다. 그렇게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전여빈은 비로소 첫 주연작 '죄 많은 소녀'를 만나 묵직하게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조금 느려도 수년 동안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온 전여빈. 그녀가 조급해하지 않고 '내공 키우기'에 집중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훗날 배우의 길에 들어설 때,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자신의 다짐을 잘 지켜낸 전여빈은 '죄 많은 소녀'를 시작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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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많은 소녀'가 '멜로가 체질'이 될 때까지

전여빈이 '멜로가 체질'에 주연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시작점도 '죄 많은 소녀'였다. '멜로가 체질'의 극본과 연출을 동시에 맡은 이병헌 감독이 '죄 많은 소녀'의 전여빈을 보고 적극적으로 캐스팅을 추진한 것. "전여빈과 꼭 같이 하고 싶다"는 이병헌 감독의 강력한 러브콜에 전여빈은 기꺼이 응했다.

"올 초에 이병헌 감독님과 미팅을 했는데, 절 믿어준다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절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호감이 컸죠. 또 천우희 언니가 이미 캐스팅된 상황이란 것도 좋았어요. 언니와 꼭 한 번 같이 작품 하고 싶었거든요. 4부까지의 글을 미리 봤는데, 극 중 다양한 캐릭터들이 한바탕 같이 떠드는 모습이 연상됐어요. 작품에 참여한다면, 저도 그들과 함께 재밌게 놀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죠."

특히 전여빈은 자신이 연기할 이은정 캐릭터가 "도입부부터 시선을 확 끌었다"라고 말했다.

"자기 할 말은 하고 뚝심 있는 추진력의 은정이가 뒤로 갈수록 더 입체적이라 생각했어요. 자기의 상흔을 마주하면서 극복해나가는 게, 기존에 보지 못한 결의 캐릭터였죠. 배우로서 욕심이 났어요. 은정이란 캐릭터가 어떻게 성장할지도 궁금했고요."

'멜로가 체질'은 서른이 된 세 친구들, 임진주(천우희 분), 이은정(전여빈 분), 황한주(한지은 분)의 일상과 고민, 사랑을 그린 드라마다. 극 중 이은정은 세 친구들 중 가장 이성적이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능력도 뛰어나 강한 여인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마음속 상처를 마주하지 못해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환상까지 만들어 겨우 현실을 버티는 연약한 존재였다. 이런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연기해낸 전여빈은 은정을 "멋있는 사람"이라 평했다.

"겉은 강해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여렸던 은정이가 결국 자신의 나약한 약점을 적시하고,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요.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요. 은정이는 그러고 난 다음에 자기의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나서죠. 제 캐릭터라 애정이 있어 그런지 모르겠는데, 제가 봤을 때 은정이는 너무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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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여빈이 말하는 천우희, 한지은, 그리고 손석구

'멜로가 체질'을 본 시청자라면, 이은정과 홍대(한준우 분)의 로맨스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여자친구를 든든하게 보조해 주는 다정한 연인인 줄 알았던 홍대는 병으로 이미 죽은 상태. 하지만 은정은 홍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의 환상을 곁에 끼고 다니며 실존하는 인물로 여기고 함께 생활했다.

"홍대는 귀신이 아니에요. 은정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지 못해 곁에 두는 거죠. 촬영을 진행하며, 어쩌면 시청자가 이 커플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이질적으로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래도 우린 최선을 다해 그 인물이 되고자 했죠. 그 안에, 전하고자 하는 진심은 변하지 않는 거니까요. 그 진심을 보시는 분들은 보실 거다, 하는 자신감도 있었어요."

은정은 결국 홍대가 죽었고, 자신과 함께 웃고 대화하던 홍대가 환상이란 걸 깨달았다. 전여빈은 연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은정을 절제된 눈물연기로 표현하며 더 큰 진폭의 먹먹함을 선사했다. 배우 전여빈만의 호흡과 연기의 매력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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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빈이 무거운 연기만 한 건 아니다. '멜로가 체질'에서는 서로 잘 통하는 세 여자친구들이 한 집에 살며 웃고 떠들고, 때론 실없는 농담을, 때론 진지한 고민상담을 나누는 티키타카가 감칠맛 나게 그려졌다. 드라마 속 세 친구처럼, 전여빈은 천우희, 한지은과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전부터 천우희의 '팬'이었다는 전여빈은 천우희와 함께 연기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제가 학창시절에 연기를 꿈꿀 때, 천우희 언니가 '한공주'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했던 눈물의 수상소감에 저도 같이 울었어요. '진짜 이 사람 꽃길만 걸어라, 내가 팬으로 응원하겠다'라고 했었는데, 그런 우상 같았던 언니와 같은 작품을 한다는 게 너무 좋았죠. 우희언니는 처음 만날 날부터 극 중 세 친구의 관계를 생각해 '우리도 말을 편하게 하자'라고 제안했어요. 언니가 우리를 그렇게 해제시켜 준 순간, 좋은 기운이 서로에게 감돌았죠. 언니는 먼저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스타일이에요. 언니가 노력해주니 다가가기 편했죠. 현장에서도 언니가 중심을 잘 잡아줬어요. 연기도 잘하는데, 사람에 대한 태도도 섬세한 사람이에요."

