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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로컬' 아카데미에 우뚝 선 '기생충'…전율의 순간들

기사 출고 : 2020-02-10 21: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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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아카데미 게티이미지코리아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오스카는 로컬이잖아."

지난해 10월 7일 '기생충'의 북미 개봉을 앞둔 봉준호 감독은 미국 매체 '벌쳐'와의 인터뷰에서 길이 회자될 명언을 남겼다. "한국영화는 지난 20년 동안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왜 단 한 작품도 오스카(아카데미) 후보에 오르지 못했냐"는 기자의 다소 무례한 질문에 이어진 명쾌한 답이었다. 국제영화제도 아닌 미국의 시상식에 한국 영화가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게 그리 대수일까라는 쿨한 반응이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석권했다.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외국어영화상)까지 총 4개의 트로피를 수거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지배한 최초의 외화였다.

"봉.준.호!", "패러사이트!"를 외치는 할리우드 영화인의 목소리에 국내 시청자들은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른 것도 놀라운데, 수상의 영예까지 안는 순간을 무려 네 차례나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전율의 순간이었다.

한국 영화 100년 역사에 최초의 기록으로 남겨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이모저모를 짚어봤다.

오스카

◆ 각본상부터 시작된 '각본 없는 드라마'

각본상은 수상 레이스의 신호탄이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할리우드', '아이리시맨', '결혼이야기', '1917' 등을 제치고 '기생충'의 봉준호, 한진원 작가가 각본상에 호명됐다.

그 순간 가장 뜨겁게 리액션을 한 사람은 한국계 미국 배우 산드라 오였다. 지난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아시아 배우 최초로 드라마('킬링 이브') 부문 여우주연상을 탄 산드라 오는 1년 만에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모습을 보며 제 일처럼 기뻐했다. '자막 1인치'의 장벽을 넘은 한국 감독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아낌없이 드러낸 것이다.

산드라오

봉준호 감독조차도 이게 시작이 될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마치 마지막 무대에 오른 것처럼 긴 수상 소감을 남겼다. 배우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감사함을 표했고 촬영상, 미술상, 편집상 후보에 오른 동료의 이름을 언급하며 영광을 나눴다. 하지만 이는 시작이었다.

◆ "거장을 향한 헌사"…봉준호의 남달랐던 수상 소감

'기생충' 주연의 드라마는 시상식 후반부가 하이라이트였다. 각본상에 이어 국제장편영화상 트로피를 챙긴 '기생충' 팀은 목표를 초과 달성한 상황. 편안한 마음으로 시상식을 즐겨도 될 찰나, 또 한 번 봉준호의 이름이 호명됐다. 가장 치열한 경쟁이 예고됐던 감독상 부문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뛰어난 언변으로도 유명한 감독이다. 영화 속 위트는 본인의 DNA에서 기인한 것임을 이날 수상 소감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선 시상식과 인터뷰에서 "1인치의 자막", "강제 등판된 투수", "극장의 쥐를 보며 수상 예감" 등의 재치 있는 언변을 자랑했다면 이날 시상식에서는 선배 영화인을 향한 헌사로 영화인들을 뭉클하게 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들을 제치고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공부할 때 가슴에 새긴 말 중 하나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창의적인 이야기'라는 말이었다"면서 "이 말을 한 사람은 이 자리에 계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어 "그 분과 같이 감독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을 받을 줄은 전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아이리쉬맨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역작 '아이리시맨'으로 봉준호 감독과 감독상을 다퉜다.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단 한 번의 감독상을 받는데 그쳤다. 심지어 이날은 무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외롭지 않았다. 후배 감독의 진심 어린 헌사에 그는 두 손을 포개 화답했다.

마틴 스콜세지에게 헌사를 바쳤다면 쿠엔틴 타란티노에겐 사랑(?) 고백을 했다. 봉준호 감독은 "제가 유명하지 않았을 때 제 영화를 미국에 알려주신 쿠엔틴 타란티노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사랑해요."라고 센스 있게 고마움을 표했다.

