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남산…사실과 진실 사이

김지혜 기자 작성 2020.01.22 23:00 수정 2020.01.23 13:44 조회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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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남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소지만, 1960~70년대에는 서슬 퍼런 독재의 상징이었다. 군부 세력이 나라를 장악했던 그 시절, 남산에는 권력의 상징인 중앙정보부(KCIA)가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의 18년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대통령 직속 기관이다. 권력의 중심에는 그를 보좌하는 충직한 2인자들이 있기 마련. '내부자들', '마약왕'을 만든 우민호 감독이 '그때 그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제2의 권력자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이병헌)이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사건을 벌이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줄거리 요약에서 알 수 있듯 10.26 사건과 그 전후의 이야기를 통해 군부 독재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한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남산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다.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알린 사건이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대통령 암살사건 발생 40일 전으로 시계추를 돌린다.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육군 본부에 몸담았던 이들의 관계와 그들의 내면을 따라가며 독재 정권의 암(暗)을 비춘다.

이병헌이 연기한 '김규평'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이성민이 연기한 '박통'은 박정희 전 대통령, 이희준이 연기한 '곽상천'은 차지철 전 경호실장, 곽도원이 연기한 '박용각'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영화는 이들의 이름을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일정 부분의 가공과 변형에서 자유롭기 위함일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배우들의 영화다.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진행되는 영화는 배우들의 호연으로 인해 리듬을 획득했다. 이 영화가 선사하는 긴장감과 밀도는 배우들의 연기에서 비롯된다. 시나리오에 활자로 묘사된 캐릭터를 배우가 독창적으로 소화해낼 때 어떤 극적 효과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만하다. 이병헌,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은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남산

특히 김규평을 연기한 이병헌은 질투와 욕망, 불안과 증오 등의 감정의 층위를 세밀하면서 폭넓게 연기해냈다.

곽상천 역할의 이희준의 연기도 좋다. 성격과 업무 추진 방식에서 김규평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곽상천은 단순, 무식, 다혈질로 요약할 수 있는 성격이다. 이희준은 이 캐릭터를 시종일관 뜨겁게 연기해내며 극 전반의 무겁고 건조한 분위기에 웃음샘을 제공하기도 한다. 역량에 비해 과소평가 받았던 이희준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연기다.

박통 역할의 이성민 역시 훌륭하다. 그간 여러 편의 드라마에서 묘사된 바 있는 인물이지만 입체적인 묘사로 삼각관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 연기와 대사 없이도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카리스마가 일품이다.

남산

영화의 소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다. 2005년 개봉한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이다. 이 영화 10.26을 소재로 한 첫 번째 상업 영화로 임상수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가 빛을 발하는 수작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며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2000년대 저평가받은 한국 영화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이 영화를 넣을 만큼 뛰어나다. 감독의 시선과 색깔이 정치사의 모자이크와 물음표를 흥미롭게 채운 팩션이었다.

'남산의 부장들'이 재밌는 상업 영화라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감독의 지향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아쉬운 영화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내면을 따라가는 듯 보이지만 내적 갈등과 행동의 동기를 수면 위로 올리지 못한다. 잘 정돈된 미쟝센과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져 장면 장면에 집중할 수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그래서?" "왜?"라는 공허한 물음표가 떠오를 수도 있다.

우민호 감독은 "이 영화는 정치적인 색깔을 띠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공과 과를 평가하지 않았다. 다만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당시 인물의 내면이 어땠지를 쫓고 싶었다. 판단은 관객들이 해주시길 바란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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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색을 완전히 배제했다고도 보기도 힘들다. 김재규에 대한 사법적 평가는 이미 끝났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분분하다.

영화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진실보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자 하지만 이야기는 사실상 김규평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질투에 눈먼 권력 집단의 2인자와 독재 정권의 한계를 느끼고 변화를 주장하는 정치인의 경계를 오간다.

어느 한쪽에 무게를 싣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을까. 갈팡질팡하던 이야기는 결국 2인자의 질투가 빚어낸 파국이라는 범죄물의 클리셰에 가까운 결말을 취하고 만다. 대다수가 아는 유명한 사건을 극화한 영화치고는 지나치게 무난한 선택이다. 그리고는 에필로그에 실존 인물의 목소리를 담아내 석연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미화 논란에서 끝내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내부자들'로 전국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의 맛을 본 우민호 감독은 '마약왕'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남산

'마약왕'과 '남산의 부장들'의 공통점은 실존 인물과 사건을 다룬 소재의 흥미로움이다. 두 영화 모두 역사의 안타고니스트에 가까운 논쟁적 인물을 가져야 관객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 시킨다. 물론 차이는 있다. '마약왕'이 데코레이션만 화려한 맛없는 음식이었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화려한 캐스팅의 기대치에 부합하는 캐릭터 플레이로 재미도 획득했다.

다만 역사적 사건과 문제적 인물에 대한 영화만의 관점과 심도 깊은 해석보다는 인물 탐구에 집중하며 장르 영화에 방점을 찍었다. 매끈한 느와르기는 하나 뛰어난 정치 드라마라는 말은 선뜻 나오지 않는다.

좋은 소재가 흥미와 자극 이상으로 활용되지 못한 느낌도 든다. 이 사건을 몰랐던 2020년의 젊은 관객에게 '옛날 옛적에 이런 일이 있었데...' 정도의 충격과 호기심을 선사하는 것이 '남산의 부장들' 의도라면 성공적이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건 중 하나를 다룬 팩션 영화치고는 소박한 야심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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