한지은 역시 전여빈처럼 드라마 주연은 데뷔 이래 처음이었다. 그래서 전여빈은 한지은의 간절함에 공감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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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언니는 외모만 예쁜 게 아니라, 노력도 정말 많이 해요. 언니도 첫 주연이었는데,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의 간절함이 옆에서 느껴졌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언니의 간절함을 보며 감동받은 순간들이 있었어요. 언니가 잘하는 순간에는, 제가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언니 잘했어'라며 표현해주고 싶었죠. 저희 세 명이 서로를 안고 보듬어주는 현장이었어요."

홍대와 마음의 이별을 나눌 즈음, 은정에게 새로운 인연이 다가왔다. 배우 손석구가 연기한 '야감독' 상수였다. 은정과 상수의 첫 만남은 화끈한 '욕 배틀'이었다. 자기 사람에게 막말하는 상수에게 은정 역시 찰진 욕으로 상대한 것. 이후 몇 번의 우연한 만남이 이어지며 은정과 상수는 서로에게 조금씩 호감을 갖게 됐고, 이들이 만들어낸 독특하고 신선한 케미가 시선을 모았다.

"야감독 역할에 어떤 배우가 들어올지 몰랐어요. 그러다 촬영 중반에 제작팀에서 손석구 배우가 할 거란 이야기를 해줬는데, 내심 반가웠죠. 대본으로 봤을 때 야감독은 굉장히 튀는, 압도적인 캐릭터였어요. 손석구란 배우의 연기를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 봤을 때, 그 사람 특유의 톤과 야감독이 합쳐지면 흥미롭겠다 싶었어요. 야감독이랑 첫 촬영부터 만나자마자 욕 배틀을 했는데, 석구오빠가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 제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욕 연기가 막 나오더라고요.(웃음) 욕으로 강렬한 첫 만남을 가진 후에 급속도로 친해졌어요. 오빠와 붙는 장면에서 많이 웃으면서 촬영했죠. 너무 재밌는 현장이었어요."

▲ 조금 천천히 걷더라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배우

전여빈은 연기의 시작도, 데뷔도 늦은 편이다. 스무 살 때 연기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겼고, 스물한 살 때 대학교에서 연기전공을 하며 본격적으로 연기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전여빈은 당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연기를 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한 친구가 많더라고요. 아역시절부터 한 친구도 있고, 예중·예고를 나온 친구도 있고요. 그렇게 연기를 위해 노력한 시간이 많은 친구들에 비해, 제가 가진 연기에 대한 호기심이 얕게만 느껴져 순간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생각을 달리했어요. 연기자로 데뷔하기까지 비록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데뷔를 하게 됐을 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자고요. 그 생각이 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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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꿈꾼 스스로가 부끄럼 없이 떳떳할 수 있도록, 전여빈은 그때부터 자신을 갈고닦는 것에 힘썼다. '연기가 뭘까', '좋은 배우가 뭘까' 끊임없는 고민 속에 연기에 도움이 될 시도들을 다양하게 했다. 학교 수업을 들으며 감각을 넓혔고, 영화제나 연극에 스태프로 참여해 선배들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런 공부의 시기를 지나, '작은 영화들부터 시작해보자'란 마음으로 단편영화들에 출연했고, 상업영화의 분위기를 알고자 단역으로 스쳐 지나가는 역할들도 소화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어느덧 20대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전여빈도 어쩔 수 없이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제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아니고, 제 밥벌이를 해야 했죠. 연기가 하고 싶지만, 언젠가 연기를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나이는 드는데 기회는 안 올 것 같다는, 계속 준비만 할 거 같다는 불안감이 생겼죠. 너무 다행스럽게도 그때 제 첫 주연작인 '죄 많은 소녀'가 부산영화제에서 소개되며 배우로서 제 연기를 나름 규모 있는 관객에게 선보이게 됐어요. 그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일들이 계속 생겨났죠. '죄 많은 소녀'는 제게 정말 고마운 작품이에요."

"많이 불안하고 힘들었다"는 전여빈은 나이 서른까지 배우로 밥벌이를 못한다면, 연기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죄 많은 소녀'를 만났고, 그 작품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분명 자신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전여빈은 "하늘이 도왔다"고 말한다.

"아직도 간절한 마음이 있어요. 첫 주연 드라마인 '멜로가 체질'이 '죄 많은 소녀'를 통해 제게 와준 거잖아요? 그래서 이 기회가 저한텐 너무 소중해요. 지금도 연기는 저한테 제일 중요하고, 잘하고 싶고, 애정이 큰 거예요. 이걸 해치고 싶지 않아요. 조금 천천히 걷더라도 한 발 한 발 잘 걷고 싶어요. 오랫동안 꿈꿔왔던 거니까요. 이게 현실이 되고, 좋아하는 이 일로 밥벌이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엄청난 일이잖아요. 하늘이 도왔죠."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