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화)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SBS스페셜' 정인숙 피살 사건…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대한민국'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0.03.09 00:34 수정 2020.03.09 09:19 조회 12,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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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정인숙 피살 사건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했다.

8일에 방송된 SBS 스페셜에서는 '너에게 들려줄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3월 이야기'의 첫 번째 편이 공개됐다.

이날 방송에서는 역사적인 사건 하나를 3명의 스토리텔러가 자신의 느낌에 따라 전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첫 번째 스토리텔러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 두 딸의 아빠 대한 미국인 크리스.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부터 한국사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뽐내 눈길을 끌었다.

두 번째 스토리텔러는 자칭 쾌변, 변호사 박지훈. 역사를 좋아한다는 그는 연도 좀 배우는 남자로 대한민국의 굵직한 사건들의 연도를 줄줄이 외웠다.

마지막 스토리텔러는 10년 차 배우 남보라. 그는 "역사를 잊어버리면 지금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더라"라며 현대사회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 역사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방송은 3명의 스토리텔러에게 50년 전, 1970년 3월에 일어난 정인숙 피살 사건에 대해 온전히 자신의 시점으로 해석해 친한 지인들에게 전달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박지훈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안다. 가장 미스터리하고 추문에 가까운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크리스와 남보라는 정보를 모으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의 대상을 정해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리스는 동네 단골 미용실 헤어디자이너, 남보라는 절친, 박지훈은 딸에게 정인숙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앞 강변로의 승용차에서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아 정인숙이 숨졌다. 그리고 운전을 하던 그의 오빠도 총상을 당했던 것. 그리고 정인숙의 오빠가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자백을 해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당시 그의 오빠는 "동생에게 그동안 무시를 당하고 열등감이 많았다. 여동생의 문란란 사생활 때문에 가문이 수치를 당해 살해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사 과정을 통해 정인숙이 당대 최고의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알려지고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다. 당시 정인숙의 집에서는 미화 2천 달러의 현금이 발견되었다. 당시 환율로는 소주를 만 병 살 수 있는 돈.

또한 여권 발급 자체가 힘들고, 보통 단수 여권만 발급되었던 시대에 회수 여권을 갖고 있던 것이 포착되어 눈길을 끌었다. 회수 여권은 횟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여권이었다. 고위층만 가질 수 있던 여권을 갖고 있던 것.

그리고 정인숙은 야간 통행금지 시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했던 것으로 알려져 의아함을 자아냈다. 또한 정인숙이 남긴 수첩이 있었는데 그 수첩 속에는 당시 유력한 정치인들의 전화번호와 신상정보들이 다 담겨있어 충격을 안겼다.

또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결혼도 하지 않은 정인숙에게는 3살짜리 숨겨둔 아들이 있었던 것. 그리고 아들의 아빠가 수첩 속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소문은 국회에도 알려졌고, 당시 나훈아가 발표했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가사를 바꿔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노래까지 유행을 했다고 알려졌다.

정인숙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던 그때 취재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3선을 노리던 박정희 정권은 3선을 위한 개헌을 위해 언론을 더욱 통제했던 것. 그러나 사건 발생 1년 뒤에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정인숙 피살 사건이 보도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정인숙은 요정의 기생이었던 것. 여자들이 한복을 입고 술시중을 들던 요정. 정인숙은 당시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선 욱 각에서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울에는 100여 개의 요정이 있었다.

또한 요정은 은밀한 일들이 진행되는 공간이었다. 당시 생겨났던 문화 중 하나가 요정정치, 밀실정치였다. 어둠의 공간에 모여 은밀하게 부패한 정치를 했던 것. 이에 당시 정치가들은 국회에서는 졸고 요정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런 정보를 알기 위해 요정에 일하는 기생들이 스파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때는 중앙정보부에서 요정을 관리하는 미림팀까지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 요정, 기생 문화가 해외에 알려지고 기생을 체험하기 위한 외국인들이 한국에 관광을 오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술시중을 들고 연회를 여는 것뿐만 아니라 매춘까지 했던 기생들. 그리고 국가는 이를 이용한 '기생관광'이라는 상품까지 만들어 충격을 안겼다.

