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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낡은 이야기가 아니었다"…'작은 아씨들'의 울림

김지혜 기자 작성 2020.02.18 18:03 수정 2020.02.19 16:39 조회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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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씨들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고 있는 감독인 그레타 거윅이 '작은 아씨들'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해묵은 이야기를?'이라는 물음표부터 따라붙었다.

'작은 아씨들'은 학창 시절 필독서로 사랑받아온 미국 고전이다.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수 차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건 1994년도였다. 질리언 암스트롱이 연출하고 위노나 라이더, 수잔 서랜든, 클레어 데인즈, 커스틴 던스트 등이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는 크리스찬 베일의 풋풋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러 또 한 편의 '작은 아씨들'이 찾아왔다. 7번째 리메이크다. '프란시스 하', '레이디 버드'로 유명한 그레타 거윅이 연출하고 페르소냐인 시얼샤 로넌이 주연을 맡았다.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 감독과 여배우의 출연 만으로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극장에서 확인한 '작은 아씨들'는 콘텐츠 고갈로 먼지 쌓인 고전을 스크린에 부활시킨 영화가 아니었다. 새롭게 재탄생한 여성 영화였다.

작은아씨들

◆ 아는 이야기가 다르게 보였다

'작은아씨들'은 1868년 미국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1832~1888)가 발표한 소설이다. 성격이 각기 다른 네 자매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의 꿈을 키우면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출간 당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이 고전을 영화화한 이유에 대해 "'어른이 돼 다시 읽었을 때 전에 읽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면서 "굉장히 현대적으로 다가왔으며 지금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다."고 말했다.

또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할지 알 수 있었다"며 연출의 색깔과 각색의 방향까지도 명확하게 잡고 출발했다고 전했다.

2020년판 '작은아씨들'은 앞선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소설 '작은아씨들'과 그의 후속편 격인 '좋은 아내들'을 엮어서 스토리 라인을 만들었다.

분명 아는 이야기였지만 다르게 다가왔다. 연출은 물론 각본과 각색까지 담당한 그레타 거윅이 원작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 재해석을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각색은 '더하기와 빼기'를 잘하는 것이다. 그레타 거윅은 원작의 뼈대와 줄기를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루이자 메이 올콧이 한 말이나 그녀의 어머니가 한 말을 대사로 추가해 소설에 다 담기지 못한 작가의 목소리를 실었다.

이야기의 구성도 소설과 달리했다. 네 자매의 성장 서사를 시간 순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 네 자매의 모습에서 시작해 유년 시절로 돌아가는 구성을 택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교차 편집으로 네 자매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며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주체적으로 삶을 설계해 나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 비로소 이뤄낸 에이미의 입체화

이야기라는 건 캐릭터에 의해 탄생되고 완성되기 마련이다. 2020년에 찾아온 '작은아씨들'이 앞선 리메이크작과 달랐던 것은 캐릭터의 개별 서사가 한층 풍성해졌다는 것이다.

마치가의 막내딸 에이미(플로렌스 퓨)는 이 '착한 소설'에서 유일한 악인처럼 여겨지는 존재였다. 독자나 관객은 작가의 분신이자 사실상 이야기의 화자라고 할 수 있는 조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조(시얼샤 로넌)가 누릴 수 있었던 기회를 가로채는 것처럼 보이는 에이미를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생각하기도 했다.

'작은 아씨들'은 에이미의 캐릭터를 입체화 하는 데 성공했다. 삶의 지향에 대한 조명이 이뤄졌고, 내외면의 목소리도 충분히 담겼다. 여성의 벽이 높은 시대를 받아들이고,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영악함이 있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작은아씨들

나아가 남성의 선택을 받는 여성에 머물길 원치 않고, 선택하는 여성의 진취적인 면모도 보여줬다. 그래서일까. "너(조)를 향한 사랑과 에이미를 향한 사랑을 다르다"는 로리(티모시 샬라메)의 대사가 처음으로 와 닿았다. 동경과 사랑으로 그 차이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조)의 대체 인물로 로리의 선택을 받았다는 독자들의 오랜 오해는 아마도 이 영화 속 에이미를 통해 풀리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에이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 너도 멋진 여성이었어'

'작은아씨들'에서 조연이라 할 수 있는 대고모(메릴 스트립), 엄마(로라 던), 로렌스 아저씨(크리스 쿠퍼)조차도 캐릭터가 선명하며 역할이 뚜렷하다. 메인 캐릭터와 서브 캐릭터와 절묘하게 맞물려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동시에 서브 캐릭터 또한 그들만의 사연으로 관객과 대화할 수 있게 됐다.

작은아씨들

◆ 150년 전 화두가 2020년에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작은아씨들'은 여성들이 만든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주연 배우들은 여성이며, 주요 스태프 역시 여성으로 구성됐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여성 영화'의 카테고리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이 영화는 남성과 여성이 생물학적 성을 초월해 인생의 화두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는 장을 제시한다.

150년 전 이야기가 지금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작은아씨들'을 보면 현재에 달라진 것과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들을 상기하게 된다.

작은

대고모(메릴 스트립)은 유럽에 동행할 손주로 에이미를 지목하며 "배스는 아프고, 조는 글렀어. 메그는 가난한 가정교사에게 푹 빠졌고. 제대로 된 애는 너뿐이야."라고 말한다. 자신 역시 한 평생을 혼자 살았으면서 '여성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는 결혼'이라고 말하는 모순을 접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이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없던 19세기 미국에서 '결혼'은 '경제적인 거래'의 성격까지도 띠고 있었다. 대고모는 자신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고 있었던 것은 재산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치가의 여성들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백마 탄 남자를 만나는 방법밖에 없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분명 낡은 가치관임에도 그저 화가 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은 '지금은 얼마나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가?'에 대한 반문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대의 분위기와 당대 사람들의 낡은 가치관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행복은 사랑과 결혼에만 있지 않다'고 말한다.

작은아씨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결혼'의 주체적 선택이 중요하다고 할 뿐.

"여자도 감정뿐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어요. 외모뿐 아니라 야심과 재능도 있고요. 전 사람들이 여자에게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는 게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너무 외로워요."

시얼샤 로넌의 탁월한 연기로 표현된 조의 고백은 가슴에 팍 하고 꽂혔다. 주체적 여성이 되고자 하는 지향과 여성의 행복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 대사는 조의 성장 과정에서 생채기 같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고독과 외로움을 짚어준 말이라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조의 엄마는 돌아온 로리를 잡겠다는 조에게 "그를 사랑하니?"라고 묻는다. '사랑받는' 여성만큼이나 '사랑하는' 여성의 삶도 중요한 것임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조언하듯 말이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아씨들'은 두 개의 엔딩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허구라는 암시를 준다. 1868년 루이자 메이 올콧이 책을 발간하기 위해 '결혼=해피엔딩'이라는 성공 공식(이라 믿었던)과 싸워야 했던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그것을 허구와 실제라는 경계 아래에 놓음으로써 관객의 '해석의 여지'까지 남겨둔 훌륭한 영화적 선택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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