기생충 아카데미 게티이미지코리아

◆ '기생충'은 아카데미의 오명을 씻었다

외국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92년 역사 최초의 일이다. 아카데미 감독상 2회 수상에 빛나는 대만의 이안 감독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고, 지난해 '로마'로 작품상에 도전했던 멕시코 거장 알폰소 쿠아론도 이루지 못한 대업이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은 단순히 한국 영화계만의 경사는 아니었다. 이 결과로 인해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아카데미의 오명도 일정 부문 씻어줬다.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이면 SNS에 등장하는 해시태그가 있다. '오스카 쏘 화이트'(#OscarSoWhite)다. 후보 지명부터 수상까지 백인 일색인 시상식을 저격하는 말이다. 지난해 시상식은 이 오명을 벗어나기 위한 여러 시도를 보여줬다. '블랙 팬서'를 마블 영화 최초로 작품상 후보에 올렸으며, 흑인 배우 두 명에게 남녀조연상을 안겼다.

기생충

그러나 올해 시상식을 앞두고는 다시 잡음이 일었다. 백인 일색의 후보 구성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골든글로브 시상식 코미디·뮤지컬 부문의 여우주연상 수상자였던 '페어웰'의 아콰피나(아시아계)는 후보 지명조차 되지 못했으며, '허슬러'의 제니퍼 로페즈(라틴계), '내 이름은 돌러마이트'의 에디 머피(아프리카계)도 외면당했다.

이 가운데 '기생충'의 6개 부문 노미네이트는 그 자체로도 화제였다. 아시아 영화 그것도 아카데미 92년 역사에 단 한 번도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한 한국 영화에 대한 조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평단과 관객의 반응으로 볼 때 '기생충'의 노미네이트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작품상, 감독상을 낙관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아카데미가 자국 영화가 아닌 외국어 영화에 최고의 영예를 안길 리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올해 아카데미 회원들의 선택은 정확했다. 이 결과는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희석시켜준 결과로도 해석됐다.

아이리쉬맨

◆ 영화계 지각변동 일으킨 넷플릭스…오스카의 외면

넷플릭스 영화에 대한 아카데미의 대우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스트리밍 영화에 대한 장벽을 높인 칸영화제와 달리 아카데미는 문을 활짝 열었다.

지난해 '로마'에게 감독상과 촬영상 등 3개의 트로피를 안겼던 아카데미 시상식은 올해에도 '아이리시맨'과' '결혼 이야기', '두 교황' 등을 주요 부문 후보로 선정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마틴 스콜세지의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리시맨'은 총 10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고 단 하나의 트로피도 받지 못했다. '결혼이야기'는 여우조연상(로라 던) 수상에 만족해야 했다.

넷플릭스 영화는 극장 기반의 플랫폼이 아니라는 태생적 한계가 아카데미 도전의 최대 장벽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조커

◆ 피닉스X젤위거, '인생 연기'에 대한 보상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남녀주연상 부문은 '조커'의 호아퀸 피닉스와 '주디'의 르네 젤위거의 차지였다. 두 배우 모두 첫 오스카 주연상이었다.

호아퀸 피닉스는 자타공인 할리우드 최고의 연기파 배우다. '글래디에이터', '투다이포','투 러버스', '마스터', '이민자', '그녀', '너는 여기에 없었다' 등의 영화에서 최고의 연기를 펼쳐왔다. 오스카와 인연이 없어 보였던 호아퀸 피닉스는 '조커'에서 타이틀롤을 맡아 인생 연기를 펼쳤다.

갈비뼈까지 연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호아퀸 피닉스의 조커는 히스 레저의 그림자마저도 지웠다. 코믹스 원작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초의 배우로도 기록됐다.

주디

르네 젤위거 역시 '주디'를 통해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제리 맥과이어'로 주목받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른 젤위거는 연기력이 과소평가된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콜드 마운틴'의 여우조연상 이후 16년 만에 두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두 사람의 수상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이날 시상식에서 호아퀸 피닉스, 르네 젤위거의 이름이 호명되자 객석의 모든 영화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어나 박수를 쳤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ebada@sbs.co.kr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