믿을 수 없는 사건에 남보라는 국회 도서관에서 방문해 이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그리고 기생 관광에 대하 보고서를 발견해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할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떻게 그게 관광상품이 되냐. 될 수 없지 않냐"라고 했다.

당시 기생관광으로 방문한 외국인들은 65만 명에 달했고 특히 일본인의 비중이 많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70년대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들 중 7~80%가 남성 관광객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기생 관광을 즐기러 온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듣던 크리스의 지인은 "환장할 노릇이네. 비참한 이야기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당시 나라는 기생들을 관리까지 했다. 교정과를 만들어 기생을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관광종사원이라는 등록증까지 발급했던 것. 이것이 있다면 통금시간에도 프리패스가 가능했고 고급 호텔에도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교육을 받고 이를 이수를 하면 발금이 가능했던 기생 등록증. 당시 나라는 "너희가 벌어들인 외화가 경제를 성장시킨다. 너희가 한 매춘 행위가 애국이다"라며 매너 교육도 시키고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박지훈의 딸은 "여자들이 너무 불쌍한 거 같다"라고 했다. 그리고 크리스의 지인은 국가에서 기생을 수출의 역군이라 언급한 것에 대해 "미친놈들이다"라며 거친 말을 뱉었다.

당시 장관은 기생들에게 "열심히 일해라. 너희가 하는 일이 애국이다"라고 실제로 말하기도 했다. 이에 크리스의 지인은 "나라에 대한 배신감이다. 벼락 맞을 일이다. 마음이 아프다.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접대 문화를 만들겠냐. 상상이 안 간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당시 나라는 돈이 없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이 관광을 오게 했는데 그 선봉에 기생관광이 있었던 것. 기록에는 당시 8000여 명의 여성들이 일본인을 접대하는 일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80년대까지 이어진 기생관광, 이를 온몸으로 막던 이들이 있었다. 그 선봉에 섰던 한 사람은 여성운동가 이우정 선생님. 이우정 선생님은 일본인 관광객의 변태적 행위로 자살한 기생 사건을 접하고 취재를 통해 기생관광에 대한 실체를 알게 됐다. 당시 기생관광을 멈추라는

이우정에 대해 당시 정부 관계자는 "필리핀은 화대가 겨우 60달러인데 우리나라는 100달러다. 지금은 과도기이니 조금만 참아달라"라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이우정 선생은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네 딸부터 내놓아라"라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관광여행사를 운영했던 김문숙 선생님은 진짜 온몸으로 공항에서 기생관광을 막았다. 당시 김문숙의 항의에 대해 일본인들은 "옛날에 전쟁 시에는 군인이라 돈이 없어서 몸 팔러 온 한국 여성들에게 돈을 못줬는데 이제는 부자가 되었으니 돈을 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망언을 했던 것.

이에 김문숙 선생은 일본과 한국 공항에 직접 가서 일본인들의 입국을 막고 피켓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운동의 시초였다.

이날 스토리텔러들은 정태춘의 곡 '나 살던 고향'이라는 노래도 소개했다. 기생관광에 대해 풍자한 이 노래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또한 정인숙의 피살 사건에 대해 자백을 했던 그의 오빠는 "내가 왜 내 동생을 죽이겠냐"라며 사건 발생 19년 후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정인숙의 아들은 친자 소송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당사자가 사망하며 친아버지는 끝내 밝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끝으로 정인숙 피살 사건에 대해 알게 된 크리스의 지인은 "이 슬픈 역사를 외국인보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남보라는 "내가 하기 싫으면 남도 하기 싫다. 하늘 아랫사람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며 사람보다 돈이 중요하던 슬픈 시절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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